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6 회: 아리스 -- >
호수의 수면을 박차고 물속으로 부터 여섯 명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환상현, 쌍검에서 검은 탄환이 매섭게 쏟아져 나갔다.
눈 깜짝할 새 날아간 탄환이 상대의 몸을 갈랐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상현의 공격은 상대의 잔상을 갈랐을 뿐, 실체를 건드리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쐐애액-
바람가르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감도는 흑색의 단검이 상현의 목줄기를 노리고 들어왔다.
그 번개같은 공격에 상현은 허리를 돌려 매섭게 발을 뻗었다.
'검에만 의지하는 검사는 약점투성이다!'
상현은 검술을 배우며 귀가 따갑도록 초근접전의 중요성을 강조 받아왔다.
3차 각성에 이르러서는 검을 한 번만 휘둘러도 시야 밖의 적을 타격할 정도였으니 그 의미가 조금 퇴색한 감이 있었지만 훈련당시의 그 감은 여전히 또렷하게 살아있었다.
우직한 발차기가 복부를 타격하자 앙그라 마이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발차기를 아무렇게나 허용한 것을 보면 상대는 근접전에 대한 면역이 거의 없는듯 했지만 그것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천둥소리가 울리며 상현의 정신세계가 앙그라 마이뉴를 집어삼켰다.
'승부다!'
모르페우스가 건네준 능력의 약점, 그것은 능력을 펼쳤을 때 현실의 몸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점이었다.
아마 지금쯤 자신과 앙그라 마이뉴는 공격을 하다말고 기절해 수면 위로 떨어지고 있을 터였다.
곧바로 힘을 끌어올린 상현은 상대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준비동작 없이 한번에 2차 각성에 도달한 상현의 검에 순백의 어둠 신성이 쏠리며 공간을 찢었다.
시야에 닿는 모든 공간을 어둠으로 물들이며 한 점에 타격을 집중하자 앙그라 마이뉴는 머리만 남아 완벽하게 찢기고 말았다.
"커헉!"
'젠장!'
그러나 상현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여전히 앙그라 마이뉴의 의식이 달랑 거리는 목덜미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뻗어 결정타를 날리려는 순간 세계가 흔들리며 경계선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퍽-
등에 공격을 얻어맞고 물 속에 빠진 상현을 여신이 건져올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그 한 방의 공격으로 상현의 내부는 완전히 진탕되고 말았다.
마력회로는 불이붙은 것처럼 뜨거웠고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고 싶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뒷목 잡힌 고양이마냥 물에 젖어 늘어진 상현을 잡은 여신은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며 앙그라 마이뉴의 의견을 물었다.
"거참 무서운 놈이군."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는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앙그라 마이뉴는 목덜미 주변을 쓰다듬었다.
"마신들이 이 놈을 왜 그렇게 찾아 헤매는지 알만해. 인간의 몸으로도 이 정도면 전성기 때는 아주 볼만했겠어."
순수하게 감탄의 말을 하면서도 그는 상현의 배에 냅다 주먹을 꽂은 뒤 묵빛의 수갑을 채우며 신체를 구속했다.
몸을 둘러싸고 있던 마력의 기운이 모조리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상현은 절망했다.
변변찮은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힌 것이다.
"끌고 가지."
악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끄윽."
상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두운 동굴 안이었다. 냉한 기운이 올라오는 눅눅한 돌바닥, 상현은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아 일어났나."
제사용 의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앙그라 마이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문을 열자 틈새로 빛이 들어왔는데 주변을 살펴보니 이곳은 감옥인듯 싶었다.
"중요한 손님을 이렇게 푸대접해서 미안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거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자네를 다른 세계로 보내줄 차원을 열 수 있을 거야. 하루 정도만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한 앙그라 마이뉴는 문 밖으로 나가더니 복도에서 다른 신을 불렀다.
"어이, 하우르!"
"불렀어?"
"이 자를 잘 감시해. 나는 술법을 준비하겠다."
"응."
앙그라 마이뉴의 부름에 달려온 것은 아까도 본 적 있는 물을 다루던 여신이었다.
악신이 떠나자 여신은 감옥의 문을 열어두고 의자에 앉아 온 몸을 구속당해 쓰러져 있는 상현을 물끄러미 감시하기 시작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몇 시간 동안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결국 상현도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쥐죽은 듯이 바닥에 몸을 구부렸다.
'기다리자.'
한 번은 자리를 비울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일이 잘풀려 수갑을 끊어냈다고 해도 감시자가 보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 소용도 없지 않겠는가.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린다.
상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하우르라는 여신은 정말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결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법이 없었고 가끔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상현에게 시선을 고정시켜두고 있었다.
누가 보면 잘만든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벌써 감금된 지 족히 8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이대로 있으면 앙그라 마이뉴가 준비중인 차원 통로가 열릴테고 꼼짝없이 다른 세계로 이동될 판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차원을 조절하는 것이 역부족이었으니 다시 돌아올 수도 없을테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 남겨진 동료들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마음을 굳게 먹은 상현은 아주 조그맣게 손목근처에 신성을 발현시켜 파직- 하고 불꽃을 일으켰다.
'끊어졌나?'
여신이 고개를 돌린 틈을 타 회심의 반격을 한 셈인데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앙그라 마이뉴가 준비한 수갑은 단단하기 그지 없어서 이 정도 충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상 가상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의자에 앉아있던 여신이 상현의 머리 위로 다가와 쭈그려 앉은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그거 뭐야?"
"...."
들켰나 싶어 상현은 침묵을 지켰지만 한 번 말문이 트인 여신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듯 집요하게 질문했다.
"나 봤어. 당신이 힘 쓰는거, 근데 방금 그거 뭐였어?"
하우르는 상현의 손에 묶인 수갑을 만지작 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현의 턱을 들어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다시 한 번 해봐."
"뭘."
"신성 썼잖아. 다시 한 번 써보라구."
상현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가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보니 기절한 사이에 악신이 자신의 무장을 전부 해제시키면서 평소 속옷처럼 두르고 다녔던 검은 천도 가져가버린 것이다.
헤파이토스에게서 받은 신성을 가리는 천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방금 전 펼친 신성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노출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적 없어."
"말 안듣네."
귀찮다는 듯 여신은 상현의 얼굴에 자신의 코가 닿을 것처럼 밀착시킨 상태로 눈을 마주쳤다.
파지직-
"윽."
상대의 신성이 머릿속을 흔들고 들어오자 상현은 눈쌀을 찌푸렸다.
봉인의 도구가 전신에 주렁주렁 달린 상태라 힘을 쓸 수도 없는 상황, 상현은 상대의 신성이 자신의 몸 내부를 침투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
짧게 감탄한 하우르는 문가의 의자를 감옥 중앙으로 끌고와 바닥에 넘어져 있던 상현을 끌어올려 그 위에 앉혔다.
완전히 상반된 태도가 되서 의자에 앉은 상현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은 그녀는 상현의 손 위에 자신의 두 손을 포갰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 설마 자신의 저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상현은 착찹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혹시 다른 차원으로 가면 하고 싶은 일 있어?"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이것 좀 풀어주지?"
혹시나 해서 수갑을 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것은 안되는 모양이었다.
"미안. 그건 안 돼. 너는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될 거야."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다며 하우르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내가 당신과 함께 차원을 건너겠어."
"뭐?"
상현은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우리 둘이 숨어 살자. 앙그라 마이뉴한테는 내가 잘 말해볼게."
이 정도면 거의 골치가 아픈 수준이었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 상현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여신에게 감시당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앙그라 마이뉴의 차원 술법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너무 그런 우울한 표정 짓지 말라고, 어차피 인간은 신에 비하면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야."
이를 악물고 있는 상현의 무서운 표정을 보며 앙그라 마이뉴가 이죽거렸다.
"차원을 열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신들이 마법진에 힘을 보태며 공간을 열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력을 빨아들이며 입을 벌린 검은 틈새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커졌다.
신들의 마력을 빨아들인 틈새가 이윽고 상현을 던져 넣어도 될 정도로 커지자 앙그라 마이뉴는 하우르에게 상현을 데리고 오라며 손짓했다.
"저기 앙그라 마이뉴."
"왜."
어깨에 상현을 들쳐 메고 있던 여신이 입을 열었다.
"나 이 남자와 함께 차원을 건너갈래."
"그게 무슨 헛소리야?"
뜬금 없는 발언에 그의 눈썹이 좁혀졌다.
"나도 차원을 넘게 해줘."
"당연히 안 되지! 네가 없으면 이 땅에 생명을 새로 부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하우르는 물의 여신,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아주 중요한 힘중 하나였다.
"하우르, 장난치지 말고 어서 그 자를 차원에 던져."
"같이 갈 거야!"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하우르가 상현을 붙잡은 채로 머리 위의 틈새로 돌진하자 앙그라 마이뉴가 깜짝 놀라며 그녀의 몸을 신성으로 타격했다.
신성이 봉인당해 꼼짝없이 땅바닥으로 구른 상현은 통증을 호소했다.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5미터 높이에서 낙하했으니 아픈 것은 당연했다.
"미친 거냐!"
앙그라 마이뉴는 버럭 화를 내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하우르의 멱살을 잡더니 뺨을 후려쳤다.
그러는 사이 차원틈을 지탱하고 있던 다른 신들은 표정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빨리 던져!"
벌려진 차원틈을 유지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우르와 앙그라 마이뉴가 마법진에서 벗어난 상태, 다섯이서 유지하던 마법진을 셋이서 유지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보다못한 앙그라 마이뉴가 상현의 목덜미를 잡아 던지는 순간 하우르가 공중으로 날아 상현의 몸을 낚아 챘다.
그대로 틈새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본 앙그라 마이뉴의 눈이 뒤집혔다.
"개같은!"
흑색의 단검, 기괴한 문양이 붉은 빛을 발하더니 공간을 격하고 날아 여신의 등을 꿰뚫었다.
굉장한 충격이 가해지자 하우르는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현을 붙잡은 그녀의 두 팔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대로 여신이 땅으로 추락하자 상현도 땅으로 같이 떨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는 사이 마법진에 마력을 주입하던 신들은 신음하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신들이 무릎을 꿇었으니 차원의 틈새가 닫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일을 그르칠 위기에 처한 앙그라 마이뉴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차원의 틈새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열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적어도 1년 정도는 다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만큼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로 치룬 의식이었다.
"앙그라 마이뉴! 그냥 하우르도 보내버려!"
다른 신들이 소리치자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둥그런 물의 결계를 치고 몸을 보호하고 있는 하우르를 노려봤다.
"무슨 개같은 수작을 부린건진 모르겠지만 보내주마."
상현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던 앙그라마이뉴는 마력을 이용해 그들을 들어올렸고 냅다 차원의 틈새로 집어던졌다.
그 순간 함께 묶여있던 남녀의 표정은 희비가 엇갈렸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상현의 표정엔 절망이,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상현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하우르의 표정엔 희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빛이 틈새에서 뿜어졌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입구에 반쯤 몸을 걸친 상현 일행을 그대로 바깥으로 밀었고 그 강한 힘에 하우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와중에도 상현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는 상현의 몸을 꽉 붙잡고 있었다.
쿠당탕-
"으윽."
상현을 붙잡고 벽에 머리를 부딪친 하우르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반대로 상현은 그녀의 보호에 힘입어 여전히 멀쩡한 상태였는데 상황을 파악한 그의 눈이 한계치까지 커졌다.
방금 전, 자신을 밀어내고 마법진의 중앙으로 떨어진 거대한 기운, 그것은 고고한 빛을 뽐내며 진동하고 있는 단 하나의 검이었다.
주변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공간을 장악한 황금의 검에서 천천히 황금 실이 한 올 한 올 풀려 나오더니 일정한 형태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윽고 완벽한 사람의 형상이 되었고 백색의 갑옷을 걸친 여성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쥐고 일어섰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신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 꿈에라도 잊지 않을 자신의 유일한 검이었다.
"아리스!"
상현이 애타게 부르자 그녀의 고개가 빠르게 움직였고 투명한 그녀의 눈동자가 상현의 눈과 마주쳤다.
"도와줘!"
날 알아볼까?
신성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모습도 완전히 바뀐 상태, 설령 어머니가 보더라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바로 그 때 그녀의 발이 쿵- 하고 움직였다.
인식할 수 없는 속도, 한참 고생을 하며 강해진 자신의 시력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그 빠르기에 상현이 놀라는 순간, 상현을 붙잡고 있던 하우르의 양팔이 잘려나갔다.
날카로운 검격을 꽂아넣으며 하우르를 벽으로 처박은 그녀가 상현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붙잡았다.
"제가 왔습니다. 안심하세요."
짧은 그 말이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뒤를 부탁할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뜻을 나눌 수 있는 사이, 눈빛 만으로 상현의 뜻을 읽은 아리스가 주변을 한 번 훑고서 조용히, 그리고 무겁게 읊조렸다.
『신검 아리스, 웨일님의 명령을 받들어 적을 척결합니다.』
검신의 강림이었다.
============================ 작품 후기 ============================
든든한 지원군.
현재 아리스는 자신이 자신을 직접 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검과 육체가 둘 다 본체나 마찬가지거든요.
-p.s 척결: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 냄.
저분들 제명에 못죽을 거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