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웹 MK-36화 (36/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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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죠?

“임정우. 그럼. 내가 아버님한테 연락드리기 전에 임정우한테 톡을 보내볼 테니까 혹시 싫어하실만한 내용이 있는지 먼저 좀 봐 줄래?”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선생님. 너무 계획적으로 굴면 그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래? 아. 근데 실수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긴 하겠어요. 평소에 위에서 군림하시면서 아랫사람들 까대기만 하시다가 상냥하게 말을 하려니까 걱정이 되시겠죠. 적응도 안 되시고.”

“까대기만 하시다가? 그게 적절한 존댓말이냐?”

“에이. 왜 이러세요. 선생님. 아빠랑 잘 되시면 저하고 모자관계가 될 텐데. 저한테 미리미리 잘 하셔야죠.”

“진짜 아들도 아닌 게.”

아, 진짜. 이 분은, 학자적인 시선으로 진지한 눈을 하고 남의 상처에 염산을 떨어뜨리고, ‘음, 녹는군!’이라고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내가 아는 모든 여자를 통틀어서 인간적인 존경심과 호감도가 1위이고, 저런 분하고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과장님이 아버지를 존경한다니. 그래서 아버지하고 만나보고 싶다니.

은 과장님이 내 심장 옆에서 폭탄을 터뜨렸지만 그런 것쯤은 다 용서하고도 남을 만큼 감격스러웠다.

“그래. 가 봐. 약 한 번만 더 거르면 죽는다. 괜히 머리 쓰지 마. 혼날까봐 안 먹고, 약 떨어질 때에 맞춰서 병원에 오면 그때는 더 혼 나. 수치 검사해 보면 다 나와. 정상적으로 약 복용했는지.”

“네! 말 잘 들을게요.”

저절로 웃음이 나와서 실실 거렸더니 은 과장님이 나를 노려보았다.

“아버님이 좋다는 거지 네가 좋다는 거 아니니까 쪼개지 마.”

“넵!”

은 과장님이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저절로 항문이 조여지면서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린다고 했던 인턴 형의 말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쌩하니 도망쳐나오듯이 하면서 도중에 한 번 뒤를 돌아보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지간히 하고 꺼지라는 듯이, 굉장히 불량한 태도로 은 과장님은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도 받아준 게 어딘가.

나는 준영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가끔 가던 호수 공원을 찾았다.

아직 준영이를 데리러 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는 상태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어어이. 아들.”

아버지가 밝게 전화를 받았다.

“아빠.”

“어? 왜? 무슨 일 있어?”

“병원에 약 타러 갔는데 은 과장님이 아빠한테 얘기 전하라는 게 있어서.”

그린라이트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사무적으로 얘기를 전하고, 차마 안 나오는 말을 쥐어 짜내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역시 나 못지 않게 그 말을 사용하는데 어색한 것 같았다.

“아빠 아들로 살게 해 줘서 고마워. 아빠한테도 고맙고 신에게도 감사해.”

“병원에서 재발했다고 그러든?”

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거든?!!! 아들이 힘들게 말하면 대견하다, 우리 아들! 그렇게는 못해줄 망정!”

“야. 우리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닭살 돋아서 미치겠다. 아휴. 가끔은 그런 말도 듣고 싶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했는데 함부로 들을 말이 아니다. 어우씨. 짜증나네.”

“뭘 또 짜증까지.”

“몰라, 인마. 얼굴 빨개졌다. 다음부터는 그런 말 하지마. 내가 알아서 다 이해할 테니까.”

“싫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엄청. 엄청. 엄처어어어어엉!!”

“끊어, 새끼야!!! 으으으으으으. 소름 돋은 것 봐.”

“아빠는 나한테 말 안 해?”

“아, 몰라. 새끼야. 아, 이상한 놈이야. 일하고 있는데 전화해서는.”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과장님이 전화할 거니까 미리 생각은 해 봐요, 아버지.”

“그래. 정말 고마운 일이네. 기대도 되고.”

“아버진 잘 하실 거야.”

“임정우. 아빠도 너 사랑한다.”

“알아. 아빠. 그리고 미안해. 사랑한다는 말 듣는 거 엄청 힘든 거네.”

저절로 웃음이 터져버려서 한참을 웃으며 말했다.

사랑 고백은 그따위로 끝이 났지만, 아버지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를 걸었다.

10년 넘게 눌러본 적이 없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보통보다는 조금 낮은, 나이든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나야. 임정우.”

나는 일부러 내 아버지의 성을 붙여 내가 누군지를 알려주었다.

“누구?”

누구냐니.

몇 년만에 건 아들 전화에 그런 말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왜 있잖아. 엄마 장사 밑천.”

“뭐라는 거니?”

“조만간 한 번 봐. 내가 찾아갈게.”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와?”

“왜? 내가 못 갈 곳인가? 왜? 전염병이라도 도는 데서 살아? 그래서 격리돼 있어? 하긴. 슈퍼 바이러스가 살고 있는 집이니까 그럴 수도 있으려나? 그럴 수도 있겠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엄마의 목소리에 짜증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병원에 누워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 도움을 구하지 못해서 빚에 쪼들렸을 때 가끔 엄마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억지로, 엄마는 이 상황에 대해 모르는 거다 라고 생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다 헛된 판타지라는 것을 안다.

“헛소리하지 말고. 여기에 올 생각도 하지 말고 너도 네 인생 살아. 이제 어른이잖아!”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나한테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동요하지 않은 척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이미 떨렸다.

“그래. 어른이지.”

내가 말했다.

“갑자기 왜 전화한 거야.”

“아들 전화받는데 굉장히 날카롭다, 엄마? 왜?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면 내 전화 받기 전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래도 오랜만에 아들이랑 통화하는 건데 이러면 안 되지. 혹시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어? 그래서 내 전화 받으니까 기분 나빠서 그러는 거야?”

“네 말투 마음에 안 들어. 건방지게 어디서 그따위로 말하니?”

엄마가 다시 한 번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자기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일단 폭발하고 나면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럼 어떻게 말해줄까?”

“됐으니까 전화 끊어. 다시는 전화하지도 말고. 전화번호 바꿀 거니까. 네 전화가 와도 안 받을 거야.”

“엄마를 위해서 하는 얘긴데 받아. 받는 게 좋을 걸? 내가 엄마 남편 직장에 찾아가서 깽판 치는 거 안 보려면. 나는 우리 엄마한테 할 얘기가 있는데 전화 통화가 안 돼서 부득이하게 여기로 온 거라고 말하면서 미친 놈처럼 소리 좀 질러보지, 뭐. 우리 엄마가 내 전화를 피할 이유가 없는데 전화를 안 받는 걸 보니 저 사람이 우리 엄마를 가둔 것 같다고 할까? 재밌겠다. 그지, 엄마?”

“임정우! 너 미친 거니?!!”

“임정우? 엄마도 임정우라고 하네? 왜. 그만큼 돈을 받고 나니까 이제는 아빠한테 나를 넘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

“엄마 좀 웃긴다. 탁란해? 남의 둥지에 알 낳은 거야? 아빠 둥지에? 그래놓고 아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낸 거야?”

“…….”

"그래도 엄마한테 어느 정도는 고마워. 다른 사람 둥지에 낳지 않고 아빠 둥지에 낳아 줘서. 아빠 같은 사람 만나게 해 줘서. 그래도 엄마한테 그 정도 복은 있었나보지?"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너. 할 얘기나 하고 끊어!"

“나도 엄마랑 이런 대화 하고 싶지 않고 엄마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고 짜증나고 그렇거든? 그러니까 그냥 간단하게 해결하자고."

엄마는 내가 할 말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돈 보내. 아빠한테 뜯어간 거. 내 치료비. 그동안 아버지가 나 양육하는데 썼던 비용. 엄마가 부담해야 될 걸 아빠가 다 냈잖아. 엄마가 내야 할 걸 아빠가 내서 엄마 돈이 굳었으니까 그만큼은 부당이득이지. 그러니까 토해내. 내가 그냥 러프하게 계산했는데 5억이면 되겠더라. 이자가 좀 많이 붙었어. 어떻게 할까? 내가 계좌번호 알려주면 되나?”

“임정우! 너 미쳤어?”

엄마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두려움보다 분노가 조금 더 크게 엄마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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