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 ----------------------------------------------
호출
“야, 인석아. 안 오기로 했잖아. 밖에 있는 차는 누구 차냐? 왜 남의 건물 앞에 세워 놓은 거래?”
“아버지.”
나는 아버지 앞에 앉아서 그동안 나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다.
그냥 돈 많은 집에서 입주 과외를 하고 대학생 과외도 하고 등하교도 시켜주면서 돈을 많이 받게 됐다는 정도로만 말을 했고 준영이 어머니와의 밀약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고 내가 돈을 얼마나 받게 될 건지,지금 얼마나 모아졌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다행히 프리랜서로 번역일을 하던 것이 있어서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금액에 대해서는 그것으로 설명을 대신 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 통장 잔고를 보여 드렸다.
그리고 당장 서울에 올라가서 나하고 같이 집을 얻자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그 기간이 끝나면 올라올 거야?”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 어차피 나는 과외받는 애 집에 들어가서 1년 넘게 살 거고 보증금 쓸 일은 당분간 없어. 그러니까 그걸로 집 옮겨. 이게 뭐야. 이게! 이런 집에서 살면 건강하던 사람도 병 생긴다고!”
나는 새까맣게 곰팡이가 생긴 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알았다.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그러다가 또 쓰러질까봐서 걱정된다.”
“나는 다 나았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요.”
“알았어. 그럴 테니까 진정 좀 해.”
아버지한테 화난 게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한 화를 누를 방법이 없었다.
“요즘에도 와서 돈 뜯어가요?”
“안 온지 한참 됐지. 자기도 와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봤을 텐데 몰랐겠냐? 내가 뭐하고 사는지. 일해서 매달 빚 갚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는 거 알고 이제는 오지도 않는다. 차라리 잘 됐지.”
“빚이 왜요….”
나는 내가 모르던 빚의 존재를 알고 낙담이 돼서 물었다.
아버지는 미안해하셨다.
“아버지는 왜 그런 사람이랑 결혼을 한 거야!”
“그래도 그 여자가 너를 낳아줬잖아.”
“내가 있으면 뭐해! 아버지가 고생하시는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임정우. 너는 살아나 줬잖아. 그게 나한테는 가장 큰 효도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런 말 하는 건 아버지가 용서 안 할 거다.”
“…….”
“아버지. 이 돈으로 빚 먼저 갚을 수는 없겠어?”
보증금에, 준영의 어머니에게서 미리 받은 돈을 합쳐 놓아서 돈이 꽤 되었다.
아버지는 정말로 그 돈을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내가 너무 힘들게 벌어서 모은 돈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당장 빚 먼저 갚아. 아버지. 그리고 집 옮기고. 바로 빌라로 가지는 못해도 곰팡이 없는 깨끗하고 볕 잘 드는 방으로 가. 응? 돈은 내가 마련할 테니까.”
“아니야. 이 정도면 빚 갚고 방 옮기고 할 수 있겠다. 방은 옮기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너 내려오면 잠은 같이 자고 싶어서. 네 말대로 할 테니까 이제 얼굴좀 펴라.”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우리는, 아버지의 일인용 접이식 침대를 벽에 세우고 모로 누워서 같이 잤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의 손을 잡아 주었고 아버지가 잠들기 전에는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 드렸다.
“여자 손처럼 약해가지고. 하나도 안 시원하다.”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이래도 여자 손 같애?”
나는 아버지의 치명적인 약점인 허리를 간지럽혔고 아버지는 깔깔대고 웃으셨다.
잠들 무렵,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다 지난 일이야. 그러니까 된 거다. 다 지내 놨으니까. 나는 너를 지켰어. 그게 내 자부심이다. 내 아들로 지켰지. 누구도 그걸 부정 못해.”
“나는 아버지 아들이야. 아버지 아들 임정우.”
“그래. 임정우지.”
'그래. 임정우지.' 라는 말이, '내 아들로 지켰지.' 라는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준영이 방학하면 한 번 내려올게. 그때까지 이사 안 해 놓으면 나 서울에도 안 올라갈 거고 아빠한테 화낼 거야.”
내가 말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도 안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아버지의 계좌로 돈을 옮기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빚을 바로 갚을 수 있는 가상 계좌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대출금 잔액이 0으로 찍힌 화면을 보여주셨다.
속이 후련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화가 났지만 어머니를 선택한 사람은 아버지니까 아버지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낳아준 사람이 엄마니까 엄마가 그렇게 미운 건 아니라고 또 약한 소리를 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엄마한테 돈주면 안 돼. 진짜 절대로. 만약에 그런 거 발견되면 약도 안 먹을 거야.”
“알았어. 약은 너. 계속 꾸준히 먹는 거지?”
움찔했다.
다 나았다고 하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먹으라는 약이 너무 독해서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사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먹으라는 걸 이 주에 한 번씩 먹고 있었다.
약을 먹으면 뱃속으로 이상한 생명체가 들어가서 더운 기운을 온몸에 뿜어대면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혈관을 따라 열기가 퍼지는 느낌이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임정우. 약 꾸준히 먹고 있는 거지?”
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것은 너무나 낯선 모습이라서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빠도 약속 지켜야돼. 다시는 엄마한테 십 원도 주지 마. 알았어?”
나는 아버지가 더 집요하게 추궁할까봐 선수를 쳤다.
아버지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벌써 출근을 하셨다.
[준영이 방학하면 준영이 데리고 내려와라. 밤 낚시나 한 번 같이 가자. 네 걱정은 안 한다. 나는 너를 믿으니까. 임정우.]
굵고 강건한 필체로 쓰인 메모가 놓여 있었다.
나는 청소를 하고 곰팡이 묻은 벽지를 뜯어내고 도배사를 불러 도배를 새로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곧 이사를 한다고 해도, 이사하시기까지 그 곰팡이들을 더는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준영의 집으로 돌아가서 준영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교에서 데려오고 준영이 공부를 한 두 시간 봐주고 수영을 데리러 가고 수영의 토익 공부를 도와주고 일본 소설 번역을 하고 틈틈이 복학 준비도 하고.
그러고 나면 하루 해가 짧았다.
아버지는 새로 구한 방 사진을 찍어서 톡을 보내주었고 사흘 후에는 새 집으로 이사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먼저 사시던 집에 새로 도배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사실은 일을 세 개나 하는 게 버거웠는데 내가 빚을 갚아준 덕분에 일을 하나 줄였다면서 고맙다는 말씀도 하셨다.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나 때문에 생긴 빚이라서 나야말로 죄송한 마음이 컸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약을 챙겨먹었다.
주기가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잘 먹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어차피 병은 다 나았는데 재발을 방지하는 예방 차원이니 지금부터 더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약이 떨어졌을 때가 지났는데 약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면서, 약을 제대로 먹고 있는 게 맞냐는 수간호사 선생님의 따끔한 질책을 듣고 나는 일찌감치 병원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신세를 졌던 곳이라 그곳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에서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고 나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중에 내 담당의였던 인턴 선생님이 멀리에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달려오셨다.
“잘 지냈어, 임정우?”
우리는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많이 친해져서 형, 동생을 하기로 한 사이였다.
“약 제대로 안 먹은 거지? 그거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 아니니까 이번부터는 정말로 정신차려서 잘 먹어. 어? 몸에 불쾌감이 느껴질 수는 있는데 그래도 먹어야 돼.”
보자마자 그 소리였다.
지은 죄가 있어서 할 말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답답한 부분은 연참으로 휘리릭. 근대 비축분이 끝. ㅋ
쿠폰.추천. 코멘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