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 회: 파행 -- >
먼저 움직인 것은 상현이었다. 에딕손과의 전투로 충격파가 터질 것을 염려한 그는 일행이 타고 있는 비행기에서 멀어지기 위해 공항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상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딕손이 무서운 기세로 따라붙었다. 거리를 벌리려고 한다는 상대의 속셈을 알아차린 그가 전력으로 달려들어 주먹을 내뻗었다.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공기의 벽이 덮쳐왔다. 상현은 검을 세로로 움직이며 벽을 갈랐다. 그러나 갈라진 벽은 다시 뭉쳐 상현의 전신에 그대로 직격했다.
"큭!"
피부의 보석갑옷을 만들며 벽에 충돌하는 순간 상현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순간 시야가 새까맣게 될 정도의 타격, 강렬한 충격에 상현은 이를 악물었다.
"나를 상대로 도망만 칠 수 있다고 보는가?"
에딕손은 즐겁다는 표정으로 더욱 거리를 좁혔다. 원거리 공격도 세계 최강에 걸맞는 수준, 그러나 그는 근접전이 더욱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받아라!"
번개처럼 내지르는 주먹에 담긴 거대한 폭풍, 붉은 기운이 서린 그 주먹을 받아내는 상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겁다.
상대의 주먹이 터무니 없이 무거웠다. 거대한 괴수를 홀로 상대할 때 만큼의 압력을 느끼며 몸이 순식간에 뒤로 밀렸다. 그러나 에딕손의 주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매섭게 연타를 시작했다.
절대적인 힘, 진정한 세계 최강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는 듯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상현의 전신을 난타했다. 그 여파에 주변에 있던 자재들이 휩쓸려 나갔고 활주로에 쩌적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윽."
붉은 빛이 번쩍이며 수십톤의 폭약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천지를 울리자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은 얼굴 앞을 손으로 막으며 움찔했다.
비행기가 들썩거려 밀릴 정도의 위력,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친 상현의 꼴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오라를 무럭무럭 피워올리는 에딕손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환상현은 그 짧은 순간에 전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움푹 패여 들어간 팔목 보호대와 방패가 얼마나 상대의 공격이 강렬한지를 증명했다.
"세상에...."
상현이 저 정도로 밀릴 줄 몰랐던 미쏠로지 대원들은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초월급 괴수를 상대로도 일대일을 서슴치 않던 공격대장이 단 한 명의 인간에게 밀리는 광경은 그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펑- 펑!
에딕손의 손이 잽을 날리는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허공을 격하고 상현의 주변에서 파공음이 울렸다.
공격이 어찌나 빠른지 대원들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상현과 에딕손이 펼치는 초고속의 공방전은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최대 레벨을 뛰어넘고 있었다.
"돌아가 아이리."
상현은 뒤로 물러서며 숨을 몰아쉬더니 가슴안에 웅크리고 있던 아이리를 꺼내 비행기 쪽으로 날렸다.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는 언제 가슴을 타격당할지 신경이 쓰여 오히려 발목을 잡히는 상황이었다.
"끼룩."
구슬프게 운 아이리는 주저하지 않고 비행기로 날아갔다. 상현을 돕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오히려 대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설마 새 한 마리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건 아니겠지? 이대로 원사이드하게 흐르는 게임은 내가 기대했던 전개가 아니야."
에딕손은 팔을 붕붕 돌리며 천천히 전진했다. 마치 거대하 산이 다가오는 것 같은 압박감, 상현은 검을 움직여 묵직한 검기탄들을 연속으로 쏘아보냈다.
이수연을 압박했던 것처럼 속사포로 쏟아지는 검기탄, 그러나 이수연의 반응과 에딕손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상현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렸던 이수연과는 달리 에딕손은 손을 툭툭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흩어버렸다.
"이런 가벼운 공격으로 내게 납득을 요구할 생각은 아니겠지?"
콰앙────!
신성력이 폭발하더니 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속에서부터 날카로운 기세가 상현의 정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신성을 끌어내도 막는게 전부라니.'
겉으로 봤을 때보다 상대의 공격은 훨씬 더 무겁고 강했다. 상현은 상대가 샤먼이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신의 힘을 강림시키는 샤먼은 절대로 이 정도 수준의 신성을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 없었다.
상현의 예상은 정답이었다.
에딕손 본인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반신의 후예였다.
신의 피가 인간의 대를 타고 이어지며 옅어지긴 했지만 에딕손의 천부적인 재능과 맞물려 그의 대에 다시 꽃을 피웠다.
태양신, 테스카틀리포카.
전쟁의 신이자 밤의 신으로도 불리며 온갖 다양한 신성을 겸비했다는 신, 그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 중 에딕손은 그 힘을 온전히 각성시킨 자였다.
'방법이 없을까.'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힐만한 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펼친 다크 블레이드 뿐이었지만 상대는 그 틈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상대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상현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잠깐, 놈이 반신 이상의 지위를 가졌다면.'
라그라로크 당시 마신들과의 대결을 떠올린 상현은 뒤로 물러서던 동작을 중단하고 곧바로 발을 쭉 차며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멈춰라!』
에딕손의 머릿속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상현의 목소리, 신성으로 여과없이 전달한 거대한 호통에 에딕손은 순간 눈앞이 어지러움을 느끼며 자세를 흐트러트렸다.
'뭐, 뭐지!'
신성을 담아 말하는 신족의 언어는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려는 힘을 가진다. 비록 상현의 육체는 과거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롯이 빛나는 신성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밝은 빛을 태우고 있었다.
『태초의 혼돈에서 피어난 순백의 어둠을 알아볼 수 있는 자들아. 경외하고 경외하라.』
만약 에딕손이 한낱 초월체급 괴수의 신성을 지녀 상현의 신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면 충격이 덜했겠지만 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인간 후예들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편에 속했다.
상현의 신성에 고스란히 노출된 에딕손이 몸을 부르르 떠는 순간 처음으로 상현의 검이 그의 몸에 닿았다.
"크윽!"
스스로 신성을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고 숙달시킬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에딕손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신들을 상대로 전투를 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
지금은 신들의 시대가 아닌 인간의 시대, 그와 신성을 견줄만한 인재들은 전부 어디로 숨어있는지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상현은 질릴 정도로 많은 신격체들과 전투를 치르며 온갖 정신공격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다행이다.'
상대가 좀 더 전투에 노련했다면 통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했다. 단순히 귀를 막고 정신력을 끌어올려 방어하면 얼마든지 상대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절대 힘에 복종하라.』
그렇게나 유리한 전투를 펼치던 에딕손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눈앞이 캄캄했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가운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치명상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입닥쳐!』
에딕손의 눈이 부릅떠지며 엄청난 신성력이 폭풍처럼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반동에 상현의 공격을 이어나가던 왼팔이 순식간에 꺾이며 튕겨져 나갔다.
'이런!'
"하아하아."
처음으로 신성의 또다른 측면을 다루기 시작한 에딕손도, 고위 신성을 마음대로 뿌리던 상현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상현은 에딕손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발전 속도가 가히 괴물같은 녀석이었다. 에딕손은 자신과 싸우면서 실시간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저만한 신성을 발휘하고도 멀쩡한 것을 보면 신체도 자신보다 월등하게 좋은, 신의 피를 제대로 물려받은 육체임에 틀림없었다.
"무슨 꼼수를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납득 시킬 수 없다."
이를 갈며 다시 일어선 에딕손을 보며 상현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어차피 마력을 모으기는 틀린 일, 약식의 다크 블레이드를 거리 영점에서 뿜어내기로 결심한 상현이 전력으로 치달았다.
"밤의 여신 아이라발디아의 아들, 라그나로드 웨일이 명한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상현의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에딕손은 큰 공격이 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서 일대의 공기를 모조리 끌어들였다.
그 충격에 한국팀 뿐만 아니라 미국 공격대까지 목을 붙잡으며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대기가 옅어지더니 호흡에 필요한 산소가 터무니 없이 줄어든 것이다.
공중에서 날아들며 방패를 검으로 스위치한 상현의 왼쪽 검이 먼저 움직였다.
"다크 프레셔!"
세 갈래로 나뉘며 지면을 휩쓰는 어둠의 발톱, 에딕손은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르며 공기의 벽을 연달아 뿜어냈다.
생각보다 공격이 강했는지 에딕손은 처음올 자신의 연속 공기벽이 상대의 기술에 찢기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진짜 주먹은 이미 자신의 옆구리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중이었다.
'와라!'
상현의 심장을 부숴버릴 기세로 주먹에 힘을 실은 에딕손은 지진이라도 난듯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상현이 검을 뻗는 순간 그가 포효하며 빛살을 내뿜었다.
"죽어라!"
에딕손이 외쳤다.
에딕손의 옆구리에 상현의 검이 닿는 것과 동시에 그의 주먹도 상현의 심장에 직격했다.
둘 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충돌했지만 승패는 명확하게 갈렸다. 어둠에 휩쌓여 상대의 옆구리를 가른 검은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에딕손의 주먹이 직격한 상현의 가슴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전장에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 누구도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공기가 자리를 되찾아 숨을 쉴 수 있게 됐음에도 다들 말을 잇지 못하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상현은 상대의 몸에 꽂혀있는 은색 장검을 그대로 두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쓰러지는 상현을 보며 에딕손은 고통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자신이 이긴 것이다. 상당히 강적이었으며 생전 처음 보는 정신공격을 쓰는 놀라운 전투력을 지녔지만 최후에 땅을 밟고 굳건히 서있는 것은 자신, 쓰러진 것은 상대였다.
부그르르-
바로 그 때, 천천히 상현의 뻥뚫린 가슴이 급속도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테두리로부터 시작해 새살이 돋아나더니 가슴을 완벽히 메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이적인 재생력, 이 때 만큼은 에딕손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상현은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가슴이 재생되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피를 한 바가지 토하고 나서야 뒤로 벌렁 넘어질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재생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자 상현은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지독하군...."
에딕손은 자신의 옆구리에 박혀있는 검을 뽑아내며 상현의 옆에 던졌다.
"재생능력자라는 소문은 알고 있었는데 머리통을 날려버릴 걸 그랬군."
아무래도 심장은 타격지점으로 미적지근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머리를 타격했으면 상대의 반응속도로 미루어 볼 때 고개를 틀어 피했을 확률도 없잖았다.
괜히 머리를 놔두고 몸통 중앙을 타격한 것이 아니었다.
상현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순간 미쏠로지 대원들이 우르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며 에딕손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상현의 주위를 감싼 대원들은 무기를 뽑아들며 기세를 드높였다.
"전투는 끝났어.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납득은 했다고."
그렇게 말한 에딕손은 주변을 둘러봤다. 인간 두 명이 만든 참상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대지는 완벽하게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약속한 대로 납득을 했으니 보내주도록 하지."
그의 말에 미쏠로지 대원들은 혹시나 그의 마음이 바뀔까 부랴부랴 죽은 듯 누워있는 상현을 들쳐메고 비행기로 향했다.
"이대로 그냥 보내시면 벡클레이님이...."
"괜찮아. 내가 약속한거니까 지킬 뿐이다."
부대장이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거냐며 한마디 했지만 에딕손은 손을 저었다. 한국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보며 에딕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세계 최강자를 가리는 자리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그의 미소를 본 부대장이 말했다.
"뭐. 이 정도는 당연하지. 나는 언제나 세계 최강...."
거기까지 말했을 때 에딕손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그는 심장을 부여잡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왜그러십니까!"
깜짝 놀란 부대장이 그를 채 부축하기도 전에 에딕손의 입에서 대량의 검은 피가 솟구쳤다.
"끄어억."
상현의 마지막 일격, 다크 프레셔를 미끼로 던지고 부어넣은 다크 블레이드의 성난 마력이 몸속에서부터 바깥으로 터져나가며 그의 몸을 완전히 헤집어버린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은 그는 힐러들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으키는 것 뿐이었다. 완전히 뒤집어진 속을 치료하려면 족히 몇 주 이상을 누워있어야 할 판국이었다.
'환상현...!'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붙잡을 수도 없는 그의 모습을 뇌리에 새기며 에딕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보다 더 화끈할 수 없는 대결을 펼쳤건만 결과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재생한 환상현이 다시 일어섰다면 어떤 전개가 펼쳐졌을지를 떠올리며 그는 공항을 빠져나갔다.
양쪽 모두에게 쓰라린 패배였다.
============================ 작품 후기 ============================
예전에 어느 독자분께서 미국은 신이 없겠네요. 라고 하셨었는데 사실 미국신화는 없지만 아메리카 대륙으로 넓히면 신들이 있습니다.
테스카틀리포카도 그 중 하나죠.
제우스나 오딘처럼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메이저 신은 아니지만 일부 작품에 등장하는 신입니다.
스카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촌놈이라고 해야되려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