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2 회: 공방 탈환작전 -- >
회전하며 합쳐진 어둠의 기둥이 칼라곤의 목구멍을 넘어 내부를 휘저었고 이내 꼬리 끝을 터트이며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회전력에 어둠의 힘이 합쳐진 강대한 공격, 직격당한 검은 용의 몸이 천천히 스러지며 바람결에 흩날렸다. 놈의 육체는 흑색의 눈처럼 매우 곱게 갈려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거대한 폭발, 상현은 가까이 붙어 있던 수연을 끌어 안아 보호 했다. 저 멀리 해변가에 있던 병사들이 바람에 밀릴 정도의 강한 폭발이었다.
쿠구구궁-
산산조각난 얼음 위에 서서 충격이 가시기를 기다린 상현이 천천히 기세를 거뒀다. 칼라곤에 의해 지배되던 공방 주변의 날씨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섬을 감추는 안개는 여전히 그대로 였지만 태양빛을 막고 있던 검은 화산재들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구름을 가르며 햇빛이 섬을 비추기 시작하자 남은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환호했다.
그들이 이긴 것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바닷물에 흔들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조각 위에서 상현은 이수연에게 기다리라고 한 뒤 얼음들을 밟으며 칼라곤이 쓰러진 자리로 다가갔다.
그곳에 거대한 마력을 내뿜는 흑색의 마력핵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사악한 기운을 담고 있는 마력핵, 자그마치 10급의 마력핵이었지만 상현은 이것을 대원들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마신의 기운.'
상현이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마신의 기운이다. 천신인 그는 마신의 기운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트롤 때처럼 대원들이 마력핵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확률도 높을 뿐더러 대원들에게 마신의 기운을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라져라.』
상현이 말하자 마력핵은 알아듣기라도 한듯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끼질,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상현은 마력핵을 향해 힘차게 올드원을 내리찍었다.
빠캉!
큰 폭발은 없었다. 그저 마력핵이 있던 자리에 잠시 불꽃이 일었을 뿐, 파괴는 의외로 간단했다.
한국 정부가 보면 기절 초풍할 장면이었다. 사실 흡수가 아닌 에너지 응용쪽으로 눈을 돌린다면 활용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테지만 가차없이 핵을 파괴해 버렸으니 말이다.
칼라곤이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을 깨달은 대원들은 섬에 털썩 주저 앉아 멍한 표정으로 바다 너머를 응시했다.
공방 탈환작전에 걸린 레이드 시간은 기껏해야 2~30분 남짓,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만큼 긴장했으며 목숨을 걸고 싸운 전투였다.
"와, 진짜 괴물이네."
10레벨에 등극하며 자신감이 넘쳤던 종현이지만 상현의 공격력에는 정말 눈물을 줄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세계 1인자였던 것이다.
대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이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상현 역시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대원들을 보호하고 있던 아이리가 날아와 상현의 몸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어넣었다.
"끼룩."
"고마워."
다른 때 같았으면 보석을 줬을테지만 지금은 수중에 가진 보석이 없었다.
아이리의 힘을 받아 다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 상현은 곧바로 수연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오른 뒤 섬에 그녀를 내려주었다.
"뭐야? 이제는 하늘도 날아?"
그가 하늘을 난다는 것을 몰랐던 종현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노력하면 선배도 할 수 있어요."
"벽에 똥칠하기 전에는 말이지?"
별 거 아니라는듯 말하는 상현을 보며 종현은 기대도 안한다는 표정이었다.
대원들이 쉬고 있는 사이 헤파이토스를 데리러 갔던 갈리토스가 그녀를 배에 태우고 섬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빨리 일을 해결해줄 줄은 몰랐구나.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공방으로 가자.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칼라곤 때문에 수리를 해야할 것으로 생각했던 공방 내부는 의외로 멀쩡했다. 용암이 펄펄 끓는 화산 옆에 세워진 공방이라 설계가 아주 잘 되있다고 했다.
"가슴이 벅차구나."
자신의 공방에 돌아온 헤파이토스는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자신의 망치와 집게를 만지작 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주변을 구경하던 상현을 불렀다.
"신성을 가리는 천을 가지고 싶다고 했지?"
"네."
"잠시만 기다려라."
수많은 상자들이 저 높은 곳까지 쌓여있는 상자벽을 달그락거리던 헤파이토스는 아! 소리를 내며 상자더미에 파묻혔다.
"괜찮으십니까?"
상현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도 여신인데 상자에 깔렸다고 죽진 않을테니 말이다. 그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툴툴 거리며 허벅지만한 검은 나무 상자를 들고나왔다.
"열어보거라."
상현이 눈을 깜빡이며 상자를 열자 그곳엔 아주 고와보이는 검은 천이 잘 접혀 있었다.
"설마 신성을 가리는 천입니까?"
전에 라그나로크에서 입던 것과 비슷해보여 상현은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그녀가 이런 종류의 천을 미리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부터 약 백 년 전쯤에 에오스가 부탁을 했다. 신성을 가리는 천을 준비해 달라더군. 이유는 몰랐지만 그녀가 좋은 술을 가져왔기에 나는 해주겠다고 했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모종의 예언을 받았던게 아닐까 싶네."
새벽의 여신 에오스, 본래 예언의 포지션을 가진 여신도 아닌 그녀가 왜, 무슨 이유에서 헤파이토스에게 천을 부탁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혹은 우연일 가능성도 있지. 그런데 에오스는 일단 내게 천을 가지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던 걸 생각하면 아무리 봐도 뭔가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아무튼 잘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천을 만드는데 3년 걸렸어. 보통 일주일이면 만들고도 남는데 무슨 짓을 해도 찢어지지 않고 신성이 한줄기도 안보이게 해달라고 해서 공을 좀 들였지."
3년이면 긴 시간이었다. 상현은 고맙다며 천을 받았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 에딕손을 찾았다. 에딕손은 바닷바람이 쐬고 싶다며 해변가를 거니는 중이었다.
"에딕손 씨. 이걸 둘러보시겠습니까."
천을 둘러준 상현은 그에게 신성력을 끌어올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마 천에 하자라도 있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괜히 천만 믿고 신성을 썼다가 여신들을 죽여야하는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이렇게 말인가?"
"지금 신성을 끌어올리신 거 맞습니까?"
"물론이야."
천은 완벽했다. 천을 두르고 있는 에딕손은 그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맙다며 인사를 건넨 상현은 다시 천을 돌려받았다.
다시 공방으로 향했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누구? 에오스? 없었는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헤파이토스 씨도 모르겠군요."
"당연히 모르지. 우리처럼 갇혀있거나 재수 없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무너진 상자를 정리한 헤파이토스는 손에 붙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좋아. 이제 조금 숨돌릴 틈도 생겼으니 이야기나 좀 할까. 너는 반신 치고는 너무 강해. 누구 핏줄이야?"
그녀가 상현에게 관심이 있었더라면 좀 더 일찍 물었을 질문이지만 애초에 그리스 신화에 널리고 널린게 반신이었으니 그녀는 그의 태생을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라곤을 죽이고 공방을 되찾은 이 시점에서는 궁금할 만도 했다. 자신의 무기를 빌렸다지만 검은 용을 죽인 것이다.
갈리토스의 말을 들어보면 상현이 엄청난 공격을 뿜어내 용의 머리를 터트렸다고 했다.
어지간한 반신이라면 해내지 못할 위업이었다. 칼라곤을 죽이는 것은 케로베로스 머리를 조르거나 미노타우로스 목을 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급의 일이었다.
"저의 어머니는 밤의 여신 아이라발디아입니다."
"역시 모르는 신이네."
사실 아이라발디아 정도면 여러 차원에 명성이 자자한 신이었으나 지구, 상현이 떨어진 이곳은 다른 차원과 교류가 거의 없는 외딴 곳이었다.
차원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신으로서 어느정도 완숙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지구의 신들 중에 차원을 넘은 자가 제우스 부부밖에 없다고 했다.
그것은 지구 신들의 파워가 다른 차원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그 갑옷, 역시 남자가 입기엔 너무 작고 볼품없구나."
자신이 입을 요량으로 만들었기에 가슴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고 갑옷의 크기도 작았다. 투구만 씌워놓으면 그 누구라도 상현을 여자로 생각할 터였다.
"새로 만들어주마."
"아쉽네요."
무구를 벗으며 상현이 말했다. 올드원과 헤파이토스의 갑옷은 비록 모양새는 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 성능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만한 장비를 만드는데 들어간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마신이 깨어나기 전까지 시간을 맞출 수 없을듯 했다.
올드원을 만들 때까지 거의 백 년이 걸렸다지 않은가.
"수십 년씩 걸릴 걸 생각하면 이 정도의 무구를 당장 만들어내는 것은 무리겠죠."
"그게 무슨 소리냐."
상현의 말을 들으며 헤파이토스는 가볍게 웃었다.
"따라와라."
그녀가 상현을 데리고 간 곳은 공방 끝편의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였다. 단추를 누르는 폼새가 제법 현대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던 상현은 지하 2층의 문이 열리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작업로에 온 것을 환영한다."
헤파이토스가 두 팔을 벌리며 자랑하는 작업로, 난간 아래로 펼쳐진 긴 작업 벨트에는 만들다 만 무기들이 수백, 아니 수천 개 이상 쌓여 있었고 방어구 까지 합하면 수만 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중앙의 화염모루를 중심으로 이동중인 컨베이어 벨트는 마치 현대식 제품생산 공장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들도 발전하는데 우리 신들이라고 망치만 달랑 들고 작업하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상현의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읽은듯 헤파이토스가 말했다.
"올드원을 만드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수백년 전부터 다른 무구들을 이곳에서 제조하고 있었다. 하나만 몇십 년 동안 만드는 것은 효율이 너무 나쁘거든."
그녀는 아주 쉬운 기초 작업은 전부 황금 병사에게 맡겼고 체력이 필요한 일은 갈리토스와 분담했으며 마지막 조율 작업만을 맡아 무구 생산과정의 효율을 극대화시켰다.
"지하 1층은 뭐하는 공간입니까?"
이곳이 지하 2층이었으니 1층의 용도도 궁금했다.
"거긴 무기고지. 완성품들을 전부 거기 보관해뒀어."
"대단하네요."
"그렇지?"
상현이 작업공정을 보며 감탄하자 헤파이토스는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드원 급의 장비를 맞추려면 몇 년은 걸릴 거야. 오래 전부터 만들어둔 것들이 있는데 그건 세부 작업도 내가 손대야 하는게 많거든."
몇 년이라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운이 좋으면 마신과의 전쟁 전에 장비를 맞출 수 있을듯 했다.
장비 걱정을 완벽하게 해결했으니 남은 것은 전쟁에 대항할 인원을 구성하고 힘을 키우는 일 뿐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잘 부탁해."
다시 한 번 두 신이 손을 맞잡으며 악수했다.
"근데 너 나랑 진짜 안 자볼래?"
"네. 사양하겠습니다."
"쳇."
아주 단호한 반신이었다.
공방도 탈환하고 신성을 가리는 천까지 얻었으니 이제 다시 일행을 이끌 차례였다. 이번 전투에서 죽인 칼라곤의 경우 마신의 부하로 당연히 마신들보다는 격이 낮았다.
그런 칼라곤을 잡을 때조차 일행은 헤파이토스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전방을 담당해줄 황금 병사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
미쏠로지 대원들로만 시간을 끌어야 했다면 분명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칼라곤의 마법이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 더 올라가자.'
그의 공격대가 인간계 최강의 팀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상현의 목표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신들을 상대할 실력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다시 던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헤파이토스 : 고추 내놔!
환상현 : 이건 제껍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상현이 헤파이토스랑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고 하는건 그녀가 처녀가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야 나중에 나올테지만요!
사실 갈리토스는 사람도 아니니 3d 자위기구 취급 아닙니까?
갈리토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