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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웹 MK-37화 (37/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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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레이

“아니? 왜? 그런 것 같아? 엄마가 미친 것 같지는 않고?”

내가 말했다.

"이게 아주 맹랑하네?"

"엄마 아들인데 어련하겠어? 왜? 엄마 아들도 아닌 건 아니지?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아. 엄마는 내 친엄마가 맞는 것 같거든. 엄마가 하고 돌아다닌 짓 보니까 딱 우리 엄마가 맞아."

“너. 이거 범죄라는 건 알아? 네가 나를 협박해?”

“아닌데? 나는 정당한 권원을 갖고 청구하는 거야.”

“그래? 너는 네가 굉장히 잘난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럼 어디 한 번 해 봐. 세상 일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어린 나이에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기운내라. 임정우. 재미있는 괴물이 돼 버렸네.”

엄마는 후후훗, 하는 소리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전화기를 보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생각해 보려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거였지만 통화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나와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울었다거나 정에 호소하려고 했다면 어쩌면 멍청한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흔들렸을지도 모를 텐데 엄마가 내 전의를 불사르게 해 준 것은 굉장히 고마웠다.

내가 말한 돈을 순순히 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엄마가 뭘 믿고 그러는 건지 생각해보려고 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노발대발하셨다.

내가 어떻게 그 사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놀랄 틈도 없이 아버지는 화를 냈다.

“임정우. 하나만 묻자. 네 생부를 찾고 싶은 거냐? 그래서 그런 거야?”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이해했다.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내려면 아버지가 의무 없이 내 양육을 부담해 왔다는 걸 증명해야 했고 그러려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친자 관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확인해야 했다.

아버지는 그게 서운하셨던 거고 엄마는 그걸 알고 바로 아버지에게 얘길 한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이해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빠가 고생하는 게 싫었어. 아빠만 당하는 게 싫었고, 나 때문에 아빠가 잃은 걸 돌려주고 싶었어. 은 과장님 말이야. 아빠 좋대. 아빠를 존경한대. 아빠하고 잘 되고 싶대. 나도 아빠가 그 분 좋아했던 거 알아. 둘이 잘 되면 좋잖아. 괜히 기죽지 말라고. 나는 아빠가 은 과장님 만나면 어떻게 할지 알아. 괜히 지금의 아빠 처지 생각하면서 주눅들고, 아빠는 과장님한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니야. 아빠. 그러지 마. 아빠는 충분히 누릴 수 있어. 자격도 있고 멋지고. 나 때문에 포기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빠가 포기한 게 나 때문인 것처럼 여기지 마. 나 때문에 아빠가 잃었던 거. 내가 다 되찾아 줄 거니까.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아빠 자식이야. 누구 정액에서 시작했는지는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알았어?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다시는 묻지마.”

“…….”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흥분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았다는 걸 이해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은 과장님의 얘기를 해 버린 것도 죄송했다.

아버지는 한참만에 알았다고 하셨다.

“임정우. 너는 내 아들이야. 알았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이야말로 그때의 내가 듣고 싶었던 유일한 말이었다.

“알아. 그럴 거고. 언제까지든.”

내가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리고. 네 엄마랑 그 여자 남편. 둘 다 만만하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이 문제는 네가 양보를 했으면 좋겠다. 돈은 다시 벌면 돼. 앞으로는 네 말대로 절대로 돈 안 줄 거니까.”

“알았어. 그렇게 걱정된다면 아빠 말대로 할게.”

아버지에게 진실을 알게 해서 뭘 하겠는가.

“어차피 지금은 아무 것도 못 해. 변호사도 선임해야 할 텐데 아직 그럴 돈은 없어. 하게 되더라도 나중에 내가 학교 졸업하고 직장 잡고 돈 벌어서나 할 수 있겠지.”

그러다가는 청구 기간이 다 지나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은 과장님 만나러 갈 때 잘 입고 나가. 아빠. 홀아비같이 입고 가지 말고. 아빠가 들어오는 걸 보고, '아. 깬다!' 이런 생각 들게 하지 말라고.”

나는 아버지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말했다.

“그…럴까? 괜찮은 옷이 있나 모르겠네.”

아버지가 내 말을 믿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적당한 옷 없으면 한 벌 사, 아빠. 내가 돈 보내줄게. 번역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일이 계속 새끼쳐서 들어와. 오늘도 계약 한 건 하고 계약금 받았어. 내가 돈 보내줄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돈 함부로 쓰지 말고 이제부터는 너도 잘 모아, 이 녀석아! 옷은 사긴 해야겠다."

"옷 사러 가면 마음에 드는 거 피팅 룸에서 입어보고 사진 찍어서 보내, 아빠. 어떤 게 어울리는지 봐줄게. 여자들이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지는 아빠보다 내가 더 잘 알지."

"그래야겠다."

아빠가 호락호락 대답을 했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엄마가 평온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심장 근처에서 짜릿한 통증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

시간을 내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준영이와 수영은 내가 부탁을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녀오라고 하겠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불성실하게 할 수도 없었다.

준영이 방학을 하면 그때는 내가 시간을 적절히 활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내가 계획했던 일들을 준영이가 방학을 한 후에 하려고 미뤄 두었다.

아버지는 피팅룸에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무려 여덟 장이나.

은 과장님에게 정말로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옷 괜찮은 것 같아, 라고 말을 해 주고 그걸로 사기로 결정을 한 거라고 생각한 순간 사진이 다시 또 전송되기를 세 번.

[이게 더 나을까?]

아빠는 처음했던 질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음. 그것도 괜찮네.]

나는 대답이 성의없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시 대답했다.

[그래? 아까꺼보다 낫냐?]

아버지는 내 의견을 얼마나 반영해야 하는 건지 점점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둘 중에는 지금 꺼가 더 나아보여. 더 젊어보여.]

[아까꺼가 나은가?]

아니. 그럴 거면 왜 물어보신 거래!!!

나는 아버지에게 심각한 결정 장애의 징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고민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은과장님에게서도 사진이 전송되어 왔다.

[혹시 이 둘 중에 뭐가 나아보여? 세미나에 가야 되는데 입고 갈 옷이 마땅치가 않아서. 좀 봐 줘봐. 임정우가 감각이 젊으니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러면서 과장님은 여자 정장 사진을 보내왔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내가 아는 사람중에 임정우가 가장 잉여력이 넘쳐나서 그런다.]

[제 눈에는 진한 그레이가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겨자색은 이상하지 않아요? 하긴. 나이든 사람은 그런 색이 좋은가? 우리 아버지도 겨자색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하던데.]

[나이든 사람? 실언을 정정할 기회를 5초 주겠다.]

[정정합니다!]

[겨자색이 낫다는 거지?]

[회색이 낫다고 했는데요?]

[됐고. 알았어.]

[선생님. 근데 아버지 만날 때 정장 입으시려는 건 아니죠? 그럼 너무 딱딱해지지 않을까요, 분위기가?]

[그러려나?]

바로 낚였다.

그렇게 금방 들킬 거면서 세미나 드립은.

[너무 비싼 아이템을 착용하거나 그러시면 아버지가 부담스러우실 테니까 캐쥬얼하게 하고 나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래? 그게 낫겠어?]

[네. 아버지가 괜히 위축될 수도 있잖아요. 선생님은 비싼 아이템 도움 안 받아도 지적이고 세련되신 분이니까 그런 건 오히려 매력을 반감시킬 것 같아요. 그리고 저한테 도움을 받으신 김에 저도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아버지가 옷을 사셔야 되는 모양인데 뭐가 어울리는지 제가 잘 모르겠거든요.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

그 답이 오는데는 다른 답이 오던 것보다 서 너 배의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피팅 룸에서 옷 입어보고 사진 찍어서 보내신 게 있는데. 뭐가 좋은지 결정을 못 하겠어요. 두 개 정도로 압축은 되는데.]

[일단 다 보내봐.]

[몇 개는 완전 진짜 아니예요.]

[알았으니까 일단 다 보내봐.]

짤줍하는 사람처럼 대단한 열성을 보이며 과장님이 재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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