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1 회: 붉은 군신의 검은 그림자 -- >
금칠을 해서 번쩍거리는 범선이 한 대도 아니고 무려 다섯 대나 됐다. 족히 수백 명이 타고도 남음직한 거대 범선을 어디서 끌어왔는지는 헤파이토스만이 아는 일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문제 없다고 합니다."
상현의 허가가 떨어지자 정예 부대원들은 발판을 놓고 장갑차 일부와 전차를 범선에 실었다. 나무로 만든 배라 가라앉을까 염려됐지만 범선은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군수물자와 병사들이 모두 승선하자 돛이 활짝 펼쳐지며 출항의 신호를 알렸다.
D.SWAT 병사 1천명과 황금 병사단 2천명이 승선한 대규모 토벌단이었다.
황금 병사들이 커다란 가죽 북을 울렸고 범선이 쾌진격을 시작했다.
"왜 이렇게 속도가 빠르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였는데 범선은 미친듯한 속도로 바다를 갈랐다. 본래 범선은 돛을 펼쳐 추진력을 얻는 배인지라 바람이 없으면 이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순풍이 강하게 불어도 불가능할 정도의 속력이었다.
"테티스한테 부탁했어."
다섯 대에 이르는 배를 바다의 여신이 힘껏 밀어주는 모양이었다.
"굳이 따라올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섬에 남아 계셔도 됐을텐데요."
얼굴에 닿는 작은 바닷물 알갱이를 맞으며 상현이 물었다.
"네가 오기 전에 미리 아테네에 정찰을 보냈어. 그런데 뭔가 걸리는게 있더라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헤파이토스는 그것까지 알려주진 않았다. 그저 가보면 알게 될 것이라 대답할 뿐이었다.
가끔 범선 위를 날아다니며 우는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무사히 해안가에 배를 댈 수 있었다.
본래 범선은 모래톱에 빠질 것을 염려해 조금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보트를 내려 다가가는게 정석이었지만 헤파이토스의 배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테티스의 힘을 받아 그대로 모래사장에 배를 올리자 병사들이 상륙을 시작했다.
갑판 위의 전차와 장갑차들은 에딕손이 들어 직접 내렸다.
"이동!"
장교들이 대원들을 지휘하는 가운데 미쏠로지 대원들은 장갑차에 올라타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전부 차량 안에서 수다를 떠는 것은 아니었다.
헤파이토스는 갑갑했는지 장갑차 지붕의 해치를 열고 고개를 내밀었고 상현이나 에딕손은 차량 지붕에 올라서서 주변을 감시했다.
바다에서는 테티스의 보호로 아무 위험도 없이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지만 이곳은 그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영역이었기에 스스로 몸을 보호해야 했다.
그나마 바다 근처라 그리 춥지 않다는게 위안이었다. 꽁꽁 얼어붙고 칼바람이 불어닥쳤다면 아무래도 체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시하며 대원들이 이동할 때 박현정이 신호를 보냈다.
"전방에 괴수가 다수 포진하고 있습니다."
9레벨 탐지 능력자가 된 그녀는 에딕손이나 상현보다도 더 멀리 있는 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지!"
상현이 손짓으로 정지 신호를 보내자 모든 병사들이 제자리에 우뚝 서며 주변을 경계했다.
바람에 노출돼 차갑기 그지없는 쇠뇌에 활을 장전했다. 언제든지 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며 달려드는 것은 검은 코뿔소 무리였다.
"사격 개시!"
만약 평화롭게 풀이나 뜯으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 같은 낌새였다면 절대로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을테지만 놈들은 지금 명백하게 적의를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쿼렐이 신명나게 튕겨나가자 코뿔소 무리 사이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마수계열 코뿔소들이었기에 불길을 뚫고 나오는 놈들도 몇 있었지만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한 번 더 화살을 먹이자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직 갈 길도 먼데 벌써부터 이런 놈들이 나오다니."
아테네 시가지까진 아직 거리가 상당히 남아있었다. 불에 타죽은 코뿔소 시체를 보며 군인들은 혀를 찼다.
놈들을 시작으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세상에 괴수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숫자의 마수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병사들의 뒤를 받쳐주는 미쏠로지의 전력이 너무 강력했고 헤파이토스가 시험삼아 만든 마총이 너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나머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마총은 마력석을 원통의 탄창에 장착하고 그 마력을 원동력삼아 에너지탄을 발사하는 원거리 무기였는데 그 효과가 굉장히 뛰어났다. 시제품이라 열 개 밖에 없는게 아쉬울 정도였다.
게다가 마수를 처리하면 무조건 나오는게 마력석인지라 촉이 상하지 않은 화살은 도로 뽑아서 써야되는 쇠뇌와 달리 사용이 간편했다.
"저건 양산 안되나요?"
상현이 물었다.
초 고위급 능력자라면 어떤 힘이든 실을 수 있는 냉병기가 더 편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상현처럼 검 한자루만으로 괴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술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가 신성을 특별히 부어야 되는 제품이라 말이지. 나 혼자서 대량 생산은 힘들어. 아마 인간들도 그동안 저런 종류의 시제품을 무수히 만들었을걸? 위력이 안나와서 개발을 중단했겠지만."
아쉬움을 뒤로 달래며 계속 전진한 그들은 해가 머리 위로 걸렸을 때 무너진 시가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폐허를 재건 중이었던 공사장비들이 흉물처럼 나뒹굴었으며 여기저기 급하게 떠난 흔적들이 엿보였다.
아테네 북쪽으로 도주할 루트가 차단됐으니 대부분의 인간이 남쪽으로 도피했을 것이다.
미처 공항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인원들은 차가운 바다를 보며 얼마나 절망했을 것인가. 앞은 망망대해, 뒤로는 괴수들이 드글거렸으니 그 절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이동하는데 저편에 쐐액하고 바람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붉은 창이 날아들었다.
파캉-
창을 쳐낸 에딕손이 기습을 알렸다. 하지만 창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하급 몬스터들 중에 도구를 사용하는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방금 전 쳐낸 창의 위력은 하급몬스터들의 것이라고 하기엔 좀 더 강했다.
"역시...."
장갑차 위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구경하고 있던 헤파이토스가 날아든 창을 보더니 장갑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게 여기서 나오는군."
"아는 물건입니까?"
그녀의 뒤를 쫓아 다가간 상현이 물었다.
"아레오스가 쓰는 창이다."
"아레오스가 뭡니까."
"군단, 아레스의 군단이지."
"아레스라면 전쟁의 신 아닙니까."
전신 아레스, 군신으로도 불리는 그는 제우스와 헤라의 핏줄로 혈통이 남다른 신이었다.
그는 유독 전쟁을 즐겼는데 그가 전장의 뛰어난 영웅들을 모아 만든 군단이 아레오스라고 했다.
"아레스가 봉인을 풀고 나온걸까요."
상현의 질문에 헤파이토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거 왠지 안좋은 느낌인데. 일단 이 창을 던진 놈이 근처에 있을테니 잡아다 족쳐보면 알겠군."
헤파이토스는 휘하의 황금병사들에게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즉시 서로에게 신호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로 붉은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신호를 본 상현과 헤파이토스가 부리나케 튀어나갔다. 다른 대원들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상현은 그들에게 진형을 유지할 것을 명령했다.
서둘러 달려간 그곳엔 다섯 명의 아레오스와 열 명의 황금 병사들이 창을 섞으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빠각-
지상에 내려서며 병사 한 명을 걷어찬 헤파이토스는 올드원을 꺼내 순식간에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도끼날로 벤 것이 아니라 넓직한 면으로 후려친 것이다.
"야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냐."
아레오스는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다 고대에서부터 활약한 영웅들, 헤파이토스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놈들이 이죽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아레스의 군단이라고 해도 그렇지 놈들은 인간이고 자신은 신이 아니던가. 제 놈들이 아레스인 것도 아닌데 저런 표정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너희들이 여기 있다는건 아레스가 근처에 있다는 소리인데 그는 어디있지?"
"알아서 생각해라."
아레오스의 반말에 이마에 힘줄이 돋은 헤파이토스는 그대로 병사들의 목을 쳤다. 최고의 걸작이라는 양날도끼 앞에 그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전부 몰살시키려던 그녀는 상현의 제지에 마지막 놈을 남겨두고 도끼를 멈췄다.
상현은 마지막 남은 아레오스의 머리를 열어 꿈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원하는 정보를 얼추 찾았을 때 녀석은 충격이 너무 심해 거품을 물고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레스가 머리는 길고 붉은 갑옷을 걸치고 있는 남자입니까? 나이는 많아 보였습니다."
"맞을 거야. 그는 몇 안되는 1대 신이니까."
헤파이토스가 상현의 말에 답했다.
"위치는 못 알아냈어?"
"근처에 기둥 여럿 달린 신전이 있습니까. 지붕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어딘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상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린 그녀는 아마도 파르테논 신전일 것이라 대답했다.
"여기서 멉니까?"
"아니, 그렇게 멀진 않아. 그쪽으로 이동하자고."
목적지가 확실히 정해지자 진군 속도가 크게 올랐다. 오히려 도심엔 몬스터가 보이질 않았다. 가끔씩 아레오스들이 튀어나와 창을 던지며 기습했는데 그 때 마다 헤파이토스는 그들의 사지를 절단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서운지 다들 그녀 곁에 다가가기를 기피할 정도였다.
척척척-
대열을 맞춰 움직이는 병사들, 붉은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아레오스 수천 명이 앞을 가로막고 있자 미쏠로지 대원들도 전부 차량에서 내려 전투준비를 했다.
"저놈들 뒤에 네가 말한 신전이 있어. 그런데 가려면 이 녀석들을 뚫고 가야겠는데? 척봐도 그냥 보내주지 않겠다는 기세잖아."
터져 나오는 함성, 아레오스들이 창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자 엄청난 기운이 대기를 흔들었다. 그 순간 상현과 헤파이토스를 비롯한 신성 보유자들의 눈썹이 흔들렸다.
아레오스의 뒤편에서 날아온 붉은 신성이 그들의 몸에 흘러들어가 전의를 고양시킨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의 뒤에 신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셈이었다. 폐허가 된 대지를 지키고 있는 신의 병사들, 누가 봐도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광경이었다.
"에딕손 씨, 여기 병력을 지휘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저 뒤편에 볼 일이 있습니다."
"문제 없습니다."
본래 상현에게 편하게 대답하던 에딕손이지만 이제는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
그 이유는 네팔에서 돌아온 이후 동참한 개인훈련의 영향이 컸다.
상현은 새로 얻은 모르페우스의 능력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에딕손의 도움을 받았는데 정신세계 속에서 에딕손은 상현의 진정한 힘을 몸소 체험한 후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본래 신들은 특별한 악감정이 없는 이상 자신보다 한참 더 높은 차원의 신을 만나면 공손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에딕손도 그런 절차를 밟는 것 뿐이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인원들 중 상현의 본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인원은 없었다.
"가죠."
상현은 대원들에게 뒤를 맡기고 헤파이토스의 손을 잡아 하늘을 날았다. 자신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하늘로 돌파할 줄은 몰랐던 아레오스들이 당황하며 하늘로 창을 던졌지만 그런 느린 공격은 상현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방어벽을 돌파해 신전으로 다가간 그들은 사뿐히 지면에 착지, 신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레스!"
헤파이토스는 신전 끝의 옥좌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황금의 술잔을 기울이며 여유롭게 일행을 맞이하는 남자, 붉은 신성을 태양처럼 뿜어내며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자, 그가 바로 군신 아레스였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군."
수염을 길게 드리운 그가 가볍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저번에 후기로 알려드린 제원 중 하나를 실을 수 있는건데 제가 잘못 적었었더라구요.
C-17 항공수송기의 최대 적재량이 7만 킬로입니다.
70톤을 실을 수 있는 거죠.
그나저나 아레스는 저기 왜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