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 ----------------------------------------------
과잠
내가 다운은 받지 않고 캡처 사진으로만 보고 스킵을 했던 여자중에 분명히 그 여자를 닮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도 사이트에 접속이 될까 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사이트에 접속했다.
들어가졌다.
나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여자의 사진이 있던 페이지를 찾아들어갔다.
거의 80퍼센트 정도는 맞는 것 같았다.
이상한 건 그 여자도 나를 자꾸 바라본다는 거였다.
그 여자가 나를 알 리는 없을 텐데.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관심이 가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내 스마트폰을 다시 보았고 화장지 하나가 더 생겨난 것을 확인했다.
“헉!! 이건 또 왜 생긴 거지?”
나는 거기가 커피숍이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잊을 정도로 놀라며 입 밖으로 소리를 내서 말했다.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여자가 방금 전까지 앉아있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나와 어깨를 스치면서 지나가는 여자를 안다고 생각했다.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내가 그 사이트에서 본 여자들은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때까지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
잊고 있었지만 수영의 학교 축제가 성큼 다가와 버렸다.
수영은 내가 잊지 않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미리 다시 얘기를 해 준다거나 하지 않았고 나는 허를 찌르며 완전히 잊고 있었다.
수영이 전화를 해서 지금 어디냐고 묻다가 끊는 것을 이십 분 동안 이십 번 정도 반복했을 때에야 그 날이 그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좆됐다!”
갑자기 그것을 깨닫고 나는 택시까지 잡아타고 수영의 학교로 갔다.
과 잠바를 입고 오라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 잠시 갈등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한참을 온 후라서 집으로 과잠을 가지러 가기도 뭣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나타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과잠을 포기했다.
나는 수영에게 주점을 어디에서 하는지 물었다.
수영이 대충 설명을 해 주기는 했지만 여기저기에 천막들이 빼곡하게 쳐 있어서 그 사이에서 수영의 주점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영의 주점을 찾아갔을 때, 나는 나를 보고 실망하는 수영을 보았다.
과잠 때문인 것 같았다.
나에 대해서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과잠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과, 그런 사람을 사귀는 자기는 또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는데.
수영이 그런 애라는 걸 이미 알고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던 건데 지키지 못하게 돼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래도 수영이 화내는 걸 오 분정도까지는 참아줄 수 있다고 해도 몇 번이나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뾰로퉁해 하고 있는 걸 보고는 나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갈까?”
“그냥 가면 어쩌라고요. 못 올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한테 말이라도 해 놓는 건데 마음대로 이렇게 하면 어쩌라고요!”
수영이 말했다.
나는 슬슬 화장지 두 개를 새로 쓸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잠깐씩 재미를 보는 것은 좋았지만 성격이 이렇다면 더 이상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수영은 나에게 화가 풀리지는 않았고 내가 가 버리지 못하게 내 눈치도 봐야 하는 상황속에서 거의 정신분열을 일으킬 지경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주문은 들어왔고 수영은 서빙을 했다.
“아이구. 예쁜 아가씨가 주니까 더 맛있네.”
일하고 퇴근하고 왔다고 자랑하고 싶었는지 정장 차림의 남자 세 명이 앉아서 헛소리를 해댔다.
하긴. 취직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환대받는 시대에 태어난 거니까.
“술 좀 따라봐. 아가씨가 따르는 술은 더 맛있을 것 같은데.”
나는 수영이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영은 일부러 나를 빡치게 만들려고 그런 건지 술을 따라주었다.
은근슬쩍 남자들의 손이 수영의 손을 더듬고 급기야 한 사람은 수영의 엉덩이에 터치를 했다.
미친 건가, 하면서도 내가 더 놀랐던 것은 수영이 가만히 있는다는 거였다.
보다 못해서 수영의 여자 선배가 와서 뭐하는 짓이냐면서 남자들에게 화를 내고 수영에게도 화를 냈다.
“너 미쳤니? 왜 가만히 있어?!!”
“아니. 웃기지도 않는데에 와서 술 팔아주고 있는데 왜 행패야, 어린 게? 어? 사회 생활 안 해 봤다고 뵈는 게 없나?”
수영의 엉덩이를 만지던 놈이 큰소리를 치면서 수영의 선배를 밀쳤다.
내가 일어서자 어쭈, 라는 말이 나왔다.
“야. 왜. 네 후배만 만져줘서 화난 거야? 그러면 그렇게 부드럽게 말을 해야지 그렇게 화를 내면 어떡해. 놀랐잖아. 언니. 아이잉.”
술 처먹으면 개가 되는 부류인 듯.
그 개가 앞발로 수영의 선배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수영의 선배를 뒤로 잡아당겼다.
수영의 선배는 나도 한 패라고 생각했는지 비명을 질렀다가 나를 보고 곧 소리를 거뒀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직딩 삼인방은 일어서서 나가버리려고 했고 수영의 선배는 끝까지 쫓아가서 술값을 받아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키에 눈동자는 영롱하게 빛났다.
쌍꺼풀이 없는 눈이었지만 크고 깊고 단정해 보였고 콧날은 인상을 고집스럽고 이지적으로 보이게 해 주었다.
미인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약간 망설여지지만 매력적인 측면에서는 수영이나 머슬 퀸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그 여자랑 아는 사이가 되고 싶었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데 뭘 그렇게까지 해요.”
내가 타박하듯이 말하자 그 여자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임정웁니다. 휴학생이예요. 수영씨 동생 과외 선생이죠.”
내가 말했다.
“아. 네.”
떨떠름한 얼굴.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처음에 이렇게 내 이름을 가르쳐주는 적이 없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대우를 받은 건줄도 모르고 반응이 영 미지근했다.
“미호 선배!”
수영이 갑자기 그 여자를 불렀다.
덕분에 이름을 알았다.
미호구나.
성이 구씨는 아니겠지.
어려서부터 별명은 구미호였겠고.
그러고 있는데 수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만보니 미호를 불러놓고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듯했다.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는 표정이다.
“언제 끝나?”
내가 묻자 수영이 화를 참는 얼굴을 했다.
“손님 별로 없으니까 나가서 놀다와. 수영아. 모처럼 학교에 오셨는데.”
미호가 말했다.
수영은 미호의 말을 별로 듣고 싶은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미호의 제안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검은 색 긴 앞치마를 벗어 접어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왜 과잠 안 입고 왔어요? 혹시 학교 속인 거예요?”
나오자마자 한 말이 그 말이었다.
“뭔 개소리세요? 준영이 과외 시작할 때 재학 증명서랑 성적 증명서 다 떼서 처음에 어머님 보여드렸다.”
“그럼 내가 한 말 무시한 거예요? 아니면 나랑 한 약속을 쉽게 생각했거나.”
“그랬나보지.”
아니라고 말해봐야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서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뭐라고요?”
“김수영. 이제 가야겠다. 다시는 서로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하자.”
“오빠!”
수영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면 어떡해요! 거의 끝나간단 말이예요.”
“그래서 뭘 어쩌라고.”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간다고요?”
“그럼 뭘 어떻게 할까? 모텔이라도 갈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어? 근데 과잠을 안 입고 와서 화가 나서 참지를 못한 거야?”
수영은 그게 본심이었을 거면서도 내가 하나하나 짚어서 하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수영의 주점으로 학생들 몇 명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손님 들어가네. 가서 손님 받아야지. 간다.”
“오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수영을 두고 돌아왔다.
그동안 바빠서 사이트에 접속을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불가피하게 화장지 두 개를 써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