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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한 글자씩 쓰는 동안, 핫 걸은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어깨와 등 근육에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핫 걸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고 잠시동안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생각된 게 없어서 당황한 게 분명했다.
한참만에 핫 걸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쓴 글씨가 뭘 뜻하는지 아예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프로끼리 이러지 맙시다.”
내가 말했다.
핫 걸은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나는 핫 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돌아가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핫 걸이 쓸데없는 상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핫 걸의 이상한 성적 판타지를 알고 핫 걸을 조직에서 매장하겠다고 협박하려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나는 두 손을 위로 올려서 깍지를 끼고 핫 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쪽에서 사람들 정보를 다룬다고 들었어요. 나는 아주 사소한 도움이 필요할 뿐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어떤 남자랑 어떤 여자가 그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나랑 아버지를 괴롭혔어요. 아버지가 회사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게 회사에 찾아와서 일을 방해하고 완전 쪽팔릴만한 짓을 해대서 아버지는 회사도 그만뒀고 결국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다른 일들을 하면서 나를 키웠어요. 내가 병에 걸려서 큰 돈이 들었는데 그것도 아버지 혼자 마련해야 됐고요. 나는 그 남자랑 그 여자한테서 그 돈을 받아내고 싶어요. 그래서 변호사한테 자문을 구해봤는데 변호사는 이 일을 해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처가 남게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왜요?”
핫 걸이 물었다.
내 얘기가 길어지자 핫 걸은 내 얘기에 집중을 했고 내가 자기를 협박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내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 나와 내 아버지한테 그런 짓을 저지른 여자가 내 엄마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게 사실인지 내가 어떻게 믿죠?”
핫 걸이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2천만원을 나한테 보내면서 엄마가 나에게 보냈던 문자를 보여주었다.
핫 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그 남자는 무슨 일을 하는데요?”
핫 걸이 물었다.
“정계에 진출하려고 시도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재산 상황은 파악이 됐어요?”
“어느 정도는요.”
“하고 싶은 게 뭐예요? 돈을 돌려 받는 거?”
“우선은 그건데. 가져간 돈만 돌려받는 거면 그 사람들이 뭘 배우고 깨닫겠어요? 뺏어간 돈만 다시 뺏기는 거라면 억울할 것도 없겠잖아요. 나는 그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깝치지 말아야 된다는 깊은 교훈을 얻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거지처럼 살게 하고 싶고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이 없어서 아쉬운 상황을 겪게 하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벽 사방에, 검은 곰팡이랑 자주색 곰팡이가 5센티 두께로 피어 있는 그런 골방에 갇혀버리게 하고 싶어요.”
핫 걸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토옥, 토옥, 소리를 냈다.
“스스로 줄 일은 절대 없을 테고. 줄 수 밖에 없도록 약점을 잡고 싶은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핫 걸은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다가 나한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스마트폰 줘 봐요.”
내가 스마트폰을 주자 핫 걸이 내 스마트폰에 연락처 하나를 입력했다.
“정은호라는 남잔데. 마약 관련 범죄에 발을 깊이 담그고 있는 사람이예요. 영리한 사람이라서 자기 손에서 냄새가 안 나게 잘 지우고 다니죠. 무슨 말인지 알죠? 꼬리를 잘 자른다고요. 이용가치가 큰 사람이고요. 이 사람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그쪽한테 달렸어요. 이 사람은 밀가루 같은 거죠. 이 사람을 가지고 뭘 만들어낼지는 그쪽이 알아서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소개했다는 말을 하면 절대로 안 돼요. 그냥 알아서 접근하세요. 그리고 이 사람이 그 일을 돕게 만드세요. 이 사람이 착수하기만 하면 그 일은 이루어질 거예요. 당신 엄마. 그리고 그 남자가 거리로 나가는 건 시간 문제가 될 거예요. 그 전에는 그쪽이 이 남자를 설득해야 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어떻게 설득하면 됩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죠. 내가 알려주면 내가 보낸 거라는 걸 알 텐데요? 머리 좋은 사람이 그럴 때 머리 쓰지 언제 쓰려고 그래요?”
핫 걸은 말을 전부 끝냈다고 생각하고 두 손으로 깍지를 낀채 머리 뒤로 넘겼다.
“간만에 괜찮은 사람 만난 줄 알았더니.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핫 걸이 물었다.
“내가 신기(神氣)가 좀 있어요.”
“뭐요?”
“혼자 있을 때 딜도 가지고 장난하지 않아요? 새벽에 아무도 없는 골목을 걸으면서 트렌치 코트를 들고 엉덩이를 드러내기도 하고. 그걸 찍어주는 사람이랑 같이. 공원에서는 더 화끈하게 놀고.”
내가 말을 할수록 핫 걸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나는 핫 걸이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집에 설치된 몰카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핫 걸은 내가 정말 용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있어요? 서른 되기 전에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승진은 가능할까요? 팀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요? 이 팀 나랑 진짜 안 맞는 것 같은데. 근데 서른 되기 전에 진짜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걸 물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은호라는 남자는 어떻게 만나야 되죠?”
“알아서 만나라니까요?”
“그 남자가 정은호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면 됩니까?”
“그것도 그쪽이 알아서. 아. 잠깐. 어…. 그 사람 언제 기사에 나왔던데. 웃기지도 않게 무슨 시위 현장에서 피켓 들고 있다가 찍혔더라고요. 같잖아서. 저는 마약 팔고 다니는 인간이! 그게 무슨 시위였더라? 무슨 혐오세력에 가담해서 그러고 돌아다니던데.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올 거예요. 기다려봐요.”
핫 걸은 기억을 더듬어서 검색을 했고 마침내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나는 핫 걸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크로스 드레서 정은호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본 채 사진을 찍힌 것이다.
***
핫 걸은 내 부탁을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은호가 자주 나타나는 곳과 정은호의 옛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현재의 주거지는 파악이 되고 있지 않지만 온라인으로 판매하다가 한 번 거의 걸릴 뻔해서 지금은 몸을 숙이고 오프라인에서만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프라인에서 다시 단골을 확보하는 건 어려울 테니 당분간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예전의 고객들에게 접근할 거라는 얘기와 함께 핫 걸은 정은호의 주요 고객중 한 사람의 사무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런 핫 걸에게 딱 한 마디를 했다.
“이미 연락이 돼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핫 걸은 놀라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진행이 된 거냐고 물었다.
“나한테 신기 있다고 했잖아요.”
“아아아!!”
농담이예요 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핫 걸이 내 말을 너무 믿어버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핫 걸은 정은호에게 자기 얘기를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정은호에게 핫 걸에 대해서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었다.
당신이 크로스 드레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야한 여자 옷을 입고 찍은 영상을 봤다고 하자 정은호는 어떤 개새끼들이 자기 텀블러를 자꾸 기웃거린다 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그걸 약점으로 잡아 이용할 생각은 없고 서로 가진 특기를 살려서 사업을 같이 해 봤으면 한다고 정은호에게 말했다. 정은호는 자기 전화번호도 알고 자기가 크로스 드레서라는 사실에, 언제 유출된지도 모르는 영상까지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를 거의 키샤 요원급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키샤 역시 그런 식으로 정은호를 몇 번 자기들 일에 동원을 했었는지 정은호는 만날 장소를 정하고 그곳으로 나왔다.
약속 장소로 나오는 정은호는.
진짜 그런 상남자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정은호를 보면서 내가 본 영상이 조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처음부터 사이트가 하는 짓이 이상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