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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레전드-106화 (106/123)

< -- 106 회: 꿈 -- >

삐빅-

반투명한 녹색 스크린을 매만지며 청년은 세부사항을 확인했다.

[크로노마스의 암흑 대신전]

소유자 - 아이라발디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신전의 이름과 지명이었다. 크로노마스라는 것은 이 대신전이 세워진 위치였다.

이름은 암흑 대신전, 왠지 마신들이 기거할 것 같은 이름이지만 소유자는 명백한 천신, 그 이름도 드높은 밤의 여신 아이라발디아다.

'방문객 수 0명.'

그러나 그 아래 숫자를 확인한 청년은 오늘도 아무 변화는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시스템창을 닫았다.

방문객 수가 0명이라는 것은 그가 자고 있는 동안 다녀간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물론 신전의 방문객이 없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다. 신전은 언제나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언제나 식량 창고를 가득 채우고 항상 새 물건을 들였다.

-하이트럼프는 우주 제일의 물류 배송회사입니다!

창고의 문 안쪽을 확인하면 그런 문구가 적힌 전단지가 붙어있다. 전화만 하고 값을 치르면 뭐든 배달해준다는, 그런 일을 하는 회사다.

참고로 청년은 항상 어머니의 이름을 대며 주문을 했는데 회사내 고객등급이 자그마치 VVVVVIP에 달했다.

그냥 VIP가 아니다. V가 다섯 개나 된다. 기존 VIP만 해도 100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물건을 시켜야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등급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매일 같이 신전의 방문객 숫자를 확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 자신이 자는 사이에 신전에 찾아와 신이 행해야 할 업무를 보려고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현재 청년은 신전의 대리인이었다. 어머니인 여신은 거의 하루종일 잠을 자는게 일과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00년, 그 뒤로 쭉 이 상태였다. 한 번 여신은 죽을 때까지 여신이라 형식상으로 신전을 열어두곤 있었지만 찾아오는 방문객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라발디아는 은퇴한 여신이었다. 이미 젊고 유능한 여신이 그 자리를 대신에 밤을 관리한다고 했으니 굳이 이런 곳까지 찾아와서 일을 볼 사람이 있긴 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신전 잡일을 하는 것은 그에게 맡겨진 유일한 일이기에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매일 같이 방문객을 살피고 누군가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맞이한다.

그것이 어머니가 그에게 내린 유일한 일과거리였다.

나머진 자유, 검술을 연마하든 책을 읽던 마음대로였다.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가자 병사들이 부지런히 신전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참고로 크로노마스의 암흑 대신전은 마당과 외곽 울타리를 합쳐 그 크기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신전을 왜 이렇게 무식하게 유지하는지 의문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전성기의 여신이 얼마나 위대한 신이었는가를 짐작케 해주는 단편이기도 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웨일님."

검은 로브를 걸치고 빗자루질을 하던 병사들이 그를 보자 손을 올리며 경례한다.

"수고."

병사들은 전부 기계 인간, 신전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어머니와 자신 뿐이었다.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웨일은 차고로 향했다.

교통 체증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도로를 달리며 그는 창문에 팔을 걸치고 여유롭게 차를 몰았다.

요즘 몰두하는 것은 검술도 아니고 체력훈련도 아닌 낚시였다.

1년 전에 신전 동편에 커다란 호수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곳까지 가서 낚시를 하는 것이 요즘 청년의 낙이었다.

"오늘은 어떤 놈을 잡아볼까."

흥얼거리며 나루터에 도착한 웨일은 트렁크에서 의자를 꺼내 설치한 뒤 낚시대를 흔들었다. 전후로 반동을 주며 탓! 하고 튕기자 줄이 빠르게 풀려나가며 수백미터를 날았다.

웨일은 방안에 있어서 보지 못했지만 호수가 만들어진 날에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이곳에 방문해 각종 생명체들을 호수에 풀었다고 했다.

얼마 전엔 몸길이 100미터 짜리 수룡도 낚아올렸으니 정말 엄청난 것들이 호수 아래서 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여기 있었구나."

기척도 없이 사락 거리며 다가온 것은 여신이었다. 오감을 극한으로 수련하고 모든 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그가 여신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여신이 방금 전까지 이곳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웨일처럼 차를 몰아 이곳에 도착한 게 아니라 공간 전이의 술을 이용해 신전에서 호수까지 한걸음에 도약한 것이다.

"간만에 일어나셨네요."

"응. 그러니까 엄마한테 뽀뽀."

"저도 다 컸는걸요."

웨일이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러건 말건 여신은 아들의 볼에 얼굴을 부비더니 결국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웨일의 볼이 붉어졌다.

"아직도 저 차를 끌고 다니는구나."

아이라발디아가 호수 입구에 세워진 은색 차량을 보며 말했다.

웨일 역시 여신처럼 신전 어디든지 공간전이를 하며 다닐 수 있었다. 굳히 뻥뚫린 도로를 차를 몰고 다니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운전을 하며 낚시를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인 베일이 가르쳐줬기 때문이었다.

라그나로드 베일, 이미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는 삼류 용사였다. 여신과 결혼하고 나서도 그의 힘은 좀처럼 늘지 않아 결국 신위에 이르지 못하고 사망했다.

당연히 공간 전이의 술법같은 건 꿈도 못꿀 실력이었다. 대신전에 남아있는 모든 인간의 흔적은 대부분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호수가 있었다면 같이 낚시도 했을 텐데요."

웨일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여신은 베일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녀가 죽은 남편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은 말년에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뿐이었다.

웨일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좋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마지막만큼은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인간답게 죽고 싶소.'

보통 인간은 길어야 200년이면 죽는다. 그러나 베일은 여신과 결혼해 힘을 받아 500년을 살았다.

그러나 사실 500년은 신의 입장에서 볼 때 짧은 시간이었다. 여신은 그의 생명을 더 늘리기 위해 약을 구해왔지만 베일은 거절했다.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서는 어떠한 수단도 거부한 채 그렇게 죽었다.

이렇게는 못보낸다며 영혼으로라도 되살리겠다며 울고 불고 난리친 여신을 말린 것도 웨일이었다.

당시엔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도통 이게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구나. 멍하니 물만 쳐다보고 있잖니?"

여신이 말했다.

"기다리는 재미지요."

"그런가."

별 의미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여신은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다녀올 곳이 있단다. 선물도 가져올 거야."

"이번엔 또 어떤 먹거리일려나요."

그녀가 주로 사다주는 선물은 지역 특산품 같은 것들이었다. 100년에 한 번 밖에 안피는 붉은 열매로 데코레이션한 크림파이라던지, 드래곤 통구이 햄버거 같은 것들 말이다.

"비밀이야. 며칠 걸릴 텐데 말 안해도 알지?"

"예. 문 잘 닫아놓고 있을게요."

대신전에 사는 웨일에게는 한 가지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었다. 방문객은 환영하되 그것이 신이라면 모습을 숨긴다.

이것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진 절대 법칙이었다. 때문에 웨일은 단 한 번도 다른 신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말이다.

"집 잘 보고 있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여신은 공간 전이를 하며 하늘로 올라갔다. 저 높은 하늘 위에, 별처럼 높아 보이지도 않는 공간에 그녀의 전용 함선이 있었다.

대우주 시대인지라 신들도 전함 한 대 씩은 끌고 다니는 세상이었다. 사실 그녀의 네임밸류를 생각한다면 전함 한 척은 너무 약소한 규모였지만 그녀는 은퇴하면서 가지고 있던 함선들을 전부 팔아치웠다고 했다.

전쟁은 신물이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방문객은 여전히 0명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여신이 돌아왔다.

"아들! 전쟁이 날거래!"

"설마 선물이라는게 전쟁 소식은 아니죠?"

웨일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한 여신은 짜잔! 소리를 내며 검을 꺼냈다. 백색 검신에 황금의 언어가 아름답게 새겨진 명검이었다.

"와."

"멋지지?"

"이번엔 먹을게 아니네요?"

검을 받아들며 웨일은 가슴벅참을 느꼈다. 이미 집에 있는 검만 해도 수백 자루는 됐는데 지금 손에 들린 것은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검을 상대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단연 이 검이리라 웨일은 생각했다.

"아리스라고 해."

"예쁜 이름이네요."

『고맙습니다.』

"어라?"

웨일이 놀라자 여신은 재밌다는듯 박수를 쳤다. 그가 놀란 이유는 검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검신족의 후예란다."

여신이 말하자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검의 형상이 녹아내리더니 가루로 변했고 그 가루는 바람을 타고 날아 여신의 옆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루가 다시 새로운 형상을 갖췄을 때 웨일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금빛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아리스라고 합니다. 모시게 되서 영광입니다. 라그나로드 웨일님."

"아, 안녕."

아들이 말을 더듬는 것을 오랜만에 보자 여신은 매우 흡족해했다. 원하는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검신족은 평생을 검으로 사는 신족이었는데 일부 뛰어난 이들은 이렇게 모습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달고 살았던 웨일 때문에 여신은 단 한 번도 아들을 다른 신들에게 소개시키지 않았다.

웨일이 태어난지 천 년, 다른 신들 같았으면 벌써 진즉 짝을 찾았을 나이였다.

'아무리 저주가 걸려있다고 해도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순 없지.'

그렇게 생각한 여신은 아들의 짝이 될 여성을 찾고 또 찾았다. 아들 몰래 준비한지 벌써 300년이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300년 간 일에 몰두하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그녀는 묵묵히 배필감을 찾아 전 우주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전 우주에서 가장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검신족에서 최고의 검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고의 핏줄을 물려받았는데 심지어 여성체라고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주변엔 많은 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꺼져.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간다."

"이, 이럴 순 없어. 아무리 네가 아이라발디아라고 해도...!"

"뒈지게 맞고 갈래?"

"씨, 씨발!"

검신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검으로 살고 검으로 죽는 종족이다. 때문에 주인을 매우 가려받기로 유명했는데 대부분 신들이 그 자리를 맡고 있었다.

아리스는 이미 태중에서부터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북쪽 은하계의 왕이라는 칼데라의 손자에게 가기로 정해져 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라발디아가 절정의 무력 깡패라는 것은 이미 신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복수할 거야!"

"복수한다는 놈 치고 다시오는 놈 한 명도 없더라."

망신이라도 당할까 싶어 황급히 도망가는 칼데라의 등을 향해 메롱을 날려준 여신은 그대로 아리스를 받아 신전으로 돌아왔다.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됐어."

"예?"

신들도 빨리 자라긴 했지만 일주일만에 저렇게 크진 않았다.

"웨일, 신성을 개방하렴."

"하지만...아리스는 신급 신성인데요?"

여신에게 신성을 보이면 반드시 죽이라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던 웨일은 그녀 앞에서 신성을 드러내기가 꺼려졌다.

"괜찮아."

여신은 이 황금의 검을 웨일의 유일한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리스는 평생 웨일을 지키며 그의 검으로 살아갈 운명이 된 것이다.

여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웨일은 신성을 차단하는 천을 푸르고 천천히 금빛 신성을 끌어올렸다.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란다. 다른 여성 신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했거든."

여신이 소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소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에서 가장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종족조차도 흔들 정도로 웨일의 신성은 아름다웠다.

만약 그녀가 강철보다도 단단한 마음을 가진 종족이 아니었으면 저주의 영향을 받고도 남았으리라.

그렇게 되면 웨일의 곁을 스치는 모든 여신들을 죽이고 다니는 대마검이 한 자루 탄생했을테지만 다행히 아리스는 그 저주에 넘어가지 않았다.

최고 혈통을 타고난 검신족을 배필로 데려온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여신은 그들이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음을 곧장 알 수 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속이기 힘든 법이다.

특히나 바깥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웨일이나 방금 태어난 소녀라면 말이다.

"웨일. 이제부터는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아리스와 함께 호흡을 맞추렴."

"호흡을요?"

"이렇게 예뻐도 검이니까, 검으로 써달라는 얘기야."

웨일은 별을 담은 것처럼 투명한 소녀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다음날 부터 웨일은 그녀를 데리고 다시 검술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낚시는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씨, 씨발!"

이번 편 명대사입니다.

파트 제목이 꿈인 이유, 누군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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