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 ----------------------------------------------
호출
“네.”
내 대답이 신통치 않았는지 형이 나를 몇 초간 계속 바라보았다.
“약을 먹으면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이 주에 한 번씩 먹었는데 이제는 아버지랑 약속도 했고, 잘 먹을 거예요.”
나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우 네가 산 건 지금도 우리들끼리 기적이라고 말을 해. 병명도 알 수 없었고 원인도 모르는 병을 이겨내고 살아난 거니까. 너 그때 은원경 과장님 아니었으면 수술도 못 받아봤을 거야. 은 과장님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하고 수술을 강행하신 거였어.”
“네? 그건 몰랐어요.”
처음 듣는 얘기가 이틀 동안 이렇게 휘몰아쳐도 되는 건가, 원래?
은원경 과장님은 의료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만한 사람이었다.
은원경 과장님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정말로 많았고 그것을 종합해서 정리해보자면 창의적인 괴짜 천재 정도가 될 것 같다.
은원경 과장님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닦아 온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는, 여기가 더 빠를 거라는 추론을 오랫동안 하고 일단 그 판단이 서고 나면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그곳을 걸어가 그곳이 길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었다. 대단한 여장부였다.
잘 되면 추앙을 받지만 잘못되면 욕을 얻어먹는 일이었다.
환자의 몸에 최대한 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은 종종 결과가 나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효과가 빠르고 약효가 강한, 그러면서 몸에 부담을 주는 약을 쓰는 것보다는 은 과장님은 느리더라도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약을 쓰는 식이었다.
은원경 과장님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표적인 예다.
나는,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가 은 과장님의 결단으로 살아난 거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나는 먼저 간다. 약 잘 챙겨 먹어.”
복도 끝에서 비범한 아우라를 풍기면서 은 과장님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가던 길을 돌아서며 은 과장님을 피해 도망가는 게 보였다.
괜히 잘못 걸려서 혼날까봐서 알아서들 피하는 거였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잘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몸을 휙 돌렸는데 뒤에서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임정우!”
나는 그대로 다시 돌아 은원경 과장님을 그때 처음 발견한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안경테 안의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은 과장님이 젊었을 때는 주위에서 은 과장님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을 찾기가 어려웠다는 전설이 있다고 사람들이 말을 했을 때 그럴 만도 해, 라고 생각을 할 정도로 굉장히 독특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다가가자 은 과장님은 바로 내 귀를 잡아 비틀었다.
“야, 인마. 쌔빠지게 살려놨더니 약을 걸러? 죽을래? 죽고 싶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라니까.”
“아, 선생니임!”
보통 사람들이 저런 말을 하면 좀 과격한 농담정도로 받아들여질 텐데 은 과장님이 그런 말을 하면 뭔가 구체적인 광경이 상상 되어버린다.
나를 베드에 묶고 내 몸에 약물이 똑똑 떨어지는 주사기를 꼽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나를 바라보는 은 과장님과 점차 의식을 잃어가다가 죽어버리는 내 모습 같은 거?
조심해야지, 하면서 은 과장님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오랜만에 보셨으니까 커피 사 주세요.”
“왜 내가 사 줘. 네가 사야지.”
그러면서도 같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봐야 250원짜리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를 향하는 중이기는 했지만.
마침 주머니에 동전이 있기도 해서 내가 커피를 빼 드렸다.
“어떻게 지내세요?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연애하세요? 여자들은 연애하면 예뻐진다잖아요.”
“연애? 풋.”
은 과장님이 웃었다.
그럴 때의 은 과장님은 왠지 굉장히 낯설었고 내가 알던 사람과 달라보였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녀다운 풋풋한 기색마저 엿보여서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다들 나를 무서워하기나 하지. 병원에서 남자를 찾는 건 아무래도 포기해야겠어. 풋풋한 녀석이 새로 왔길래 잘 해볼까 하고 몇 주 진지하게 만났는데. 질서가 다 깨지더라고. 나랑 사귀는 사이라는 게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마땅히 내려야 될 지시도 못 내리고 혼낼 것도 못 혼내고 그러더라니까? 나는 연하남이 취향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끝냈어.”
“에에?”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을 줄도 몰랐고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 줄 줄도 몰랐다.
“연하남이라면. (꿀꺽) 얼마나 연하요?”
어쩌면 내 한 몸을 희생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묻자 은 과장님이 웃었다.
“아. 몰라. 아무튼 요즘 이래저래 욕구 불만 상태야. 병원에는 다들 우중충한 얼굴들밖에 없고 내가 남자들 만나러 돌아다닐 시간은 없고 해서 샤방한 임정우 생각나서 머리를 굴렸지. 딱 보니까 약 거르고 있을 것 같아서 수간호사님한테 너 좀 챙기라고 한 것 뿐이야.”
“에에? 그런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저를 부르셨다고요?”
“웃기고 있네. 약 거른 건 맞잖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신교육도 할 겸 불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은 과장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향하는 사이에 나는 빠르게 은 과장님을 스캔했다.
그동안 여자에 대해서 이상형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만약 내가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진지하게 만날 사람이라면 은 과장님 같은 여자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나고 책임감도 있고 사람들의 경원을 받을 정도로 냉철하고, 무엇보다 예쁘고.
나이가 조금 있는 게 흠이긴 하지만 은 과장님의 몸은 남자 경험이 별로 없는 듯, 뭐라고 해야 하나, 처녀스럽다고 하면 대충 이해가 되려나?
날씬하고 괜찮았다.
머슬 퀸처럼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하고 탄력적인 몸매는 절대 아니었지만 하얀 가운 아래에 단정하게 감춰진 몸은 야릇하게 남성성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 욕구 불만 상태가 너무 오래 계속돼서 일에 방해가 될 정도면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24시간 대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내가 말하자 은 과장님이 나를 노려보고 한 번 웃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꽤 진지빨고 한 얘기라는 걸 알았는지 은 과장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다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커피를 마셨다.
“야, 임정우.”
그 말이 나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네.”
“사실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정말요? 병원에요?”
이렇게 대단한 여자가 짝사랑하는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들어 내가 과도한 호기심을 내비쳤다.
“병원 사람은 아니고.”
“그럼요?”
“너도 잘 아는 분인데.”
“누군데요?”
과장님은 더욱 말을 못하고 내 눈치를 보기만 했다.
“누군데요, 선생님. 혹시! 혹시 그 형요?!”
나는 나와 조금 전까지 얘기를 나눴던 형을 떠올리고 물었다.
“과장님!! 그건 안 되죠. 그건 진짜. 에에에에에이!! 그건 정말 심하셨다! 둘이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뭐라는 거냐.”
나는 내가 생각한 걸 말했고 과장님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병원 사람 아니라고 금방 말했다. 멍청하긴!”
“아, 맞다. 그러셨지? 그럼. 제가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데요? 저도 알고 선생님도 아는 사람이 있긴 해요? 게다가 병원 사람도 아니라면. 선생님 혹시 학교 어디 나오셨어요?”
학교 동문인가? 교수이려나?
별 생각을 다하면서 묻는데 과장님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지더니 아예 눈을 내리뜨기까지 했다.
우와. 감정이 엄청 진지한 모양이다.
“아버님은. 잘 계시지?”
과장님이 말했다.
“네? 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뵙고 왔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왜 갑자기 아버지 얘기로 튀는 걸까.
“나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기대고 싶다고 생각을 해 왔는데 임정우도 알겠지만 내가 딱히 내 자랑을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좀 유별나게 잘 났잖아. 세계적인 석학들도 나하고 안면트고 싶어서 난리들이고. 하긴. 내가 내 자랑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냐. 남들이 다 아는데. 맞잖아.”
이건 웬 유니크한 어그로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