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1 회: 마신 -- >
볼레드와 아그니의 출현은 한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한국이 아무리 괴수 대처능력이 강한 국가라고 해도 대규모 디멘션홀에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국가들이 대규모 디멘션홀을 처리하는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 비해 한국은 단 하루만에 정리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었다.
전세계의 마력핵은 한국의 것이나 다름없었고 모든 괴수산업이 한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부를 누렸고 매일같이 높은 수치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비단 한국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대부분의 국가가 괴수 출현 이후 더욱 부유한 삶을 누렸다.
마력핵과 마력석은 인류의 삶에 엄청난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도 많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이제 인류는 괴수가 없는 삶이 닥치는 것을 오히려 더 불안해 할 정도였다.
괴수를 자양분삼아 지구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안정을 찾자 인간은 그에 적응했고 만족해했다.
감춰진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한 채로.
"누가 죽었다고?"
무의 공간이 시끌벅적해졌다.
아무 것도 없던 그곳은 실체를 드러낸 마신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호화로운 도시로 변모했다.
저 멀리, 번영한 7차원에서 그들이 노니던 도시의 모습과도 쏙닮은 풍경이었다.
"볼레드요, 볼레드!"
마신들의 생명부석을 체크하던 이가나트가 소리질렀다.
생명부석이란 일종의 가짜 심장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본체의 생명이 끊어지면 진흙을 뭉쳐 만든 것 같은 생명부석 역시 반쪽으로 쪼개지곤 했다.
주로 긴 원정을 나가는 동료가 있으면 생명부석을 만들어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7차원 마신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차원을 넘어가지 않는 이상 우주 어디에서든 생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아주 간편했다.
"아- 혹시 던전을 관리하던 친구인가?"
"맞아요!"
"던전을 관리하는 도중엔 그리 위험한 일이 없을 텐데?"
"기껏해야 괴수 머리채 잡고 던전에 봉인을 설치하는 작업 아니었던가?"
마신들은 중급마신이 대체 왜 비명사했는지를 안주 삼아 히히덕 거리기 시작했다.
마검신을 따라 넘어온 마신들의 숫자는 총 32명, 그 중 상급 마신은 다섯, 중급마신이 스물, 나머지는 하급 마신이었다.
"겨우 중급마신 한 명의 죽음 때문에 우리들을 전부 깨웠다고?"
체구가 거대한 흑색의 괴물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인간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괴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무식한 생김새 때문이었다.
온몸엔 고릴라처럼 털이 수북했고 머리의 양옆엔 우람한 뿔이 달려있는 진짜 악마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으르렁거린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회복을 위한 수면이 덜 끝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지구에서 입은 부상은 이미 예전에 완치된 지 오래, 지금까지도 고생하며 치료하고 있는 상처들은 전부 대전쟁 당시 입은 것들이었다.
천신과 마신은 서로에게 상극이라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해도 이런 후유증을 피하기 어려웠다.
화를 내는 흑색 괴물을 향해 이가나트가 말했다.
"네로인 씨, 계급을 막론하고 마신이 한 명이라도 죽으면 엑자일님께서 보고를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가나트의 말에 네로인이라 불린 흑색 마신은 입을 다물었다. 보고를 올린다는 말은 그를 깨워야 한다는 소리였고 왕이 깨어나는데 자신들이 자고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치료에 들어간 시간이 얼마나 되지?"
"10년 조금 못되는 것 같군."
"지독한 새끼들."
여전히 욱신거리는 신체를 매만지며 마신들은 천신에 대한 분노를 태웠다.
"자, 그럼 다들 일어나셨으니 서둘러 신전으로 이동합시다. 보고를 올려야 하니까요."
환영의 도시, 심상으로 만들어진 이 가상 도시의 중앙에 그들이 말하는 대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신전은 흑색의 기둥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높이가 하늘에 닿을 듯 했고 위로 올라갈수록 기형적으로 커져 도시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만 년 동안 커진 거대 나무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신전의 최상층 부, 바닥에 붉은 마법진이 새겨진 그곳에서 마신들은 각자의 정해진 방위를 잡고 왕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자리를 잡은 그들은 서서히 마력을 뽑아내 바닥에 불어넣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붉게 타오르자 차갑고 냉랭한 공기가 일대에 흘러넘쳤다.
그 공기가 피부에 닿자 마신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왕이 곧 깨어난다는 신호였다.
마신의 긴 역사에 이름을 올리기 충분할 정도로 강한 자가 바로 자신들의 왕, 엑자일이었다.
"다들 모였나."
소리 소문 없이 비어있던 왕좌 앞에 나타난 엑자일이 무릎을 꿇고 있는 마신들을 훑었다.
상급 마신들은 부동자세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나머지 마신들은 그 뒤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고개를 들어라."
그의 명령에 마신들이 고갤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일부 여성 마신들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맞이했는지 참기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여성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남성에게는 경외의 존재였으니 말이다.
"보고를 올리기 위해 이렇게 모였습니다."
"한 명이 비는군."
이가나트의 말에 엑자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중급 던전을 관리하던 볼레드가 죽었습니다."
"생명부석은?"
"파괴됐습니다."
왕의 허락도 없이 차원을 벗어날 이유가 없으니 그는 이곳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우주처럼 방대한 공간에서도 신호를 보내는 것이 생명부석이다. 하물며 이런 코딱지만한 행성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다들 몸은 얼마나 회복됐지?"
"절반 이상은 회복한 것 같습니다."
이가나트가 입을 여는 것을 보며 엑자일이 천천히 왕좌에 앉았다. 회복 속도는 상처의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계급이 높을수록 회복이 빨랐다.
이가나트는 상급마신이었고 그가 절반 이상의 힘을 회복했다면 중급 이하 마신들은 아직 회복이 멀었다는 소리였다.
힘의 수치로만 따지면 우주에서 가장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7차원이 대전쟁을 자주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 번 전쟁을 치르고 나면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수백 년 까지도 회복을 위해 휴식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절반인가."
이가나트의 말을 들으며 엑자일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다름아닌 그였다.
상현과 일대일로 싸우며 결국 몸을 빼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욱씬-
당시 격전을 생각하니 왼팔이 욱씬거렸다. 완벽하게 잘려서 재생조차 불가능한 왼팔을 다시 만들어낸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이 행성에 멀쩡한 중급 마신을 죽일 정도의 신이 남아있다는 소리군."
볼레드가 중급 던전의 관리자로 채택된 이유, 그것은 32명의 일행중 유일하게 그가 멀쩡한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중급마신이 죽을 정도의 힘이 이 행성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숨어있던 토착신들의 짓으로 판단됩니다."
"그가 밖으로 나간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지속적으로 활동한 것은 볼레드 하나 뿐이었습니다."
"아케로!"
"예!"
이가나트의 말을 듣던 엑자일이 다른 마신의 이름을 부르자 뒤에 무릎꿇고 있던 중급 마신 하나가 번쩍 일어나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네가 볼레드의 뒤를 이어 던전을 관리한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인원들은 들어라. 우리는 오늘부로 수면을 중단하고 다시 활동에 나설 것이다.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신체를 완전히 깨워 전투에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홀에 쩌렁쩌렁한 마신들의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일주일 뒤에 전에 이야기했던 계획을 실행할 것이다."
엑자일이 말한 계획이란 별의 에너지를 추출하는 작업, 다시 말해 이 별을 마족의 새로운 거점 식민지로 삼는 계획이었다.
차원으로 장비를 넘겨받아 지구의 중심부까지 파이프를 연결해 행성에너지를 착취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성에너지란 흔히 생각하는 열에너지가 아니었다. 항성(태양같이 스스로 빛을 뿜는 별)도 아닌 지구에 어떤 에너지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 그곳에 숨겨진 자원이 있었다.
7차원 정도의 문명을 갖춘 신들이라면 지구라는 행성은 탐을 낼만한 물건임에는 틀림없었다.
막대한 에너지를 뽑아올려 개척을 완료하게 되면 이곳에서 많은 마신들이 새로 태어날 것이고 이 차원을 새롭게 지배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이전에 거쳐야할 과정이 인류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었다. 부정적인 기운과 하급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많은 인간은 그들에게 필요 없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나머지 대륙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대지진, 해일을 이용해 아예 바닷속으로 가라앉혀 버릴 요량이었다.
"알자이를 제외한 마신들은 자리로 돌아가라."
그의 명령에 마신들은 삽시간에 모습을 감췄고 홀에는 이름을 불린 여마신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이리로 와라. 오랜만에 맛을 보고 싶구나."
알자이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에게 다가갔다. 최상급 마신과 몸을 섞는 것은 여마신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강한 힘을 가진 상위의 마신들이 그 혜택을 누렸다.
알자이는 상급 마신 중에서는 격이 낮은 편이었기에 7차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결코 엑자일의 품에 안길 수 없었을 테지만 이곳에서 상급의 여마신은 그녀 하나 뿐이었다.
엑자일이 그녀의 가슴을 그러쥐자 달뜬 신음소리가 입술에서 베어나온다.
이윽고 질펀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교성이 홀을 가득채우기 시작했다.
'승리는 노력과 사랑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승리는 가장 끈기있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간다. 어떤 고난의 한가운데 있더라도 노력으로 정복해야 한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다.'
나폴레옹이 남긴 말이다.
한국의 미쏠로지 에리어, 다가올 최후 전쟁을 위해 세워진 이곳의 비밀 훈련장에서 노력과 사랑으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커플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규모 결계가 쳐진 방안, 바닥과 천장 동서남북의 네 벽면에 빼곡하게 천신의 언어를 새긴 이 기묘한 방의 중앙에 상현이 정좌 자세를 하고 앉아있었고 그 뒤에 아리스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인지 겉으로만 보면 알기 힘든 순간, 아리스가 황금의 검을 들어 전력으로 상현의 등을 찌르며 검을 관통시켰다.
"환상검, 개방."
그러나 놀랍게도 피는 쏟아지지 않았고 되려 푸르스름한 기운에 무언가 이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아라크네의 영혼, 상현의 몸에 잠들어있던 거미여신이었다.
검끝에 걸려 나온 거미여신은 아리스를 향해 엄청난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같은 하늘을 아래 두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지 원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땀을 흘리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상현은 그녀가 왜 이렇게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몸에 걸린 저주, 여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특이체질 때문이었다. 스카디를 보고도 증오의 빛을 뿜어올리던 아라크네는 페르시아 던전에서 아리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아예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아리스 역시 상현의 몸안에 그녀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자신에 대한 적의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상현이 신경쓰지 말라고 했기에 정말로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와 상현이 계획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아라크네가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다.
검을 이용해 그녀가 죽지 않도록 무사히 꺼낸 아리스는 이시스의 도움을 받아 만든 황금의 병에 그녀의 영혼을 봉인했다.
괴성을 지르는 아라크네를 넣고 단단히 뚜껑을 닫은 아리스가 상현의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무사히 끝냈습니다."
애틋한 표정으로 상현의 땀을 닦아주는 아리스를 보며 아라크네가 소리없는 눈물을 줄줄 흘린 것은 조금 불쌍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문제는 없겠군."
"예. 어떻게든 마신들을 저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숨 돌린 상현은 병을 들어올려 아라크네의 영혼과 눈을 마주쳤다.
아라크네는 말도, 소리도 낼 수 없었지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며 우는 것 같았다.
상현은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들어 병을 두 손으로 감쌌다.
처음엔 마신의 편을 든 녀석이라며 죽일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한몸에 같이 살다보니 미운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전쟁이 마무리 되면 육체를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잠시만 참아줘."
상현이 다독거리자 아라크네의 기세도 한풀 꺾이던 붉은 빛이 은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때, 한국과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지구의 구석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12시 7분 완전한 수정완료....
오늘 뭔가 바쁜 하루였네요. 이렇게 게을러 터진 작가라 죄송합니다;;
후라보노보노랑님 // 힘내세요! 2년 까짓거 금방 지나갑니다. 27일날 전에 이야기 끝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p.s 아리스랑 응응해서 애낳는거랑 최후 전쟁이랑 어떻게 연관이 되는거죠?? 제가 더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