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7 회: 대무덤의 대장장이 -- >
문을 넘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무덤가였다. 앙상하게 말라붙어 가지만 남은 나무들, 듬성듬성 세워진 이름 모를 무덤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분위기도 그렇지만 냄새도 안좋네요."
상현의 말에 다들 동감한다는 분위기였다. 주변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흘러 코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전장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보스방에 입장했으면 으레 저급한 몬스터들이 손이라도 흔들면서 일행을 반기거나 그 동네 주민들이 인사를 하기 마련인데 주변에 인기척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쏠로지 팀이 공략한 던전중에 가장 삭막했던 화염동굴 마저 불 정령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을 정도인데 이곳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저 멀리, 얼마나 먼 곳인지 가늠하기 힘든 숲의 끝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일행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불꽃의 근원으로 걸음을 옮긴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일행은 크게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이게 다 뭐야?"
그곳엔 온갖 마물들이 육중한 철제 우리에 갇혀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마도 보스방의 마물들이라 추측 됐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우리로 보이는 곳에는 샹굴라 대무덤의 보스인 데스나이트도 갇혀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죽음을 맛보게 해주마!"
단단한 감옥 안에 갇혀있지만 않았더라도 모험가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을테지만 저렇게 갇혀 있어서야 영 박력이 느껴지질 않았다.
"욕 봐라."
"수고해."
일행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철창 앞을 지나가자 데스나이트는 굴욕이라는 듯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전투 준비."
상현의 말에 일행은 다들 무기를 쥐며 긴장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밝게 타고 있는 거대한 협곡이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좁은 길이었지만 그 끝에 뭔가 엄청난 것이 있다는 느낌은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일행의 선봉에 서서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상현은 후끈 거리는 열기에 눈쌀을 찌푸렸다. 밖에서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곳은 거대한 불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거대한 불기둥을 솟아올리고 있었으니 그 중심으로 이어지는 길이 뜨거운 것은 당연했다.
스카디와 재후가 열심히 냉기마법을 운용하는 덕에 일행은 통구이 신세를 면하며 협곡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럴 수가."
협곡을 빠져나오자 펼쳐진 것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대형 공방이었다. 용암이 흐르며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 끝까지 치솟는 용광로와 모루가 불을 뿜는 거대한 공방, 그리고 미쏠로지 대원들을 적대하듯 검을 든 병사들이 발걸음을 맞추며 다가왔다.
'사람이 아니군.'
철컥 거리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병사들은 전부다 기계임에 틀림없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생기가 한 움큼도 느껴지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황금을 뒤집어쓴 듯 번쩍거리는 병사들은 순식간에 일행을 포위했다.
"싸우자는 뜻일까요?"
"그럴꺼면 벌써 활을 쐈겠지."
기계 병사들 중에는 검을 든 자들 뿐만이 아니라 활을 든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은 계단 위에 올라서서 미쏠로지 대원들의 목이나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주변의 기계 병사들은 얼핏 잡아도 그 수가 천을 훌쩍 넘는 것으로 보였다.
"누가 나의 공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는가!"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목소리에 기계 병사들이 검을 세우며 좌우로 물러섰고 열린 길을 통해 드레스를 걸쳐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스카디는 상현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오더니 옆구리를 쿡 찔렀다.
"2대 헤파이토스야."
"헤파이토스라고?"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로 대장장이의 신이며 제우스와 헤라의 피를 이어받은 신들의 적통, 그러나 그는 핏줄만큼 대단한 대접을 받진 못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불꽃에 휩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란 헤라가 헤파이토스를 떨어트렸는데 그 때 떨어진 충격으로 그는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부부는 아들을 찾으러 오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아내가 바람까지 피고 이래저래 불쌍한 일을 많이 겪은 신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화 속의 헤파이토스가 남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여자잖아?'
그러나 스카디가 헤파이토스라고 알려준 존재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여성이 분명했다.
2대 신 쯤이야 스카디가 있으니 못 믿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스카디는 여신의 지위를 물려받은 2대 여신이었다.
"오호라. 너는 스카디 아니냐?"
"헤파이토스가 봉인을 깨고 나와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상대가 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헤파이토스는 눌러뒀던 신성력을 여과없이 뽐내기 시작했고 그 후광에 일행들은 눈을 뜨기 힘들다는듯 손으로 앞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신이 내뿜는 강한 신성은 인간들이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인간들이 있으니 신성을 줄여주시기 바랍니다."
상현이 말하자 헤파이토스는 실수했다며 다시 신성을 줄였다.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보통 인간들이 아님에 틀림없구나. 차를 대접할테니 안으로 들자꾸나."
방금전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신성을 겪은 일행은 저 여자가 정말 신이냐며 수근거리기 바빴다. 괴수가 나타나고 던전 탐험을 하는 시대였으니 신화 속의 신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공방안에 마련된 주택으로 들어서자 엄청난 양의 발명품들이 일행을 맞이했다.
"인간들은 거기 편히 앉아 있어라. 스카디 너는 할 얘기가 많을테니 나를 따라오도록."
"잠깐! 얘기를 나눌거면 한 명 더 데리고 가야겠어."
"누구지?"
헤파이토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스카디는 상현을 가리켰다.
"지금은 이 사람이 우리 리더니까 꼭 참석해야 돼."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
그렇게 세 사람은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1대 헤파이토스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장장이 신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자였다. 그러나 그도 나이가 들자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날이 많아졌는데 정신이 맑아진 어느 날, 그는 후계자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자신이 만든 황금 마차를 타고 하늘을 날던 그는 이름도 생소한 시골 마을에서 한 명의 소녀를 점찍었다.
"소녀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디아라고 합니다."
"손재주가 무척이나 좋구나!"
헤파이토스는 그녀가 집 마당에 늘어놓은 발명품들을 보며 감탄했다. 인간이, 그것도 어린 소녀가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재주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은 헤파이토스라고 한다."
"뭐든 만들 수 있다는 신 아니십니까?"
"바로 그렇다. 내가 너의 재주를 높이사 오늘부터 너를 내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어떻겠느냐."
좋다고 박수를 칠 줄 알았던 헤파이토스의 예상과는 달리 이디아는 썩은 물고기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어째서냐. 세상의 그 무엇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주겠다. 네가 원한다면 너만을 위한 왕국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헤파이토스님은 워낙 재주가 뛰어나 다른 신들에게 부려먹히기만 하고 심지어 호구같은 짓을 일삼기만 하니 정신적 고통이 크시다 들었습니다."
제우스나 아레스 같은 성격 더러운 신들이 들었으면 노발대발했을 대목이었지만 오히려 헤파이토스는 어린 소녀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비록 그들의 청을 물리치지 못했지만 너는 얼마든지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가족과 3일을 더 보낸 이디아는 헤파이토스의 뒤를 따라 렘노스 섬의 공방으로 들어갔고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뭐든 잘만들었던 헤파이토스는 가르치는 재능 또한 뛰어났는데 영특한 소녀의 재능과 그의 훌륭한 교육이 상승효과를 발휘하여 이디아는 순식간에 헤파이토스의 거의 모든 진전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가끔 정신이 나가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리는 늙은 신을 뒷바라지 하며 살길 천 년, 그녀는 헤파이토스가 죽자마자 2대 대장장이 신으로 등극했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칙칙한 마신들이 세계의 질서를 무너트리며 나타나기 전까지는.
"무시무시한 놈들이었지. 솔직히 그런 놈들이 나타날 줄 알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테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안이했다."
방심한 것은 그리스 신들 뿐만이 아니었다. 지구상의 모든 신족들이 처참하게 개박살이 난 것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탈출한 거야?"
스카디가 묻자 헤파이토스는 자신의 재치를 뽐내듯 말했다.
"혹시나 이런 위험이 닥칠까 싶어 나는 한 가지 준비를 해두었다. 내 몸 안에는 언제든지 펼칠 수 있는 소형 공방을 준비해 두었다. 봉인석 안에 갇히자 마자 나는 활동을 시작했지."
몸 안에 감춰둔 공방을 꺼내 장비를 제작하기 시작한 그녀는 군대를 만들고, 마신에게 대적할 무기를 제작해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봉인석을 파괴했다고 말했다.
"그대들도 보았을 것이다. 나의 황금의 군단을, 황금의 병사들로 마신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그녀의 당당한 말에 상현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더냐 인간아!"
헤파이토스의 목소리가 서재를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스카디는 상현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며 그를 두둔했다.
"신이었나? 그렇다고 해도 나를 비웃은 것은 참기 힘든 모욕이구나."
"비웃은 것은 사과합니다. 그나저나 바깥의 황금 군대라고 했던가요? 마신들을 상대하기엔 터무니 없이 약해보입니다만."
상현이 여전히 웃음을 참기 힘든듯 입을 가리고 말하자 헤파이토스는 심히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현재 내가 모은 병사들이 3천을 넘는다. 한 명이서 일당 백을 할 수 있는 녀석들이니 마신놈들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일당 백의 기준이 대체 어디에 기준을 두고 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현이 보기에 바깥의 기계 병사들은 중급 능력자 정도만 되면 충분히 일대일을 펼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혹시 여기에 있던 괴물은 어떻게 했어? 잡으면 커다란 마력핵을 주는 녀석인데."
"아. 잡았더니 공방이 순식간에 사라져서 깜짝 놀랐던 그놈 말이군. 죽이는데 애를 먹었지. 내 황금 병사들을 무려 2천이나 도륙한 놈이었다. 마신 중에서도 상급의 녀석이라 할 수 있겠지."
상황이 이쯤 되자 스카디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쿡쿡 거리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기 헤파이토스? 그건 마신이 아니라 마신의 졸개야. 발에 채일 정도는 아니라지만 그렇게 강하지도 않은 녀석이라고 했어."
"뭐라고?"
스카디의 말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럴 리가...고작 마신의 잡졸들한테 내 황금병사들이 2천이나 찢겼단 말이냐."
"그만큼 허접하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네 놈! 그 말은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할 말 없을 것이다!"
"당신 마신 본 적 없지 않습니까."
상현의 말에 헤파이토스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사실 그녀는 올림포스가 무너지던 날에 섬의 공방에 틀어박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봉인석 안이었다.
다른 신들이 분전하다가 제압당한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세상에...그럼 자다가 잡혔단 말이야?"
"그렇게 됐다."
"그럼 다른 신들도 봉인됐다는 소식은 어떻게 안 거야?"
"이 녀석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곤충 모양을 한 작은 로봇들이었다. 메뚜기, 나비등 다양한 기계 곤충들이 그녀의 손 위에 놓여져 있었다.
"우리 그리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북구 신족까지 전멸했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들을 구할 자는 나밖에 없다고 판단했지. 그래서 이렇게 공방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깥의 황금 병사들은 하루에 얼마만큼이나 만들 수 있습니까?"
상현의 말에 헤파이토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하루에 열 댓개는 만들 수 있다. 그날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그녀의 말을 들은 스카디와 상현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루에 열 개라고 한다면 저 정도 전투력을 가진 병기는 크게 쓸데가 없어보였다.
일 년을 꼬박 생산해도 4천 개가 안된다는 소리였는데 중급 능력자 4천 명은 8급 괴수가 두셋만 나타나도 금방 찜쪄먹을 수준이었다.
"물론 이것은 소형 공방이라 그런 것이다. 렘노스 섬의 내 공방을 되찾는다면 생산 효율을 열 배 가까이 늘릴 수 있다!"
그녀의 외침에 스카디와 상현은 영혼없는 박수를 쳐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다. 이 세상에 내가 못 만드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도 만들지 못하는 물건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못 만드는 물건이겠죠."
"그게 뭐지?"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만들지 못할 거란 얘기에 헤파이토스는 살짝 관심을 보였다.
"신성을 가려줄 수 있는 천이 필요합니다."
지구의 신화를 읽고, 스카디와 만나며 신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상현이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성을 가려줄 새로운 옷이었다.
============================ 작품 후기 ============================
대장장이 하면 역시 헤파이스토스죠.
작품 내에서는 어감상 헤파이토스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만...
신화 속의 내용을 봐도 불쌍한 구석이 제법 많은 신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2대 여신님의 활약을 기대해 주시죠.
(활약을 하게 될지 공돌이 노예가 되어 템만 제작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