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 회: 공방 탈환작전 -- >
"감사합니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깐."
뒤져버리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라며 헤파이토스는 발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그럼 무사히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지."
갈리토스가 무운을 빌며 상현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여관 2층, 헤파이토스의 방.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상현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고지식하긴 하지만 착한 녀석이야!'
스카디의 말을 떠올린 헤파이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조금이란 단어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 의미가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환상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본 신들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고지식했다.
인간들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신을 좋아할테지만 언제나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랑을 잊어버릴 것이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헤파이토스는 상현에게 갈리토스가 착용하고 있던 무구까지 빌려줬다.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두터운 흑색의 로브를 걸치고 상현은 테베로 가는 비행기 편에 몸을 실었다. 이미 아테네는 쑥대밭이 된지라 곧바로 갈 수는 없었다.
능력자 연합이 집결하고 있는 곳은 아테네 북서부에 위치한 테베라는 도시였다. 크고 작은 경비행기와 수송 헬기들이 그곳에 모여들고 있었다.
대형 수송 헬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유럽 각지의 능력자들이 메마른 도시에 발을 딛었다.
삐익-!
목이 쉬어라 호루라기 소리를 부는 경찰들은 길게 이어진 피난 행렬을 통제하며 시민들을 북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상현은 그 광경을 보며 천천히 남쪽 경계선으로 걸어 내려갔다.
상현이 테베에 도착했지만 그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은 없었다. 그가 정부에 아테네 탈환 작전에 동참하겠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현은 자신에게 과도한 관심이 몰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이곳에 온게 아니었다. 단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괴수들의 목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느려.'
제법 많은 능력자들이 집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상현이 보기에 유렵연합의 대처는 너무 느렸다. 심지어 제대로 된 구심점도 없어보였다.
누군가 직접 나서서 공격대를 통솔해야 하는데 다들 실력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서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목소리만 커지니 의견이 모일리 없고 단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법, 상현은 그들을 놔두고 경계선에 도달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리스의 능력자들이 두 발 벗고 나서서 전선을 유지중이었다. 유렵연합에게는 이번 탈환 작전이 힘을 과시할 장에 불과했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투두두두-
총구가 불을 뿜으며 1~3급에 해당하는 하급 디멘션 홀에서 튀어나온 괴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중급 정도의 괴수만 되도 화기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자이언트 맨티스나 코볼트, 고블린 같은 약한 몬스터들에게는 비교적 효과적인 무기였다.
가끔씩 저지선을 돌파해 넘어오는 커다란 놈들에게는 로켓이 튀어나갔고 그마저도 뚫고 오는 놈들은 능력자들이 달려나가 막아냈다.
"동쪽! 동쪽이 위험하다!"
"후퇴!"
"후퇴하라!"
자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필사적으로 막고는 있었지만 적들의 물량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마지막 헬기 촬영 당시 디멘션 홀은 여전히 닫히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몬스터를 뿜어내고 있다고 했다.
지옥의 구멍이 열린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헬기라는 표현이 쓰인 것은 더 이상 공중 촬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아테네 시 상공에는 와이번을 비롯한 포악한 공중 괴수들이 진을 치고 있기에 접근이 불가능했다.
퍼퍼펑!
전차들이 후퇴하며 불을 뿜어보지만 몬스터들의 진격속도가 무시무시했다. 매설된 지뢰들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불꽃이 솟아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살려줘!"
그 순간 상현의 귀에 애타는 비명이 들렸다.
공교롭게도 병사를 공격하고 있는 몬스터는 자이언트 맨티스, 환상현을 죽게 만들었던 대형 사마귀 몬스터였다. 상현은 주저할 것 없이 검을 휘둘러 맨티스의 몸을 터트렸다. 수십미터의 거리를 날아가 검기탄이 작렬한 것이다.
체액이 사방으로 터져나가자 병사는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엉금엉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자신이 어떻게 목숨을 건진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대낮이었기에 몬스터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현은 로브를 펄럭이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은 전선을 막아내야 할 때였다.
신성이 주입된 도끼가 빛을 발하자 몬스터들의 시선이 환상현에게로 쏠렸다.
『죽어라!』
대량의 몬스터 군집에 상현이 외쳤다.
그의 외침에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움찔하며 몸이 굳었고 그와 동시에 검과 도끼에서 무자비한 마력이 방출됐다.
콰콰콰콰-!
전장을 돌파하기 시작한 한 명의 전사, 군인들과 능력자들은 모두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대체 누구지?"
저정도 실력을 가진 능력자라면 소문이 날 법도 했지만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머리를 다 가릴 정도로 두꺼운 투구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갑옷으로 그의 성별을 짐작할 뿐이었다.
'설마 여자인가?'
여성 능력자들 중에 고레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 상현이 불러낸 어둠이 대낮의 하늘을 덮으며 몬스터들에게 벼락을 떨구기 시작했다.
검은 벼락이 일대를 강타하자 몬스터들은 해변가 모래 쓸려나가듯 맥을 추지 못하고 사라졌다.
군부와 능력자들이 막기조차 버거워했던 몬스터 행렬이 단 한 명의 가세로 밀려나고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힘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뒤늦게 공격을 시작한 유럽연합 공격대는 멍하니 몬스터들의 잔해를 지켜보는 군인들을 붙잡고 물었다.
"우리도 잘 모습니다. 이름 모를 능력자 한 명이 이렇게 했다는 것 밖에는...."
"한 명이?"
군인의 말을 들은 능력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저레벨 등급의 몬스터들은 고위 능력자들이라면 얼마든지 학살 가능한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전장에 널린 몬스터들의 시체를 볼 때 엄청난 숫자가 몰살을 당했음이 틀림없었다.
"어서 뒤쫓읍시다!"
누군지 몰라도 이런 전력을 가진 능력자가 단독으로 행동했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유럽연합의 큰 인력 손실이었다.
남자의 말에 동의한 능력자 군단이 서둘러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몰려드는 대규모 몬스터들과 부딪쳐야 했다.
군인들이 목격한 능력자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몬스터 무리가 몰려오자 고개를 저었다.
'죽은 모양이군.'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 군인들이 말한 능력자는 아무래도 홀로 분전하다 죽었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힘을 냅시다!"
유럽연합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들은 몬스터들을 베며 한시라도 빨리 아테네의 디멘션홀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홀로 전선을 지키다 죽을 이름모를 전우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능력자, 상현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진격 중이었다. 하늘을 밟고 뛰기 시작한 그는 10미터 상공에서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날고 있었다.
그의 발밑으로는 엄청난 수의 몬스터 대군들이 이동중이었다. 가끔 머리 위를 지나는 상현을 발견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화살이나 마법을 쏠라치면 이미 저 멀리 멀어졌기에 공격은 거의 불가능했다.
쉬이이이잉-
'미사일인가?'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 미사일들은 전부 아테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도시가 폐허가 된 상황, 디멘션 홀 파괴를 지원하기 위해 미리 계획되어 있던 미사일 세례가 떨어지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미사일들이 떨어지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한 상현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디멘션 홀 자체는 마력의 파동같은 것이라 결코 화기로 제압할 수 없었다.
미사일은 잡몹들을 쓸어담아 일시적으로 길을 내줄 뿐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결국 디멘션 홀 파괴를 위해서는 고위 능력자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거리면 가능하겠지.'
상현은 눈을 부릅 뜨며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그 순간 거대한 금빛의 타원이 여러장 겹쳐지며 기하학적인 도형을 완성시켰다.
『전이.』
그의 몸이 금빛에 휩쌓이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금빛이 다시 모인 곳은 눈으로 새겨둔 미사일이 떨어진 자리, 아테네 상공이었다.
힘이 모자라 초 장거리 전이는 불가능했지만 시야가 닿는 정도의 거리라면 이동이 가능했다.
'역시 전이의 술은 아직 무리인가.'
몸이 뻐근함을 느끼며 상현은 발밑에 펼쳐진 검은 문들을 파괴하는 것에 집중했다.
벼락치듯 내리친 도끼의 힘에 디멘션 홀들이 하나씩 쪼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엄청난 마력 폭풍, 디멘션 홀이 하나 깨져나갈 때마다 더 부서질 것도 없었던 도시가 더욱 폐허가 되어갔다.
그러나 상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들러붙는 몬스터들의 목을 치는 것은 물론이고 도망치는 몬스터를 주살하는데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아테네 중심에서 황금빛이 번쩍이기를 삼십 분여, 도시가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공격대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베어나왔다. 밀려드는 몬스터들은 끊이 없었다. 특히 리치등의 군단 몬스터들이 발휘하는 마법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 외에도 만티코어 같은 녀석들이 펄쩍 뛰어다니며 연합원들을 괴롭혔다. 괴수란 괴수는 이곳에 전부 풀려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유럽의 정예 공격대만 모였다는 연합은 역시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무려 1400명, 전원 상급 능력자들로만 구성된 연합 공격대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군을 거듭했고 작전 시작 6시간 만에 아테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와아아!"
아테네 지역에 들어서자 공격대는 함성을 지르며 서로의 기운을 북돋았다. 이제 전투는 거의 막바지라고 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도 오전에 비하면 튀어나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처음 1시간의 전투가 가장 힘들었을 정도였다.
"디멘션 홀을 파괴하러 갑시다!"
프랑스 최고의 탱커이자 유럽에서 손에 꼽는 정예 탱커인 9레벨 능력자 피가두는 일행을 진두지휘하며 시가지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은 시내에 진입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몬스터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다 정리가 된듯 그곳엔 엄청난 숫자의 괴수 사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몬스터의 피가 강처럼 흘러 신발이 철퍽거릴 정도였다.
"이게 대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들이 처리할 예정이었던 디멘션 홀 역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디멘션 홀이 닫힌 모양입니다."
"어쩐지, 점점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든다 했더니 결국 스스로 닫혔나 보군요."
본래 디멘션 홀이라는 것이 몬스터만 슬쩍 내뱉고 닫히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그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러자면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누가 이 많은 몬스터들을 죽였느냐는 것이었다.
미사일 폭격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사체를 보면 거대한 힘에 의해 두동강이 난 것이지 결코 화력에 불탄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매끄럽게 잘려있다. 누군가 여기에 왔었던 것이 틀림없다.'
대체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테베에서 이곳까지 길을 뚫는데만 걸린 시간이 여섯 시간에 달했다. 자그마치 상위 능력차 1400명이다.
그들이 이렇게나 고전했을 정도인데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능력을 펼쳤다는 사실을 그들은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미스테리를 남긴 채로 아테네 탈환 작전이 종료를 맞이했다.
"빨리 왔네."
"예."
몸에 피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상현을 보며 헤파이토스가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을 해. 저거 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TV 화면에는 이번 작전을 완수했다는 것에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는 유럽 연합의 영웅들이 있었다.
"다 여러분이 응원해주신 덕분입니다."
같이 TV를 지켜보고 있던 렘노스 섬 주민들은 역시 유럽연합이라며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무사히 종료됐으니 이것으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힘들었다는 듯 털썩 주저앉으며 상현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맥주를 들이켰다.
"야! 그거 내 꺼야!"
"죄송합니다. 목이 말라서."
상당히 고전을 치른 모습이었다. 전신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일부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봤지만 이내 관심은 다시 TV속 영웅들에게로 돌아갔다.
"전부 자기네들이 한 걸로 할 생각인가 본데?"
그녀의 말처럼 의문의 누군가가 디멘션 홀을 파괴했을 것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유명인사 좀 되보지 그러셨나. 기껏 똥빠지게 고생해놓고 얻은 것도 없네."
"뭘 얻으려고 간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는 디멘션 홀만 파괴했을 뿐, 고생은 저들도 많이 했습니다."
헤파이토스는 답이 없다는듯 상현을 물끄러미 노려보고서는 갑옷을 손질해야 하니 빨리 씻고오라며 투정했다.
"힘들어도 탈환 작전은 스케쥴 맞춰서 진행할 거야!"
"물론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상현은 자신의 옆에 걸려 있던 도끼의 손자루를 매만졌다. 정말 엄청난 무기였다. 오늘 전투는 헤파이토스의 무구를 착용하고 전력으로 힘을 발휘했을 때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지를 정확히 깨닫게 해준 전투였다.
소득이 전혀 없는 전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할 수 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식사를 주문하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대원들이 무사히 집결하는 것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환상현 : 이제 이 정도는 아무 문제없죠!
연참이 가득한 하루였습니다. 이제 자고 싶은데...자고 싶은데...
자버리면 12~1시에 글을 올릴 수가 없으니 말이죠.
12시에 땡 하고 올릴까 고민했지만 일단 올리고 봅니다.
그리고 이번 편이 100화거든요!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