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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웹 MK-8화 (8/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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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

“지금도 만나?”

“꼭 대답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사람.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무심코 허락한 일이 위험하게 돌아올 수도 있고.”

“무슨 말이예요?”

“영원히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약속해 놓고서 약속을 깰 수도 있다는 거지.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그 정도로 말을 하면 알아들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아는 애가 있는데. 남자 친구가 몸캠을 찍어 달라고 요구했나봐. 그래서 찍어줬는데 그걸 인터넷에 올린 거지. 나도 그걸 봤고. 내가 그걸 봤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본 거겠냐고.”

수영이 움찔하는 것 같아서 나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았다.

“남자들은 믿을 게 못 되거든.”

“그래도 남자들이 전부 다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수영은 자기가 만나는 남자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말했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만나는 남자는 그렇다고 말을 해 줄까 하면서 나는 수영을 바라보았다.

수영은 불안해 보였다.

“나도 자주 하지는 않는데. 말을 안 들어주면 싫어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냐고 하고요.”

수영이 말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게 어려운가?”

“그래도. 지금 만나는 사람이랑 헤어지고 나서 그 다음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어떡해요?”

아.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수영이 정도의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들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약간 놀랐다.

수영이 정도 되면 남자들을 고르고 선택해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아끼는 제자 누나라서 하는 말인데. 아무 남자나 함부로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좀 시들해지기는 했어요. 축제때 우리 동아리에서 주점을 하는데 그때 와 줄 거냐고 했더니 안 된대요.”

“왜?”

“그날 회사에서 워크숍을 간대요.”

나는 별다른 관심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냐고 했다.

그러다가 수영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깨달았다.

“왜?”

“혹시 축제기간에 뭐해요?”

“일하겠지. 하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 복학 준비도 해야 돼서 많이 바빠.”

“무슨 청춘이 그렇게 숨쉴 틈도 없이 일만 해요?”

“맨바닥에서 시작해야 되는 사람은 그래야 돼. 게다가 나는 병원비 때문에 빚도 많아서 더 열심히 해야 되고.”

“그럼 그 날 일당 줄 테니까 내 남자친구 역할 좀 해 주면 안 돼요? 친구들은 다 남자친구들이랑 같이 올 거거든요.”

“좋아. 나쁘지 않네.”

일당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축제 기간 동안 수영의 남자 친구 노릇을 해 주는 것도 아직 준영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금일봉 내에서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는 서비스 범위 내에 있었다.

“나는 시급이 좀 쎈데. 잘 생겼잖아.”

“헐!”

수영은 경악하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크게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돈은 지금 미리 드릴게요. 나중에 마음 바뀌면 안 되니까.”

수영이 말했다.

“됐어. 그냥 한 말이고 내가 내 제자 누나 위해서 그 정도 일도 못 해 주나? K대 교정이 예쁘다는 말은 자주 들었는데 가서 구경이나 하지 뭐.”

“그럼 있잖아요, 혹시 그 날요.”

“어?”

“오빠네 학교 과잠 입고 오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왜?”

“있어보이잖아요.”

나는 과잠바를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학교 학생들 눈에는 그게 참 근사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수영이 그런 부탁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못 들어줄 부탁도 아니라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친구들 남친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내가 휴학생이라는 거 알면 친구들이 무시하지 않으려나? 나는 상관없지만. 괜찮겠어?”

“아닌데요?”

수영이 말했다.

나는 얘가 나한테 과하게 기대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거리를 좀 두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축제때 남자친구 대신 와 달라는 거, 드레스 코드를 정해주는 거.

괜히 나에 대해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왠지 조금씩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미리 말하는데 나, 캐나다로 유학간 여자친구 있어.”

거짓말이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을 해버렸다.

“나도 오빠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요? 그냥 그날 남자친구가 바빠서 그런 것 뿐이지!”

수영은 삐진 듯 했지만 내가 그 애의 감정까지 챙겨줄 필요도 없고 나중에 괜히 엉겨붙게 만드는 것보다는 확실히 포지션을 인식시키는 게 편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알바로 일했던 회사에서 알게 된 대리님이었는데 일을 그만둔 후에는 형이라고 부르면서 가끔 연락을 했던 사이였다.

그 형은 회사에 자리가 다시 생겼다면서 지금 사람을 구하려고 하고 있으니 내가 회사에 한 번 방문을 해서 부장님이랑 과장님한테 인사를 하고 사람 필요할 때 연락해 달라고 하면 나를 채용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내가 복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것도 아마 감안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잘만 된다면 나한테는 아주 좋은 기회였기에 나는 조만간 찾아보겠다고 하고, 알려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일이 한 번에 밀려들려고 그랬는지 바로 준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더니, 혹시 자기 사촌을 같이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같은 단지 내에 살고 있어서 가능하다고만 하면 같이 배워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준영이는, 자기 성적이 이번에 많이 올라서 애들이 나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소개를 해 주고 싶지 않지만 자기 사촌이랑은 어려서부터 친하고 지냈고, 같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서 나한테 같이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한테 갑자기 들어온 두 가지 제안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회사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맞았다.

수입 측면에서도 그렇고 프로젝트 진행 도중에 내 상황에 맞춰서 발을 빼는 것도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형에게 전화를 걸어 내 생각을 얘기하자 형은 혹시 복학이 미뤄지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그때라도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형이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준영이에게 전화를 걸어, 부모님들이 상황을 알고 허락을 하시는 거라면 나한테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해 주었고 준영이는 엄청 좋아했다.

며칠동안 바쁜 일상이 계속 되었다.

복학을 위해서 동기들도 만나고 다녔고 대출금을 빨리 갚고 싶어서 저녁 시간에 직장인을 상대로 하는 일본어 과외를 시작했더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내가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단하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영이가 말한 사촌은 지금 하고 있던 과외 선생님과 아직 2주 정도가 남아 있어서 2주 후부터 같이 배우기로 했다고 했다.

수영과는 자주 마주쳤고 수영은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가기 전 쯤에 마을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내가 버스를 탈 때까지 남남인 것처럼 하고 있다가 각자 모르는 사람처럼 마을 버스에 탔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처럼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축제때 자기를 위해서 시간을 내 주기로 한 게 고마운데 돈은 받지 않겠다고 하니까 대신 다른 걸 주고 싶다고 하더니 나한테 톡을 보내서 준영이 수업이 끝나고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접선해서 같이 노래방에 가자고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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