< -- 50 회: 충돌 -- >
지금까지 자신들을 해치려고 마음 먹은 자들을 끝까지 죽이지 않은 것은 상현이 베푸는 자비였다.
인간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고 번영을 도우라.
여신의 가르침을 떠올린 상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성을 이용해 인간을 잠재우는 것은 그 사람을 단순히 검으로 베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특히 일반인이 아니라 높은 능력자일수록 힘이 배로 들었다.
상위 괴수들을 잠재우고 토막치는 일을 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부상이 심한 백종현을 정부의 능력자 종합 병원에 맡기고 밖으로 나온 상현은 전화를 걸었다.
"예. 어인 일로 이시간에 전화를 다 주셨답니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정석영이었다. 상현은 앞 뒤 다 짜르고 용건을 물었다.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전화 너머의 정석영은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한 번 물었다.
"죽여요? 누가요?"
"제가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제서야 뭔가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정석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도심에서 무차별 학살을 할 건 아니겠죠?"
상현은 귀중한 인재다. 그는 신이다. 그가 설령 살인을 한다고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그를 벌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한국에 사는 국민들 다수를 도륙하며 미친 악신처럼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 국가는 그를 전력으로 서포트하며 큰 이익을 꾀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상현이 잠재능력이 뛰어난 능력자라고만 생각할 뿐, 신이라는 사실은 아직 모른다.
"능력자가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세상이라지만 뒤끝없는 살인을 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붙어야 합니다."
인적이 없는 곳, 증거가 남지 않도록 촬영기기가 전부 죽어버리는 곳, 그런 곳은 한국에 며칠마다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디멘션홀이다.
높은 등급의 디멘션 홀일수록 처음 발생시 강력한 전자기파장을 내뿜기 때문에 도시의 CCTV를 비롯한 장비들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 게다가 빠르면 몇 시간 전부터 대피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보는 시민도 없게 된다.
능력자들끼리 치고 박다가 종종 살인사건이 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 막말로 맘에 안드는 동료나 타기업 능력자를 죽여서 드럼통에 넣고 공구리칠 한다음 바다에 던지거나 아무도 모르게 깊은 땅 속에 파묻어 버리면 누가 알겠는가.
"무슨 일 있었습니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죠."
사람을 죽이겠다는데 돕겠다고 말하는 정석영도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정석영은 한솥밥을 먹는 식구로서 상현이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이고 다닐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기업에서 오늘 백종현씨를 해쳤습니다. 현재 능력자 통합병원에서 치료 중입니다. 저는 어제 KD측 팀과 마찰이 있었구요."
"하여튼 기업노무 새끼들이 문제라니까."
그새끼들은 좀 당해도 싸다며 정석영이 거들었다.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오늘 마지막 경고를 했습니다. 이제 경고를 무시하는 자가 나온다면 더 이상 자비는 없습니다. 정석영씨, 가까운 시일 내에 나타날 5급 이상 디멘션 홀 위치와 시간을 알려주세요."
그것만으로 정석영은 상현이 어떻게 나설지를 짐작했다.
"알겠습니다. 5급 이상이면 보통 6시간 전부터 예측이 될테니 잡히는 대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이 일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다치지 말도록 하세요. 당신은 이제 일개 개인 능력자가 아니니까요."
정석영과 통화를 마친 상현은 검을 뽑았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장검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것을 쓸 일이 없기를....'
똑똑-
"들어와."
노크소리에 출입을 허락한 남자는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안주삼아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올릴 보고라...."
남자는 이 사회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매장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부하는 진땀을 흘렸다.
"팀 미쏠로지 대원, 백종현을 놓쳤다고 합니다."
"오전에는 붙잡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를 지키고 있던 인원들이 당하는 바람에...."
"쓸만한 뒷배경이라도 있었나?"
"아닙니다. 증언에 따르면 혼자라고 합니다. 단독으로 쳐들어와서 묶어둔 백종현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부하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문이 나서는 곤란한 이런 종류의 일을 처리하는 전담반의 실력은 제법 출중한 편이다.
1군팀에는 못미치더라도 2군 팀에는 충분히 버금갈 정도, 그런데 그 정도 전력을 상대로 혼자서 싸웠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쪽 피해는?"
"없습니다. 경상자는 있어도 사망한 인원은 없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상대는 손속이 무른 인간으로 보였다. 음지의 전담반들은 손속이 잔인하다. 고문도 서슴치 않았을 테고 그 모습을 봤을텐데도 그들을 전부 살려뒀다고 한다.
그러니 무르다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달리 놀란 이유로는 그들을 모두 제압했다는데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배 가까이 힘든 일이다. 굳이 적을 상대로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정도 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초 강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아니면 제압용 스킬을 익힌 특수능력자일 수도 있겠군.'
"누구라고 하던가."
"환상현이라고 합니다."
"그래."
백종현이 전장에 다시 나타났을 때부터 그는 기분이 별로였다. 환상현은 아마도 놈이 길러낸 재능있는 능력자임에 틀림없었다.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우성진, 한국의 2강 기업 중 하나라는 삼상의 정규 공격팀 총대장을 맡고 있으며 더불어 9레벨 능력자인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떻게 할까."
그저 맞아주기만 하는 것은 그들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창 밖으로 움직이는 도시의 불빛들, 개미들 위에 지어진 이 거대한 성채에 군림하는 자신들은 왕이었다.
그런데 오늘 왕에게 반기를 든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성진은 말해보라는 듯 침묵을 고수했다.
"한 번만 더 자신들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10대 기업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하하하."
그 말을 들은 우성진은 진심으로 웃기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아직도 이런 놈이 사회에 남아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누가 누굴 상대로 협박을 한단 말인가.
"대단한 놈이군. 해외로 도망쳐도 시원찮을 판에 뭐라고? 가만히 있질 않아?"
한참을 웃어젖힌 그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하는 짓이 두 놈다 마음에 안드는군."
종현과 상현을 싸잡아 비난한 우성진은 잊고 있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기껏 살려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있어서 백종현은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체했지만 실은 백종현만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피가 끓었다.
바로 눈앞에 있다면 죽이고도 남을만한 분노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그의 증오는 하루가 다르게 거대해져만 갔다.
"그래. 그 때 확실히 죽여버려야 했어."
빌딩의 정문에서 백종현을 내동댕이쳐 계단아래로 쓰러트렸을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좌절, 절망, 모욕감. 그 모든 것들이 잠시나마 자신의 속내를 어루만져 주었기에 백종현을 살려줬다.
당시의 자신이 했던 선택을 우성진은 후회하고 있었다.
"아, 이거 참 이 좋은 경치를 확 버리게 만드는군."
잡쳤다는 표정으로 우성진은 인터폰을 들어 외부로 전화를 연결했다.
"어 그래. 오랜만에 통화하네. 잘 지냈나? 다름이 아니고 하찮은 벌거숭이 한 놈을 손봐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역시 마음이 맞는군.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우리 B팀이 당분간 일정이 없으니까 말이야. 다른 팀에게도 말해주겠나? 고맙네."
전화를 하고 나니 속이 조금 가라앉는 듯 했다. 자신은 한국 최고의 능력자, 조무래기 따위는 얼마든지 밟아버릴 수 있었다.
'다시 기어나온 걸 후회하게 해주마.'
우성진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 잔이 퍼석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상현이 원하는 전화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앞으로 6시간 뒤에 대구에 5급 디멘션 홀이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예약을 건 팀은 엘즈입니다."
상현은 고맙다고 말했고 정석영은 자신이 더 준비해 줄 것이 없냐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통화하죠."
정석영과 통화를 마치자 옆에 누워 있던 종현이 입을 열었다.
"안 가는게 어떻겠어."
그는 상현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이미 다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 내키지 않아했다. 그의 힘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선배, 저는 바보는 아닙니다. 이대로 놔두면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요. 저는 분명히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만약 제 말을 제대로 새겨들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에요."
그러나 백종현은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이 얼마나 악랄한 놈들인지를, 결코 상현의 경고를 받아들였을 리 없었다. 오히려 분노로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전면전은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도와야 하는데...."
"미안하지만 선배가 옆에 있으면 방해가 되는데요?"
상현이 웃으며 말하자 종현은 한숨을 쉬었다.
"죽일 참이냐?"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금방 다녀와서 결과를 보고해 드릴게요."
상현은 종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병실을 나섰다. 종현은 차마 그를 말리지 못했다. 말린다고 가지 않을 상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나선 상현은 센터에 들러 무장을 점검했다. 오늘은 방어를 할 일이 없으니 방패는 등에 한 개만을 걸쳐 두고 좌 우로 장검을 준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을 마친 상현은 각오를 다지며 목적지로 향했다.
디멘션 홀 오픈 한 시간 전, 상현은 전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빌딩 위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픈 시간 30분 전이 되자 어슬렁 어슬렁 엘즈 공격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때와는 달리 1군 공격대였다. KD 2군팀이 쑥대밭이 됐다는 소리에 본래 5급 처리는 잘 나서지 않던 1군이 나선 것이다. 물론 상현은 그들이 몇 군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면 그것으로 적이 되는 것, 그 뿐이었다.
오픈 시간이 되자 디멘션 홀이 입을 벌렸고 거인의 포효가 일대를 울렸다. 사이클롭스의 왕, 사이클롭스 킹과 그를 따르는 거인들이 홀에서 튀어나왔다.
보스 홀로 나왔을 때보다는 훨씬 더 까다로운 패턴이었다.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상현은 그들을 기습하지 않고 레이드가 끝나기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괴수를 잡고 있는 엘즈 공격대를 뒤에서 공격하면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더 이상 자신들에게서 손을 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전투는 오래 지속됐다. 무려 1시간, 엘즈의 1군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5급 디멘션 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린 편이었다. 부하들까지 다수 튀어나오는 바람에 시간이 더 걸린 탓도 있었다.
때가 됐다고 판단한 상현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지면에 착지, 그들에게 다가갔다.
괴수 사체를 감정하기 위해 정부 관계자를 부르려던 그들은 저편에서 다가오는 환상현을 보자마자 연락을 중단하고 그를 맞이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공격대장 엄지웅이 말했다.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포한 환상현이군?"
엄지웅이 말하자 엘즈 대원들이 피식 웃으며 상현을 향해 썩소를 지었다.
"그 말 그대로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우리를 건들겠다면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를 처단할 것이다."
"처단? 처단이라고 했나?"
엄지웅을 비롯한 공격대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오냐. 널 처단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
엄지웅의 말대 엘즈 공격대원들은 각자 다른 대기업을 향해 전화를 걸었다. 삼상, SJ, KD 등등 환상현이 남긴 경고를 듣고 발끈한 대기업들에게 그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천하의 어느 미친 놈이 자신들에게 도전할까 싶었는데 눈앞의 있는 놈이 바로 그 미친 놈이었다.
"이거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살아있기나 할련지 모르겠네."
엄지웅이 눈치를 주자 다른 이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상현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고 너희들은 내 말을 어길 참이로군."
"니 새끼가 뭐라고 어겼다, 어기지 말아라 지랄이야!"
꾹 참고 있던 분노를 터트리며 엄지웅이 외쳤다.
"더 이상의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원망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상현은 허리춤의 검집에서 매끄럽게 검을 뽑았다.
"미친 새끼!"
엄지웅의 욕설과 함께 엘즈 공격대가 상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의 분노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며 거대한 불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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