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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걸의 정체!!
준영이의 일기를 보고 나는 그때 일이 생각나서 다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핫 걸이 딜도로 자위를 한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건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방정맞은 입에서 그 말이 나왔고 핫 걸은 집요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오가고 나서 한참 지난 후까지도 핫 걸은 가끔 나를 바라보았다.
성욕이 남다르고 남들이 잘 하지 않는 플레이를 좋아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봤을 때 핫 걸이라는 여자는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성취도가 높은 전문직 여자 같았다.
의외로 판사라거나 그런 반전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앞으로는 핫걸 앞에서 말 실수를 하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겠다는생각이 들었다.
내가 몸캠을 보고서 알아낸 정보에 대해서는 확실히 구분을 지어 놓아야 했다. 그것은, 내가 혼자서 미리 알게 된 게 있다는 것을 정말 잘 숨겨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그날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드했었던가 했다.
나는 그냥 몇 줄로 간단하게 말하고 끝낼 일을 준영이는 정말 구구절절 기록을 해 놓았다.
관계가 끝나고 핫 걸은 허벅지에 손을 짚고서 한 걸음 한 걸음을 간신히 옮겼다.
그러면서도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자기 생애 최고의섹스였다고.
나는 핫 걸이 씻으러 간 사이에 멀뚱히 서서 그곳을 둘러 보았다.
준영이는 나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더니 먼저 가겠다고 하고 줄행랑을 쳐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니까 할 얘기도 많을 거라면서.
핫 걸과 나는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할 것도 아니어서 준영이를 먼저 보냈다.
나는 좀 더 여유있게 집안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특이할 건 없었지만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다가 익숙한 책등이 보였다.
책등에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거기에 손을 뻗었다.
그때 핫 걸이 나왔다.
벌써 옷을 다 입고 있었는데 핫 걸은 내가 책장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가서 씻으세요.”
핫 걸이 말했다.
말투가 약간 날카롭게 느껴졌다.
“네.”
나는 금지된 일을 몰래 하려다가 들킨 아이처럼 샐쭉한 표정으로 떠밀리듯이 욕실로 들어갔다.
내가 나오자 핫 걸이 커피를 주었고 나는 책장을 보았다.
내가 보려고 했던 그 책은 그곳에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곳에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책인데 그러는 건가 하면서 나는 혼자서 어깨를 으쓱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택시 뒷자리에 앉아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올라온 핫 걸의 영상을 다시돌려보았다.
세 번째로 이어붙여진 영상이 시작되기 전에 카메라가 제대로 각도를 잡지 못했을 때, 카메라가 한 번 뒤집히는 동안 방안 전체가 보였다.
나는 그때 카메라가 바닥에 있는 책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포착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 책이 맞았다.
내가 핫 걸의 친구 집이라는 그곳에서 본 책은 그 책과 같은 책인 듯했다.
처음에 그 영상을 봤을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나는 왠지 그 책이 나한테 익숙하다고 느꼈다.
책에는 제목도 쓰여있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희한했다.
제목도, 저자도 없는 책.
출판사 이름도 인쇄되지 않은 책.
그저, 왠지 나한테 익숙하다고 느껴지는 표지의 잔상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을 뿐이었다.
‘어디지? 그걸 어디에서 봤지? 왜 그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그러다가 결국 나는 작은 탄성과 함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오래 전에 번역했던 책이 나오기 전, 우리 출판사에서는 세 개의 후보를 두고 어떤 표지가 가장 나을지 잠재 독자들의 의견을 묻는 표지 이벤트를 했었다.
그리고 내가 핫 걸의 집에서, 그리고 핫 걸의 친구 집에서 본 책은 그때 후보로 올랐다가 선택받지 못하고 사장된 그 표지였다.
그 표지를 쓴 책이라면 표지 디자이너가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남의 디자인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그려진 분홍색 그로테스크한 꽃은 출판사에 소속된 표지 디자이너가 직접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었다.
나는 택시 안에서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이런 저런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고갔다.
진짜 겁도 없었지. 새 작품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고사해 오던 주제에 내가 먼저 덜컥 전화를 한 거였으니.
나는 제목이 없이 만들어진 책에 우리 출판사의 표지가 쓰인 것을 봤다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 그거요. 뭔지 알 것 같아요. 혹시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더 확실히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정우씨가 말하는 책, 우리 출판사에서 만든 것 같아요. 어떤 회사의 임프린트 외주 작업으로요.”
뜻밖에도 대답이 바로 나왔다.
“아. 그렇군요.”
“도용된 줄 아셨나보네요. 그래도 이런 얘길 듣게 되니까 정말 기분이 좋네요. 일부러 전화까지 해 주시고.”
“책에 제목이 없어서 특이하던데.”
“그렇죠. 근데 제목은 필요없다고 하더라고요. 표지에는 아무 것도 안 넣을 거라고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했었어요. 그래서 더 기억이 잘 나기도 하고요. 그런 게 아니었으면 무슨 무슨 표지를 한 무슨 책 기억나냐고 하면 절대 기억 못하죠. 우리가 매달 만들어내는 책이 몇 권인데.”
“그렇겠네요. 근데 혹시 그 원고 갖고 계세요? 교정 교열 작업도 우리가 맡아서 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잠깐만요. 뭔지 생각이 난다. 어떤 회사의 기업 윤리랑 업무 지침 같은 거였는데. 아아. 맞다. 신입사원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걸 거예요. 왜요? 꼭 아셔야 되는 내용이예요?”
“그게…. 제가 관심가진 여자분이 거기에서 일하는 것 같아서요. 직장이 확실하면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 볼까 하고요. 원래 제가 속물근성으로 무장한 남자잖아요.”
나는 그냥 되는대로 말을 주어섬겼다.
“아아아아. 뭔지 알겠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그 책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 거예요?”
“네. 그렇게 됐네요.”
“파일이 있을 텐데. 제가 찾아서 보내드릴게요. 근데 이거 정우씨니까 보내주는 거예요. 유출되면 안 되는 거 알죠?”
“네. 그럼요. 파일 받으려면 오래 걸릴까요?”
“어머. 정우씨가 아주 애가 닳은 걸 보니까 저도 흥미가 생기는데요? 나중에 정식으로 사귀게 되면 꼭 소개시켜 주세요.”
“네.”
“잠깐만요. 그게 제가 생각한 폴더에 있으면 바로 보낼 수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바로 확인해 볼게요.”
대기.
그리고 답변.
그 파일은 폴더에 있었고 나는 파일을 메일로 전송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서초동으로 가 주세요. XXX 변호사 사무실요.”
“주소는 모르세요?”
“우선 서초동으로 가 주세요. 주소 알아볼게요.”
그리고 나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소를 다시 한 번 불러달라고 말하면서.
나는 택시 안에서, 메일로 온 원고를 읽었다.
그 회사가 비밀 유지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고급정보를 관리하는 기관인 것 같다는 유추만 가능했을 뿐 다른 힌트를 찾지 못한 채 원고의 절반 이상을 읽어내려갔을 때, 원고 작성자의 실수라고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곳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다.
그 조직의 이름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
KISHA.
나는 선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혹시 키샤에 대해서 아는 게 있냐고 물었고 선배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뭐하는 곳이냐고 묻자 선배는, 이런 저런 정보를 다루는 의문에 싸인 정부 기관인 걸로 안다고 말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핫 걸'과 '키샤'.
두 단어의 조합이 내 머릿속에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엄마. 나는 잘 안 잊어.’
핫 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엄마와 엄마의 남편을 압박하는 일은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이제 천천히 그 여자, 이연우를 만나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
내 얼굴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드리워졌다.
날씨 한 번 기차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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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에 뵈어요. 너무 졸리면 조금 늦거나 7분에 예약 걸 수도 있어요~
쿠폰과 추천, 코멘트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