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7 회: 아리스 -- >
상현의 명령을 받은 그녀는 신속하게 장내를 정리했다.
순식간에 네 방위를 점하며 페르시아 신들의 목을 꿰뚫는 황금의 십자가가 빛을 발했다. 통증을 미처 자각할 시간도 주지 않는 빛살같은 공격이었다.
파캉!
"으윽!"
그 찰나의 순간에 그나마 반응이라도 한 것은 앙그라 마이뉴 뿐이었다. 목을 반쯤 잘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가운데 그는 켁켁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몸을 떨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검 한 자루, 그리고 솟아난 여성, 그것에 의해 자신들이 전멸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두 죽었다.
하우르는 맨 처음 벽에 날아갔을 때 숨이 멎었고 스펜타를 비롯한 다른 신들 역시 한 번의 공격에 신성의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앙그라 마이뉴의 생각 역시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이번엔 확실하게 목이 떨어져 나가더니 조각난 육체가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의심할 여지없는 명백한 죽음이었다.
파칵-
아리스는 검을 휘둘러 상현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봉인구들을 전부 파괴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기운이 약해져 잠시 바닥에 쭈그려 앉은 상현을 보며 아리스가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아, 괜찮아.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말한 상현은 몸의 마력을 회전시키며 주변에 깔린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상현이 회복에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아리스는 그의 주변에서 맑은 기운을 토해내 그의 충전을 도왔다.
단 1분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게 되자 상현이 입을 열었다.
"날 알아보겠어?"
"그럼요. 웨일님은 모습이 변해도 웨일님 그대로인 걸요."
그녀의 말에 조금 감동 받은 상현은 잠시 침묵한 뒤 천천히 일어섰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
자신의 잃어버린 장비를 찾아와야 했다.
다행히 장비는 꽁꽁 숨겨져 있지 않았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페르시아 신들이 본거지로 쓰고 있던 신전은 생각만큼 넓지 않았고 방의 갯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신성을 가리는 천을 찾아 다시 몸에 두른 상현은 이제서야 안심이 된다는듯 중앙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해줄래?"
"네."
마력을 잃고 빛이 사라진 마법진 위에서 둘은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상현의 손에 이끌려 차원틈으로 들어가게 된 그녀는 차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그와 멀어졌다.
상현이 힘을 쓸 수 있는 상황만 됐어도 놓치지 않았겠지만 이미 그는 정신을 잃어 힘이 흐르는데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그렇게 상현과 헤어져 그녀가 도착한 차원은 대자연의 숨결이 가득 차있는 울창한 숲 속, 대밀림의 한복판이었다.
팔 여럿 달린 짐승들이 끽끽거리며 나무 위를 오갈 뿐, 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력을 충전하고 다시 도약해야겠는걸....'
그 때 부터 아리스의 차원 여행이 시작됐다.
차원의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차원 밖으로 튕겨져 나간 그녀는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는 무수한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상현을 찾아나섰다.
그렇게 순식간에 15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차원을 유영하며 다른 세계로 돌입하기 직전 급작스레 열린 틈새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가막힌 우연이었다. 만일 앙그라 마이뉴 일당이 상현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다시 다른 차원으로 향했을 테니까 말이다.
"150년이나 지났다고?"
상현이 이 세계에서 눈을 뜬지는 이제 겨우 2년이 넘었을 뿐이다. 신이 오래 산다고 하지만 150년은 굉장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여러 차원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얼마나 찾아 헤맸을 것인가.
심지어 탐색이란 것은 그 세계에 발만 담근다고 해서 결과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고생했을 것을 떠올리니 상현은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웨일님은 결국 육체를 잃어버리신 건가요?"
그녀가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야."
사실 정신을 차려보니 환상현의 몸이었고 병원이었다. 아마도 큰 부상을 당했던 육체는 차원에서 찢긴 모양이었고 간신히 영혼만 빠져나와 이 몸으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동안 힘드셨겠어요."
"나보단 네가 더 힘들었겠지."
"이제 돌아가실 거죠?"
"돌아가...?"
"7차원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지만 돌아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7차원은 크로노마스의 대신전이 자리잡은 차원으로 흔히 7이란 숫자가 붙어 이름 불리곤 했다.
우주에서 가장 커다랗고 번성했으며 항상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차원이기도 했다.
"여기서 마무리지을 일이 있어."
그게 무엇이냐는 것처럼 아리스는 빤히 상현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세계로 나를 따라온 마신들을 전부 없애야 돼. 그 전엔 못 떠나."
"알겠습니다."
군말없이 따라주는 그녀를 보며 상현은 내심 미안했다. 말은 안해도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검신족이 전쟁에 참여했으니 결과가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상현 역시 아이라발디아가 걱정되긴 했지만 당시 전세는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상현이 마검신을 침몰직전까지 몰아간 덕분에 대승을 거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지구를 떠나면 재후를 비롯한 대원들, 그리고 세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는 몰래 숨어 힘을 회복하겠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두고 볼 단계는 오래 전에 지난 참이었다.
"나갈까."
상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두운 통로 끝의 밝은 빛으로 향했다. 신전에서의 성공적 탈출이었다.
상현이 말없이 자리를 비운지도 24시간이 지났다.
당연히 양성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처음 몇시간 동안은 일행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환상현이 누구인가.
세계 1위의 전투력을 가진 능력자임은 물론이고 신하고 싸워도 일대일로는 밀릴 리 없는 최강자였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상황은 돌변했다. 대원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대기실을 어슬렁거렸고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계속 전화를 확인했다.
"백두산이라고 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정석영이 상현의 소재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왔다.
전국의 CCTV카메라, 주요 거점지의 촬영 영상을 뒤져 그가 이동한 경로를 추적했더니 백두산이었다.
"대체 형이 백두산은 왜 간거죠?"
"당장 가보죠."
"이미 늦었습니다. 촬영된 시간이 20시간도 전이기 때문에 가봤자 환상현 씨는 없을 겁니다."
"예? 그럼 내려온 영상도 없어요?"
"예. 그게 문제입니다. 올라간 영상은 확인이 됐는데 다시 내려온 영상이 없습니다."
"그럼 아직 산에 있는거 아니에요?"
대원들의 말에 정석영은 고개를 저었다.
"천지에 사람 한 명이 뛰어들어갔다는 정보를 받고서 혹시나 해서 능력자들을 급파했습니다. 현재 천지에 사람은 없습니다. 물속을 전부 뒤져보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가능성은 낮습니다."
올라간 흔적은 있는데 내려온 흔적은 없다.
땅으로 꺼지기라고 했다는 건지 대원들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출동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검은 군복을 입은 특수 부대원이 대원들을 찾았다.
"일본에 8급 괴수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 출격이라니."
재후가 한숨을 쉬자 종현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였다.
"금방 해치우고 오자. 할 일은 해야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상현이 돌아온다면 가만히 대기실에 앉아있는 자신들을 보며 실망할 수도 있는 일, 종현은 일단 레이드를 뛰러 가는게 우선이라며 대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레이드를 안하고 있는다고 해서 상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대원들이 장비를 챙겨서 나가려는데 정석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이란이요?"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대원들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옆을 기웃거렸다.
"우리 대장이 이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는군요. 왠 정체모를 사람을 한 명 데리고."
"정체모를 사람요...?"
"긴급 비자를 발부 받았다고 하니까 정체모를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요."
"젠장 이거 궁금해서 움직이기가 싫구만."
종현은 투덜거리며 일행을 데리고 일본행 레이드 길에 올랐다. 이란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레이드가 더 빨리 끝날테니 떠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보통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예외였다.
"캬오오!"
도심을 습격한 거대한 공룡, 육중한 꼬리로 건물을 무너트리며 불을 뿜고 있는 괴수를 보며 대원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9급 괴수도 상대가 안되는데 8급 괴수 정도는 그들에게 전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에딕손과 스카디의 신성이 괴수를 압박하는 순간 공중에서 낙하한 괴수의 정수리로 종현의 창이 틀어박혔고 나머지 대원들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8급 괴수를 해체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분, 미쏠로지 팀이 올 때까지 목숨 걸고 도시를 지키던 일본의 특수 자위대는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대원들은 자신들을 괴물 보듯 하는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상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 역시 저들과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번개불에 콩 굽듯 부랴부랴 레이드를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은 초조한 심정으로 공항 로비로 나가 상현이 타고 올 비행기를 기다렸다.
정석영이 직접 붙잡아다 센터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는데도 그들은 공항에서 기다리기를 고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도 없이 하루도 넘게 사라졌던 것인지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오후 6시, 게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하자 일행들은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일어서서 통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 저기 있다!"
김재식이 소리치자 다들 우르르 달려나갔다. 평소같았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의 몸을 더듬으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상현의 옆에 조심스레 손을 잡고 걸어나오는 한 여성 때문이었다.
여신들이 다들 한 미모 하는지라 어지간한 미인에게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대원들이었지만 상현의 옆에 서 있는 아리스를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신성을 알아볼 수 있는 신성을 가졌기에 아리스의 아름다움을 일반인들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신이 보는 미의 중요 관점 중 하나가 신성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남성 대원들은 입만 벌리고 있었고 여성 대원들 중 일부는 착찹한 눈빛으로 상현 일행을 쳐다봤다.
워낙 연애와 관련해서는 목석같은 반응을 보이는 남자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다들 나와 계셨네요?"
사실 이들이 이렇게 몰려나와 있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던 상현은 멋적게 웃었다.
"설명 좀 해주시죠.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그리고 여기 이분은 대체 누구...시죠?"
제일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정석영이 일행을 대표해 물었다.
"적대 세력이 있어서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리스를 보며 상현은 일행에게 그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상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일행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쪽은 제 아내, 아리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수줍게 웃는 상현과 살포시 인사하는 아리스를 보며 일행은 머리에 쇠망치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그나마 남자 대원들은 양호한 편이었다. 한솔은 울기 직전이었고 수연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일단 양성소로 돌아가도록...할까요?"
상현은 돌처럼 굳어버린 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 작품 후기 ============================
아리스 : 밸붕검 등장!
상현이 볼 때 인류 멸망을 기도하는 페르시아 신 일당은 악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리스는 질투로 팔을 자른게 아니라 상현이 웨일임을 곧바로 알아보고 도와달라는 소리에 손을 쓴 겁니다.
댓글에 아리스 얀데레화를 시키려는 분이 계시길래...
그나저나 지구에서의 연애노선은 이제 깔끔하게 절단나게 생겼군요.
남은건 아라크네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