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8 회: 마신 -- >
양성소로 돌아온 일행은 재빨리 휴게실에 모여 자리에 앉았고 꼭 붙어있는 상현과 아리스를 보며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백두산은 왜 간거야?"
"이 분이 진짜 아내분 맞아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되요?"
질문하는 쪽은 대부분 남성대원들이었고 여성대원들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을 보이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누가 얼마만큼 상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대충 알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하나씩 물어봐주시겠어요?"
동시에 여러개 질문이 들어오자 상현은 하나씩 물어봐달라고 부탁했고 그들의 질문에 하나씩 답변했다.
자신이 전에 살던 세계에서 결혼한 인연이라는 것, 그리고 백두산으로 가서 페르시아 신들하고 있었던 충돌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정신을 잃고 붙잡힌 대목에 이르렀을 땐 대체 그런 위험한 곳을 왜 혼자 가는 거냐고 한소리 들어야했지만 다른 때보다 잔소리가 오래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옆에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아리스 때문이라 여겨졌다.
"그럼 이쪽 분도 신인가...?"
스카디가 묻자 상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리스는 검신족의 일원입니다."
"검신이래."
"검의 신 같은 거지?"
"근데 되게 이쁘시네요. 헤헤."
"이런걸 물어서 좀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리스 님의 실력은 얼마나 됩니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딕손이 묻자 다들 조용해졌다. 그들 역시 아리스가 보통 내기가 아닐 거란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현의 지원을 받아 신성을 느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피부로 상대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아리스는 말로 꼬집어 표현하기 힘든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에딕손의 질문을 받은 상현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듯 곧바로 답변해주었다.
"여기 있는 우리 대원들이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강하죠."
상현의 말에 다들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지나가다가 상현이 복귀한 것을 발견한 헤파이토스와 거나하게 술 한 잔 하고 집에가던 토르가 응접실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서 발끈했다.
"무슨 웃기는 소릴 하고 있어. 여기에 모인 신이 몇 명이고 내가 만든 무장이 몇 갠데...."
"다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냐! 이거 한 판 붙지 않고서는 두 발 뻗고 잘 수 없겠구나."
대원들은 상현이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었기에 다들 수긍하는 편이었지만 다른 신들은 예외였다.
본래 신이란 존재는 자존심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상현 같은 경우가 오히려 특이할 정도로 그들은 명예와 자존심에 목숨 거는 경우가 허다했다.
"날 봉인에서 풀어준 것은 고맙지만 이건 전사로서의 긍지 문제야!"
토르가 버럭 소리치자 그의 몸에서 엄청난 투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맨날 일과가 끝나면 펍에서 맥주나 들이키던 분이 어디에 이런 힘을 감춰 뒀던 것인지 싶을 정도였다.
저대로 놔두면 한 번 싸워주기 전까지 시끄럽게 굴게 뻔했기에 상현은 이마를 잠시 짚더니 아리스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때아닌 대련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토르가 이름 모를 여신이랑 한 판 붙는다는 소리에 양성소 내에 자리잡은 신들은 거의 다 모여들었고 토르의 밑에서 교육 받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위 능력자들이 체육관을 꽉 채웠다.
대체 누가 소문을 낸 건지 흡사 WEC전초전을 보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떻습니까 제 실력이?"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아온 건지 전혀 이유를 모르겠는걸요."
상현의 옆에서 싱긋 웃고 있는 미청년, 작은 날개가 달린 신발을 신고 있는 남성의 이름은 헤르메스, 2대 전령신으로 제우스의 말을 전하기도 하며 도둑, 여행자들을 수호했다고 알려진 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양성소 전체에 소문을 퍼트린 실력은 알아줄만 했지만 대체 이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부인이시라면서요? 이런 귀찮은 한 번 하고 끝내야지. 맨날 찾아와서 나하고도 싸워달라고 하면 곤란하잖아요."
"음. 일리가 있네요."
"정말 형수님이 여기 있는 사람들 합친 것보다 더 쎈게 맞아요?"
옆에 붙어있던 재후가 소근거렸다.
아리스에 비해 토르는 몸이 세 배는 더 커보였는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망치에 잘못 맞기라도 하면 그녀가 크게 다칠 것으로 염려됐다.
하지만 상현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마."
상현은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그저 경기를 지켜볼 뿐이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신사, 숙녀 여러분. 모처럼 저희 늙은 북구신이 싸우는 자리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사회 진행을 맡게 된 아름다운 겨울의 여신 스카디입니다."
진행을 맡은 스카디는 여전히 홍보에 열을 올렸다.
자칭 '아름다운 여신' 이란 타이틀도 붙었지만 관중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반대로 늙은 북구신으로 소개 받은 토르는 얼굴을 붉히고 무슨 소리냐며 버럭 화를 냈다.
"나 아직 팔팔해!"
"예. 경기를 속히 진행해야 하니 저기 계신 성내는 분은 잠시 무시하고 경기 룰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쪽지를 자신있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헤파이토스에게 부탁해 작성한 간단한 쪽지였다.
"에...일단 서로 목숨을 빼앗는 것은 곤란합니다. 상대가 항복을 선언하면 곧바로 공격을 멈춰주셔야 하구요. 더 이상 시합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심판이 직접 경기를 중단시킬 겁니다. 예. 심판 역시 저 아름다운 스카디가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침 없이 쪽지를 읽어가던 스카디의 말이 덜컥 하고 막혔다.
"그리고...."
뭔가 막힌듯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VIP석에 앉아있던 헤파이토스가 소리쳤다.
"그거 전통룰 맞아. 빨리 읽어!"
그녀의 질책에 스카디는 마지 못해 읽는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재, 재생할 수 없는 상처로 성기를 잘라낼 경우...아테네 은화 세 닢?"
거기까지 읽었을 때 헤파이토스가 배를 잡고 웃다가 의자 뒤로 넘어졌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스카디의 눈에 불똥이 튀더니 곧장 관중석으로 내달렸다.
"야!"
스카디가 뛰어 올라가는 것을 신호로 아리스와 토르의 대결도 시작됐다.
"젊은 여신이여, 솜씨를 보도록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리스가 손을 뻗자 그녀의 손에 밝은 빛이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아름다운 광채를 뽐내는 황금검이 쥐어졌다.
그 놀라운 광경에 신과 인간이 구분없이 감탄사를 보냈다.
'크게 다치게 하면 안 돼. 음, 그리고 기왕 하는거 조금만 화려하게 해주면 쉽게 수긍할 거야.'
상현이 했던 당부를 떠올리며 아리스는 토르를 향해 검을 겨누고 몸에서 노란 황금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대단하게 느껴지던지 신성을 알아볼 줄 모르는 일반 능력자들 조차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간다!"
천둥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토르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고 아리스의 검은 단 한 번 매끄럽게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 위력은 전혀 매끄럽지 못했는데 검에서 뿜어진 광풍에 휩쓸린 토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어?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무장해제 당해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의 보물인 망치가 박살이 난 것이다. 그것도 그냥 부러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루로 변해버린 정도였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세상의 좌절은 혼자 다 짊어진 표정으로 무릎꿇고 쓰러진 토르를 내버려두고 다른 신들이 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저런....'
상현은 무대 위로 오르는 신들을 보며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너무 부드럽게 대처했더니 다들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거의 열 명에 가까운 신이 나도 싸워보고 싶다며 올라오자 스카디는 순서를 지키라고 소리질렀고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조금 심하게 해도 괜찮아.'
아리스와 눈을 마주친 상현이 입모양으로 그녀에게 의사를 전달했고 곧이어 경쾌한 몽둥이 타작이 이어졌다.
"여전히 경기가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금장식이 번쩍거리는 호화로운 방, 길게 늘어선 테이블의 상석에 발을 올리고 앉아있는 남자와 그를 어렵게 쳐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흑색 정장을 입고 등을 기울인채 의자를 삐걱이는 남성을 어렵게 대하고 있는 남자는 바로 벡클레이였다.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계 영향력을 쥐고 있는 권력자, 그런 그가 포도알을 물고 흐느적거리는 남자에게 말조차 붙이기 힘들어 한다는 것은 굉장히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전에 말씀해주셨던 환상현이 언제쯤 처리될 지에 대해 다시 알려주신다면...."
"많이 컸군."
남자의 말에 벡클레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남자가 슬그머니 선글라스를 들어올리자 그 아래 감춰진 눈이 드러났는데 새빨간 동공이 세로로 쪼개져 있어 흡사 뱀과 같은 무서운 인상이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허리를 굽힌 채로 다시 올라올 줄 모르는 벡클레이를 보며 남성이 투덜거렸다.
"믿고 기다리라고."
미국의 강력한 권력자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남자의 이름은 아그니, 이그니스라고도 알려진 제법 유명한 불의 신이었다.
그는 이미 약 10년 전부터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미국이 아직 레이드 개념과 던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시절에 빠른 시장 장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아그니 덕분이었다.
그는 본래 인도의 신이었지만 이제는 인도를 대신해 미국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으면 나가보시지."
벡클레이에게 축객령을 내린 그는 다시 의자를 삐걱거리며 포도알을 물었고 벡클레이는 뒷걸음질 치며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아그니가 중얼거렸다.
"근데 왜 소식이 없지?"
벡클레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국의 일이 궁금해졌다. 사실 아그니는 앙그라 마이뉴와 줄이 닿아있는 신이었고 동시에 마신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셈이었는데 본심을 따지자면 앙그라 마이뉴의 편을 들어 마신을 몰아내려는 쪽이었다.
며칠 전쯤 환상현을 처리하겠다는 메시지를 받은 아그니는 알아서 하라며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끼고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친구가 소식이 끊긴 것이다.
"간만에 전화나 해볼까."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신호음이 한참 길게 이어지더니 음성메세지 안내멘트가 나오는 것을 보며 아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죽었나?"
진짜 죽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아그니는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신을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다른 마신들이 전투의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쉬고 있는 가운데 아직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는 녀석이 한 명 생각난 것이다.
놈은 던전을 관리하는 마신이었는데 요즘 들어 신들의 봉인이 파괴 되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들은 가진 힘은 강력했지만 공간의 틈새 사이에 숨어 있었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거의 깜깜무소식이었다.
때문에 소식통은 전적으로 마신의 밑에 들어온 신들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아레스가 뒤져버리는 바람에 정보를 조작하는 일이 더 쉬워졌다.
'일단 환상현이란 놈이 살아있는지 확인을 해봐야겠군.'
만약 환상현이 여전히 살아있다면 앙그라 마이뉴의 계획은 실패했다고 봐야했다. 이미 죽었을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낮은 가능성이긴 했지만 다른 이유로 그를 지구에 남겨뒀을 것 같진 않았고 행여나 계획이 바뀌었다면 자신에게 연락을 취했을 터, 아그니는 생각을 정리하며 마신에게 어떤 보고를 올려야 할 지를 고민했다.
============================ 작품 후기 ============================
이제 곧 마신 등장 타이밍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