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나이트 레전드-115화 (115/123)

< -- 115 회: 습격 -- >

상현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백두산으로 향했다. 과거 북한이 자원을 팔아넘기면서 중국에 절반 넘게 넘겨주긴 했지만 아직 나머지는 한국의 소유였다.

'의심 가는 사람은 딱히 없네.'

혹시라도 자신의 뒤를 쫓아 백두산행 버스를 같이 타는 사람들 중에 범인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봤지만 이른 아침, 버스 안에 탄 사람이라고는 자신 혼자 뿐이었다.

시간은 넉넉했다. 본래 더 늦게 출발해도 됐지만 그렇게 되면 어디에 가는지 말을 안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일어날 일을 대비해 상현에게 목적지를 묻는 것은 양성소 사람들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이슬에 촉촉히 젖어있는 산길을 상현은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상대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정오, 이제 겨우 9시, 시간은 넉넉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올라가는데 훨씬 많은 시간이 들지도 모르지만 상현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중국 측에서는 천지까지 도로를 시원하게도 뚫어놨는데 이쪽은 한참이나 산길을 타고 올라가야했다.

"날씨가 좋습니다."

앞에서 길을 먼저 오르고 있던 남성이 인사했다.

"예."

"천지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어서 올라오시지."

갑자기 태도가 바뀌며 중얼거린 남자의 말에 상현은 적잖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술을 다물었다.

이제보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세뇌에 걸린 것만 같았다.

'잡히기만 해봐라.'

사람들을 함부로 조종하는 녀석이니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며 상현은 잽싸게 산을 올랐다. 아침부터 산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는지 이미 정상엔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천지를 구경중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다.

워낙 구름이 많이 끼는 곳이라 일 년에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짜가 30일 정도밖에 안된다는데 오늘은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본 상현은 틈을 타서 재빨리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설치한 것인데 상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천지를 향해 뛰어 내려갔다. 비탈길을 뛰어내려가는 상현을 발견한 관계자들이 깜짝 놀라며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이미 상현은 저 멀리 사라져서 작은 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파바바밧-

수면 위를 거칠게 밟으며 전진하자 중앙에 고고히 바람을 맞고 서있는 존재가 눈에 띄었다.

'손을 쓸까.'

상현이 입고 있는 두터운 로브 아래로는 절정의 레이드 장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양성소에서만 사는지라 마지막으로 써본지도 제법 오래된 물건들이었지만 여전히 그 날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선제공격을 가해야 되는지 한참을 망설인 상현은 결국 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뇌 당하고 있는 일반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왔군."

아니나 다를까 호수에 떠있던 사람은 목소리만 빌린 세뇌당한 인간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우롱할 참이냐? 정체를 드러내라!"

상현이 일갈하자 남자가 웃었다.

"자네가 너무 무서워서 전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군. 당장이라도 날 찢어죽일듯이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말이야."

상현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나가기 싫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근처에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설마 싶었던 상현은 호흡을 들이키고 눈앞의 남자를 무시한 채 천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주변을 샅샅이 훑자 기묘한 공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물이 소용돌이치며 반구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만 봐도 마력이 집중된 공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상현은 즉시 검을 뽑아내며 묵직한 공격을 뿜어냈다. 어둠의 기운이 물살을 가르며 반구에 충돌하자 굉장한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의 물고기가 전부 도망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수면 위로 폭탄이라도 터진듯 거대한 물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진정하지.』

반구형태의 공간이 사라지자 나타난 것은 한 남자였다. 자신의 머리속에 직접 말을 건 남자를 보며 상현은 깜짝 놀랐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로 한참 더 많은 숫자의 존재들, 신으로 짐작되는 자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나보곤 혼자 오라고 하더니? 수작을 부렸구나.』

상현의 말에 검은 머리를 한 남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혼자 오라고 한 건 사실이지만 이쪽이 혼자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말이지. 멋대로 착각해놓고 남을 협잡꾼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남자가 씩 웃자 뒤에 서있던 신들이 움직이며 순식간에 상현을 둘러쌌다.

『싸우자는 거냐?』

『뭔가 오해가 있나본데, 나는 아까부터 자네와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다짜고짜 물 속으로 치고 들어와서 결계를 깬 건 자네라고.』

생각해보니 상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미 일대일 전투는 글른 상황인지라 상현은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상현이 얌전해지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우르, 장벽 다시 쳐."

물에서 말하는 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하우르라 불린 여성은 손을 휘두르더니 다시 결계를 생성했다.

동시에 물이 바깥으로 밀려나갔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생성됐다.

자리에 모여있는 신은 상현을 제외하고 총 다섯 명이었다. 상현을 이곳까지 부른 자가 가장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앙그라 마이뉴, 여기 있는 우리들은 마신들의 감시를 피해 몸을 숨긴 페르시아 신들이지."

"앙그라 마이뉴?"

앙그라 마이뉴라면 페르시아 신화에서 아후라 마즈다와 대립하는 악신이다. 아후라 마즈다가 성의 원리를 지탱하는 신이라면 그와 완전히 반대편에 서있는게 눈앞의 악신이었다.

"설마 마신 편에 붙은 건가?"

상현이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앙그라 마이뉴는 재수없는 소리 말라며 부정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름모를 신이여."

상현은 상대가 할 말에 집중했고 그 다음 이어진 말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였다.

"인간을 지키는 것을 포기해라."

오래 전,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머나먼 과거에 선과 악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그 전쟁의 승리자는 성신 아후라 마즈다, 악신은 죽음을 맞이했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신을 잊기 시작했고 성신은 자연스레 소멸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악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다시 태어났지."

앙그라 마이뉴는 사람들의 부정한 기운의 힘을 받아 태어난 2대신이었다.

"본래 나는 아후라 마즈다의 검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으면 놈도 같이 태어났어야 해.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세상에는 나밖에 안남아 있더군. 왜 그런지 이유를 아나?"

붉은 혀를 날름거린 그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악만 넘쳐서 그런 거야. 때문에 형체도 가지지 못한 나의 형제는 내 몸안에 그대로 잠겨있지. 우린 원래 한 몸이거든."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탄생비화를 들려주자고 부른 건 아닐 것 같은데...?"

"아까 말했지만 내가 자네를 부른건 설득을 하기 위해서지."

"인간을 지키지 말라는게 무슨 뜻이지?"

"척 봐도 자네는 지금 이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마신들과 대립하는 천신일테고, 뭐 지금 인간의 몸으로 하고 있는 일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인간들을 훈련시키고, 식량을 비축하고, 괴수를 토벌하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그런데 말이야. 그게 얼마나 갈 것 같다고 보나."

"무슨 말이지?"

"어차피 이번 시대의 인간은 멸망하는 것을 순리로 짊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야."

악신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인간은 마신 때문에 멸망하는게 아니라 그들 때문에 좀 더 일찍 멸망할 뿐이야. 내가 다시 부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괴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로 총칼을 겨누고 전쟁을 하며 공멸했을껄?"

"악신이라더니 생각하는 것도 악신답구나."

상현이 조롱하자 앙그라 마이뉴는 고지식한 사람 보듯 혀를 찼다.

"이봐. 지구의 1대신들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들 뒤져버렸는지 알아? 북구신들처럼 지들끼리 싸우다 죽은 경우는 얼마 안 돼. 그리스 놈들처럼 세력을 보존하고 있는 놈들도 얼마든지 있었단 말야."

"어째서지?"

"간단하지. 인간들 스스로 그걸 원했기 때문이야. 자신들 머리 위에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버티고 있는게 못 견디게 싫은 나머지 죽어달라고 저주를 퍼부었지. 뭐 모든 신들이 인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건 아니지만 결국 모든 신이 종말을 맞이한 원인의 중심엔 인간의 그런 사고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야. 지금 네가 열심히 마신들에게 대항해서 이 세계를 구한다 한들 얼마나 갈까. 천 년? 만 년? 그보다 훨씬 짧을지도 모르지."

"인간을 지키지 말아라. 그 소리를 하려고 날 여기까지 불렀다는 건가?"

"그래. 우린 인간의 멸망을 원한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 단계라고나 할까."

그의 말에 뒤에 서있던 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착각하고 있나 본데 인간은 멸망하지 않는다. 마신들의 속셈을 모르나 보군. 그들은 인간을 죽이고 싶은게 아니야."

"아니, 알고 있어. 최종적인 목표는 천신 한 명을 죽이는 거고, 인간을 착취해 식민지 행성 건설을 하려고 한다는군? 우리도 다 쓸만한 정보통을 가지고 있다고. 이미 마신들 휘하에 내 부하 한 명이 잠입해 있지."

"그렇다면 결국 네가 원하는 인류 멸망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을텐데."

"아니지. 네가 돕지 않는다면 마신이 이 세계를 완벽히 지배할테고 거기서 발생하는 공포와 절망감으로 강해진 내가 마신들 골통을 다 깨부술 예정이거든."

앙그라 마이뉴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마신들도 부의 감정을 먹고 사는 종족이다. 너랑 똑같이 강해질 텐데 무슨 수로 이기겠다는 거지?"

"뭘 모르나보군. 똥개도 제 집 앞마당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여기는 우리의 세계다. 이름도 모를 곳에서 건너온 놈들보다 내가 더 빨리 강해질 수 있어."

악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자신과 마신들이 있던 차원과 완벽하게 다른 차원, 힘을 발휘하는 것은 토속신이 유리한 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지금까지 말한 계획은 전부다 환상현, 너라는 존재를 찾아내기 전에 세웠던 계획이란 말이지."

"나를 찾아내기 전...?"

"그래. 생각해보니까 마신들은 너를 찾아왔고 네가 떠나면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마신들하고 힘들게 힘싸움을 하느니 너 한 명 다른 곳으로 보내주고 넌지시 정보를 흘리면 전부 해결이란 말이지."

앙그라 마이뉴의 계획은 이러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상현을 다른 차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마신들에게 정보를 흘리면 그들은 상현의 뒤를 쫓기 위해 다시 차원을 넘을 것이다.

마신이란 골칫덩이들을 내보내고 지구를 쓸어버리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마신들이 멍청한 신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준 덕분에 우리의 계획을 막을 신은 몇 명 없지. 그조차도 네가 풀어준 신들이 대부분이고. 지금 이대로라면 마신들만 빠져주면 우리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거든. 어때? 지금 네 상태로는 차원 문을 열기도 힘들지? 우리가 그 길을 열어주지. 자네는 안전하게 다시 여행을 떠나면 돼. 우린 정보를 몇 년쯤 뒤에 흘릴 거니까 뒤통수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에게도 좋고 네게도 좋은 일 아닌가?"

"헛소리 하지마라."

상현은 어이 없다는 듯 그의 말을 잘랐다.

"나를 믿어주는 많은 인간들이 있다. 그들을 놔두고 다른 세계로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쯧쯧."

그럴 줄 알았다는듯 앙그라 마이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네놈이 개고생을 해서 이 세계를 지켜도 결국 이 세계는 망한다니까? 서로 귀찮게 하지 말고 이쯤에서 너만 빠져주면 된단 말이야."

"그건 시간이 지나기 전엔 모를 일이지. 수작 부리지 말고 물러나라. 정 마신들하고 붙고 싶거든 내가 죽고 나서 하도록 해."

어차피 자신이 최종 전쟁에서 마신들에게 패배한다면 저들은 마신들과 싸울 운명이었다.

"안 돼."

상현의 말에 악신은 단호한 거부를 표현했다.

"여기 친구 한 명을 소개하지. 스펜타라는 친구야. 앞날을 잘 내다보는데 자네의 앞날을 내다봤다지 뭔가. 저번에 뭐라고 했지 스펜타?"

악신이 귀를 후비자 스펜타라는 신이 입을 열었다.

"빛나는 황금 검을 들고 내려온 인간이 마신을 때려 잡는다 라고 했지."

"원래 신들 앞날은 잘 못보는데 자네는 반쪽 신이라서 그런가봐. 지금은 어쨌든 인간이잖아? 나는 스펜타의 말을 믿는 편이고 즉, 이대로라면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네가 마신들을 이긴단 말이야! 그래선 곤란하지. 우린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가 망하길 바라고 있다고."

그렇게 말한 앙그라 마이뉴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흑색의 단검을 손에 쥐었다.

"네가 이대로 세계의 모든 신을 규합해 마신을 이기면 우리가 계획을 실행시키기 몹시 곤란해지거든."

그의 말이 끝나자 상현을 둘러싸고 있던 신들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

"죽이진 않겠어. 자네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릴테니 이대로 우리 무대에서 퇴장하라고."

낄낄거림과 동시에 앙그라 마이뉴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다른 신들 역시 출수를 시작했다. 상현은 긴장하며 신성을 끌어올렸다.

신들을 상대로 하는 첫 번째 일대 다수의 전투였다.

============================ 작품 후기 ============================

왠 이상한 놈들이 다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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