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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안 잊어.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엄마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고 엄마에게서 돈을 찾아낼 방법에 대해서 늘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누구에게 그런 문제를 선뜻 털어놓기가 마땅치 않았다.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은 과장님이었지만 그 일에 대해서 전부 알게 되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가득 차 있는 상태니까 아버지가 그저 고맙고 좋지만 다른 사람이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면 호구라는 생각밖에 안 들지 않을까?
자기 자식인 줄 알고 평생 남의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를 떠맡은 채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그러고나서도 계속 돈을 뺏기고 자기는 그 나이 되도록 힘든 생활 전선을 전전하고 돌아다니는 신세라고 하면.
그래서 나는 은 과장님에게도 쉽게 그 일을 의논하지 못했다. 잘못해서 은 과장님의 눈에 씌운 콩깍지가 벗겨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까.
혼자서 고민을 거듭하면서 나는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며 조바심을 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있었다.
내 차는 준영이 어머니가 가지고 나갔다.
준영이 어머니는 그날 여고 동창생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차를 가지고 나가고 싶다고 했고 준영이 학교 끝날 시간이 되면 자기 차로 데려오라고 했다. 전혀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서 나는 그러기로 했다.
잠깐 출판사에 갈 일이 있었다.
원래 기획회의에 나를 참석시키지 않는데 이번에는 새로 온 식구들과 인사도 할 겸 한 번 같이 참석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귀찮아 죽을 뻔했지만 그래도 내 얼굴 보고 싶어 죽겠다는데 한 번은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런 이유로 버스 정류장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탈 버스가 빨리 도착하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기다리는 그 곳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살구색 스커트가 적당한 길이와 피트감으로 딱 떨어진 채 여자의 허리와 허벅지를 감고 있었다. 바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건져 올린 것은 그 살구색 스커트였다.
그 스커트 덕분에 즐거웠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때였다.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서 동아리마다 열기가 후끈했는데 우리 동아리는 그 해에 신입생을 열 명 이상 모으지 못하면 동아리 방에서 쫓겨날 위기였다. 동아리 방이 사라지면 동아리도 사라지게 될 거라는 위기감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보다.
우리 동아리는 신경의 공감각이라는 것을 연구하는 동아리였는데 나는 어떤 사람들이 그런 걸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동아리에 가입까지 했다.
얼굴도 반반하고 의대, 법대, 미대에 다니는 선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더 호기심을 가졌었다.
그날 마침 나는 다리에 깁스를 한 상태였는데 무슨 일로 그 꼴이 됐던 건지는. 아! 그거네. 오토바이를 타고 멋있게 턴을 하다가 낙엽에 미끄러져서 그대로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이 준비를 하던 선배들이 하나 둘씩 강의가 있다면서 동아리방을 떠났고 결국 나는 3학년 선배와 둘만 남겨졌다.
선배는 제법 열성을 보였다.
절대로 동아리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선배는 사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휴학한 채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얼굴은 뭐, 한 번 보면 게거품 물고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어도 나는 그 얼굴이 좋았다. 오래 생각에 잠기는 표정도 좋았고 그 선배를 뭔가 있어보이게 만드는 대단한 이력도 좋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주름 많은 입술도 좋았다.
선배는 대자보를 열심히 쓰다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고 맞춤법을 물었다.
어떤 단어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선배가 말도 안 되게 쉬운 단어를 모르는 것 때문에 선배 바보냐고 진지하게 묻기까지 했다.
창피해하는 선배를 보면서 문득 선배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은 특이하게 선배가 유난히 예뻐보였다.
선배는 틀린 대자보 글씨를 고치느라고 스카치테이프를 찾았다. 종이를 오려서 덧붙일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스카치테이프는 캐비넷 가장 윗 칸에 있었다.
선배한테는 닿지 않을 곳이었다.
선배는 나한테 그걸 꺼내달라고 했지만 나는 다리를 다쳐서 꺼낼 수가 없다고 버텼다.
다리를 다쳤다고 똑바로 서는 것조차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선배는 내가 그냥 선배 말을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혀가면서 화를 냈다. 선배 생각이 맞긴 했다. 그냥 선배 말을 듣기 싫어서 그런 거다.
선배는 결국 의자를 가져다놓고 그 위로 올라갔다.
선배를 보면서 깨달은 건데 여자들은 그런 걸 잘 모르는 것 같다. 은근하게 노출되는 자신들의 속살이 남자의 몸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선배는 무릎정도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
나는 내 시선 앞에 드러난 선배의 예쁜 라인을 바라보았다.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내가 다가가자 선배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떨어질지 모르니까 잡아주겠다고 하면서 선배의 허리를 안았다.
“임정우. 은팔찌 차고 싶냐?”
그러면서도 선배는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았다.
선배가 확실하게 거절을 할 때 어떤 식으로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선배한테 좋은 감정을 품었던 사람이 내가 최초는 아니었으니까.
선배는 얼마든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아 뗄 수도 있었고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만 말을 하고 스카치테이프를 찾아 계속 캐비넷 안을 뒤졌다.
“놓으라고 했다아.”
그때까지도 허리를 안고 있는 나를 한 번 틱 내려다보고 선배가 다시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봐요. 이러다 떨어지면 선배도 깁스해야 되는데. 깁스하면 대개 불편해요.”
“일단 내려가게 비켜!”
선배는 으르렁댔고 그 일은 그렇게 끝났다. 선배는 도망가지도 못하는 나를 때렸는데 애교 정도였지 작정하고 아프게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 후에 선배와 마주치면 윙크를 했고 선배는 나를 흘겨보았다. 신입생이 신입생다운 맛도 없다고 하면서.
내가 입원해있는 동안 선배가 다녀갔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내가 검사실에 있거나 다른 과에 가서 진료를 받는 동안 선배가 기다리다가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정유진.
나는 왜 선배 이름을 정은진으로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선배와의 만남이 더 미루어졌다.
정은진 선배 연락처 아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준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나중에 누군가 나에게 혹시 정유진 선배를 말하는 거냐고 해서 그제야 내가 선배의 이름을 잘못 기억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뭘 만나겠다고 하는 거냐는 잔소리와 함께 결국 선배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을 하자 선배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나와 만나주기로 했다.
“어쩜 그렇게 한 번도 연락을 안 하고 사니?”
우리가 서로 마주보게 됐을 때 선배가 곧바로 투덜댔다.
“이제는 안 아픈 거야?”
선배는 곧 걱정스런 표졍을 하고 물었다.
“네. 다 나았어요. 약만 잘 먹으면 된대요.”
“걱정 많이 했어.”
“연락 드렸어야 됐는데 죄송해요.”
그리고 나는 내가 선배를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었다.
선배는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나를 위로할 말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소송을 하면 얼마나 걸릴지, 그런 것들 좀 물어보고 싶었어요.”
내가 말하자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송이 지난한 과정이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송은 피하고 사는 게 좋다면서 선배는 어머니를 더 설득해 보라고 했다.
“직접 만나서 얘길 한 적은 없는 거잖아. 일단 만나서 얘기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기대했던 전문가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아서 실망하고 있는데 선배도 내 표정이 어두워진 걸 눈치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