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9 회: 공방 탈환작전 -- >
『아아- 나의 잠을 방해하는 것들아. 너희들은 오늘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놈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커다란 노란 눈과 함께 슥 웃고 있는 검은 용은 꽤나 무서워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검은 용을 마주한 상현의 전신에서 전의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용에게서 마신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어이, 일단은 물러나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상현의 옷깃을 헤파이토스가 다시 아래로 잡아당겼다.
뱃머리를 돌려 도망치려는데 검은 용이 또아리를 풀며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설령 신이라 해도 도망갈 수 없다!』
이 세계의 신들이 죄다 마신들에게 죽거나 봉인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검은 용이 웃으면서 불을 뿜었다. 눈앞의 신들 역시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테티스! 일어나라, 안 죽은거 다 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진홍의 화혐이 닥치는 것을 보며 헤파이토스가 바다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갈리토스가 불을 향해 빛의 방패를 내미려는 순간 바다가 일렁이더니 엄청난 양의 물이 공중으로 올라가며 검은 용의 불을 받아냈다.
"그럼 그렇지. 나중에 보자!"
거대한 해일이 연달아 솟아오르며 불을 받아내자 헤파이토스는 텅 빈 바다 표면에 손을 흔들었고 일행은 다시 결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까 손을 흔든 곳에 바다의 여신이 있었습니까?"
"그래. 그녀는 지중해를 다스리는 여신이지. 그녀도 2대야. 내가 예쁜 목걸이도 만들어다 선물해줬는데 이럴 때 모른척 하면 천하의 개썅년이지."
"그녀가 살아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착한 친구긴 한데 순둥이거든. 분명 뭔 일 터졌을 때도 바다밑에 꽁꽁 숨어서 목숨 부지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 본래 바닷속 뒤지기는 힘든 법이잖아."
헤파이토스의 말에 따르면 테티스는 올림포스 신이 아니며 티탄의 후예라고 했다.
태양신 헬리오스나 달의 여신 셀레네, 새벽의 여신 에오스 삼남매 등의 유명한 티탄들이 신화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다시 푸른 하늘 아래로 도착한 일행은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며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해?"
"아니요."
아라크네 정도의 적이라면 10급의 적이라고 상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죽는 대원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
"제 대원들은 아직 최후 전쟁에 대비해서 더 키워야 하는 이들입니다. 솔직히 저 용을 상대하기엔 실력이 모자란 대원들이 더 많아요."
"그럼 일부만 데려와. 너랑 나, 그리고 갈리토스와 스카디, 그 외에 쓸만한 인간들 몇 명 더 붙여놓고 내 황금 군단을 내보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헤파이토스가 미쏠로지 전원을 데려올 필요 없다고 말해주자 상현은 고맙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미쏠로지 팀을 도와준 가장 큰 이유가 공방의 탈환이었는데 전력 감소가 염려되니 대원들을 빼달라고 한 것은 상당히 염치없는 부탁일 수 있었다.
"검은 용아, 기다려라! 내 반드시 네 놈 목을 치러 오겠다!"
안개 숲을 향해 헤파이토스가 소리치자 안개 너머에서 분노에 찬 짐승소리가 들려오는듯 했다.
"배 잘 썼습니다."
일행이 돌아올 때 까지도 노인은 멍한 표정으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상현이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무래도 헤파이토스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걸 눈치챈듯 했다.
"렘노스 지방엔 예전부터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득했지. 요즘처럼 과학 신봉하면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는 섬이 아니란 말야."
헤파이토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묵을 방을 잡았다. 일행은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지원 병력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의 결정에 상현은 조금 이상한 것 아니냐며 질문했다.
"저희 대원들이야 부르면 오겠지만 황금 병사들을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쓸만큼 데려왔어."
그녀의 말에 상현은 대체 어디에 숨겼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꺼낸 것은 자그마한 황금태엽구슬이었다.
"풀면 다시 넣기 힘들어. 그냥 이 안에 들어있다고만 알아둬."
"얼마나 있습니까."
"2천 명, 나머진 던전 지키라고 놔뒀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인원만 선별하면 되겠군요."
상현의 말에 헤파이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정부에 국제전화를 연결한 상현은 탈환작전에 필요한 명단을 또박또박 불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상현이 불러준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에딕손 씨, 신재후 씨, 엄지연 씨, 김재식 씨, 김현성 씨, 백종현 씨, 이수연 씨, 이상 일곱 분이 확실합니까?"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상현은 식사상이 차려진 테이블로 와서 헤파이토스와 마주앉아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만 넘기면 큰 고비 하나를 넘기는 셈이었다. 더 이상 전력분산 없이 미쏠로지 팀을 풀가동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 작전에 스카디와 9레벨 힐러 신채은이 빠진 이유는 명확했다. 상현의 신성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작전에서 전력으로 신성을 운용할 참이었다.
상위 신성체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만한 건 저 멤버 중에서도 자신과 갈리토스, 에딕손 뿐이었다.
재후나 종현이 신성을 얻었다곤 하지만 3인방에 비하면 태양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정부에서 검사관들을 통해 흩어진 A팀과 B팀의 인원을 모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터, 식사를 마치고 난 상현은 산책을 나서겠다며 마을을 걸어다녔다.
능력자는 어디에도 있다더니 렘노스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엔 하급 던전이 하나 있었는데 파티를 짜고 던전을 공략하는 능력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양 떼가 돌아다니는 초원 옆에 지어진 던전 입구앞에 모인 능력자들은 어딘가 평화로워 보였다.
하급던전은 준비만 잘하면 위험할 것도 없는 던전이었으니 웃으면서 입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가롭게 섬 이곳저곳을 돌고 돌아오자 여관 1층의 TV가 긴급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현재 아테네 시에서 최초로 대규모 디멘션 홀 경고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대규모라니. 세상 말세네."
같이 TV를 보던 시민들은 세상 망할 징조라며 중얼거렸고 다리를 꼬고 있던 헤파이토스는 볼을 긁적였다.
"야! 어디가!"
장비를 챙겨 나가는 상현의 뒷모습을 확인한 그녀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테네로 갑니다. 제가 없어도 막을 수 있다면 검을 뽑을 일은 없을 겁니다."
"아오!"
상현의 오지랖에 발끈한 헤파이토스는 성큼성큼 언덕을 걸어내려가는 상현의 등 뒤에 매달려 힘차게 목을 졸랐다. 흔히 백초크, 리어네이키드 초크라고도 불리는 목조르기가 제대로 시전되자 상현은 살려달라며 켁켁거렸다.
"이 중요한 상황에 어딜 가겠다는 거야 머저리야! 공방 전투가 코앞인데 저기 나가서 다치면 어떡할 거야!"
"켁켁, 이것 좀 놓고...."
보통 인간이었으면 몇 초도 안 돼 기절하거나 털썩 쓰러졌겠지만 상현은 능력자에 마력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니 백초크 정도로 쉽게 기절하진 않았다.
상현이 정신을 차렸다고 판단한 헤파이토스는 그제서야 상현을 놓아주며 설교를 늘어놓았다. 한참 그녀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상현이 발끈했다.
"아니, 오히려 저보다 헤파이토스 씨가 더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스 사람들이잖아요."
목을 어루만지며 상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듯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매우 당당했다.
"내가 왜? 날 섬기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리스 신이라고 해서 그리스 사람들을 도울 것 같으면 그냥 지구에 사니까 구해줘야 된다고 하지 그러냐."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지구의 신이라면 무릇 사람들을 구해줘야 할테죠."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현을 보며 헤파이토스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따라 들어와."
헤파이토스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여관으로 질질 끌고가자 상현은 이러면 안된다며 버텼다.
"안 따라 들어오면 더 이상 너네 팀에 장비 지원 없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따라들어간 상현은 결국 풀이 죽어 TV에서 전달되는 속보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야. 안 자?"
밤 늦게까지 TV를 보고 있는 상현을 보더니 헤파이토스는 하품하며 말했다.
"상황이 안 좋데요. 벌써 아테네 시가 쑥밭이 됐어요."
최초로 다수의 디멘션 홀이 동시출현한 아테네는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주로 5급 이하의 괴수들이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벌써 100개도 넘는 디멘션 홀이 열렸다고 했다.
거기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6급의 리치는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에휴."
저대로 놔두면 자신이 잠들자마자 튀어나갈 것 같기에 그녀는 갈리토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갈리토스, 저 녀석 감시해. 나 자는 사이에 어디 못 도망가게 해. 알았지?"
군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완수할 것을 대답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상현은 밤이 되면 몰래 섬을 빠져나가 아테네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갈리토스가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니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갈리토스의 감시를 벗어나려면 그를 패죽이던 못쓰게 만들던 해놔야 했는데 결전을 앞두고 중요한 전력을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패죽이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헤파이토스의 전용무장을 물려받은 갈리토스는 자신의 힘에 버금가는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결국 여관을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한 상현은 그대로 1층의 탁자 위에 엎어져 잠을 잤다. 평소 잠이 없긴 하지만 기력을 유지하는데는 잠자기 만한 것이 없었다.
아침이 되자 하나둘씩 사람들이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은 여관은 렘노스에서 몇 안되는 괜찮은 여관이었다. 아침 식사를 주문하며 헤파이토스는 한 마디 중얼거렸다.
"심각하긴 한가보네."
밤이 지나는 사이 그리스의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리스 정부는 결국 디멘션 홀을 제압하지 못했고 아테네 시를 벗어나 거대 괴수들이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마치 12년전 러시아 대혼란 당시의 축소판 같았다. 그 때는 강력한 괴수들이 수만도 넘게 튀어나왔다고 했다.
"아마 저 정도 상황이라면 공방작전을 하기 전에 정부가 지원을 요청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트롤이나 프로스트자이언트 토벌 때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면 주변 국가들은 언제나 미쏠로지를 찾았다.
그리스는 한국과 거리가 멀긴 했지만 더 이상 자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세계 각국에 지원을 요청할테고 가장 먼저 연락을 받게 되는 것은 미쏠로지가 될 것이다.
"EU 능력자 연합이 그리스 소탕 작전에 참여할 공격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망자가 벌써 수만에 이르는 이번 사건은 다시 한 번 사회에 몬스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으며...."
아니나 다를까 TV를 계속 보고 있을 때 상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예. 환상현입니다."
정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EU에서 연합 공격대를 조직하고 계시단 말씀은 들으셨죠? 지금 렘노스 섬에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임시로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정부에서는 환상현 씨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아직 8급 이상의 괴수가 보이질 않고 있거든요."
그말의 핵심은 어차피 마력핵을 얻을 수도 없을테니 힘을 뺄 필요도 없고, 네가 정 뛰고 싶으면 참여를 해도 좋다라는 뜻이었다.
유럽측의 연락을 받았으니 상현에게 이런 지원 요청을 전달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긴 해야할 것 아닌가.
'참여하겠다고 하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겠어. 부셔버릴 거야!'
이글거리는 헤파이토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잠시 고민한 상현은 TV속에서 울고 있는 시민들의 얼굴을 보더니 곧장 대답했다.
"참여 하겠습니다."
"으아아아악!"
여신의 포효가 여관 지붕을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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