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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웹 MK-67화 (67/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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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나타난 정은호를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왜 엄마의 문제에 그렇게까지 몰두했는지 깨달았다. 금전적인 손해는 사실 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믿음이 배반당했다는 생각은 나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었다.

정은호가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실제로 몸이 너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은 과장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받기도 했었다. 은 과장님은 신경쓰이는 일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과장님은, 일단은 몸에 별다른 이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계속 그러면 다시 찾아오고 밤이라도 상관없으니 몸이 이상한 것 같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런 상태였는데 정은호가 나타난 걸 보자마자 몸이 가벼워졌다.

정은호는 조수석에 있는 가방을 뒤로 넘기면서 빨리 타라고 재촉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차에 탔다.

"얼굴을 보니까 내 말을 안 믿고 혼자 마음 고생을 있는대로 다 한 얼굴이구만. 며칠 안 본 사이에 피부가 썩었네. 썩었어."

그 말을 듣고보니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5억이 생기면 뭘 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5억이면 꽤 큰 돈이잖아요?”

차를 출발시키면서 정은호가 말했다.

이 사람이 나이가 어리다고 사람을 무시하는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좌에서 뺀 돈만 해도 얼만지 대충 알고 있는데 겨우 5억 운운해서였다.

“지금까지 돈 쓰는 법을 몰라서 헤맨 적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돈이 들어왔을 때도요.”

내가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정은호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그럼 50억은요? 50억이 한 번에 생기면 뭘 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갑자기 0 하나가 더 붙어서 질문이 바뀌자 나는 갑자기 머리 회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정은호는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어댔다.

“거기에다 0을 하나 더 붙인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군.”

“예? 오, 오백요? 오백, 억요? 그동안 무…, 무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나는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도 못하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겨우겨우 물었다.

“꽁꽁 숨겨둔 계좌 하나를 더 발견한 것 뿐입니다. 아우우우. 엄청 고민했네. 알려주지 말고 그건 그냥 혼자 꿀꺽 할까 하고.”

“예?”

내 얼굴을 보면서 정은호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계좌가 있거든요. 내가 원래 처음부터 그런 짓을 하던 사람은 아니예요."

"네?"

"처음부터 약 팔고 그러지는 않았다고요. 사업을 하다가 잘 안 돼서, 그래도 먹고 살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내가 궁지에 처했을 때 나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디다.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닌데 전부 다 나 몰라라 하고. 일단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착한 놈만 바보 되는구나 싶은 생각에 나도. 뭐.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잘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도 좋아서 한 것도 아니고. 뭐. 그렇다고요."

"네."

"어쨌든. 나도 사업을 해 봤고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이 돈 숨기거나 세금 포탈하고 싶을 때 어떻게 머리를 쓰는지는 좀 잘 알거든."

“그럼…. 얼마를 빼낸 겁니까?”

“왜요?”

정은호가 웃었다.

“왜라뇨?”

“돈이 생기면 뭐할 겁니까?”

“네?”

“하나 충고하죠. 지금 아버지하고 관계가 좋죠? 계속 유지하려면 이번에 돈 생긴 건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1억이 생겼다고 하면 같이 기뻐해 줄 수  있어도 그게 10억이라고 하고 100억이라고 하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

“충고해 준 건 고맙지만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아버지한테 당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얘기는 비밀로 하는 게 그쪽 아버지를 위해서도 좋을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소망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선 걸 갖게 되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요. 자기 분수를 알고 아끼고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을 가졌던 사람이 그걸 잃을 수도 있죠.”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입장을 바꿔서 아버지에게 갑자기 500억이 넘는 재산이 생긴다고 하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겨왔던 가치들을 전부 다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당장 내가 만나오던 사람들과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고 그럴싸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게 될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내 돈을 노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고.

나는 정은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래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버지한테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된다면 그때가서 아버지에게 말을 해 주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정은호는 나에게 계좌 하나를 주었다.

얼마가 들어있는지는 나에게 직접 확인하라고 했다.

화면이 열렸을 때 나는 내 눈에 보인 숫자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723억이 넘는 숫자였는데 그게 정말 도저히 내 머리로 감당이 안 되는 숫자라서 나는 그걸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숫자의 맨 끝 귀퉁이에서부터 짚어 가며 일, 십, 백, 천 하고 세 가면서도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은호는 딱 자기가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이런 돈이 움직이게 되면 조사가 들어와요. 그건 내가 미리 손을 써 뒀습니다. 이럴 때는 정계 실세를 알아두는 게 도움이 되죠. 사업하면서 만들어 뒀던 인맥이 있어서 이쪽 저쪽에 돈을 찔러 주고 조사나오는 일이 없도록 잘 덮어뒀습니다. 그러느라고 시간이 걸린 거고 말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돈을 찾고 만져보고 손에 쥐고 싶겠지만 그렇게 급하게 먹는 건 체하거든요.”

정은호가 말했다.

나는 정은호를 의심했던 게 괜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 돈은…. 그 돈은 제가 드릴게요.”

내가 말했다.

“그게 얼만줄 알고요?”

정은호가 웃으며 물었다.

“네?”

“일, 이 백 만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네?”

뭘 상상해야 하는 건지 몰라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정은호가 다시 웃었다.

“30억 조금 넘게 들어갔습니다. 큰 구멍만 막아뒀다가 나중에 작은 구멍이 터져서 거기로 물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 돈은 3대 7로 분배하기 전에 뺐습니다.”

“조금 더 가져가셔야 되지 않겠어요?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는데.”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욕심을 더 부리면 나도 제어가 안 돼요. 만약에 욕심 부릴 생각이었다면 그냥 혼자 다 갖고 잠수 타 버렸겠죠.”

만약에 그랬다면 정은호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고, 결과적으로 정은호는 정말로 현명한 결정을 내린 거였다.

“한 1, 2억 정도만 있어도 그 나이에는 허세 부리고 다닐만 할 겁니다. 돈 사라지는 건 진짜 금방이예요. 나도 그래본 적이 있어서 압니다. 보유한 자산이 1,100억이 넘었던 때도 있었지만 한 번 삐끗 하니까 순식간에 사라지더군요. 이제는 나도 다시 일어서봐야죠.”

정은호가 말했다.

"자. 통장에 들어있는 건 통장에 들어있는 거고. 그래도 손에 만져봐야 현실감이 좀 들죠."

정은호가 뒷좌석에 있는 가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예요?"

"돈요. 5만원권 빳빳한 걸로 넣었습니다."

"얼마예요?"

"집에 가서 세 보세요."

정은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 못된 사람들 아닙니까? 돈을 그렇게 숨겨놓고 그쪽 아버지한테서 돈을 계속 뜯어낸 걸 보면. 그 생각을 하니까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들더라고요. 지금 오재광은 지명수배된 상탭니다. 그쪽 엄마도 집에 붙어있지는 못하게 되니까 사라져 버렸고요."

집 주소도 전부 공개돼버려서 그곳에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피해를 본 사람들이 엄청났다. 그 사람들이 오재광과 엄마를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오재광과 엄마가 재기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떻게 될까요?"

"땅이랑 건물들이 있으니까 그걸 팔아서 갚으면 빚을 털 수는 있겠죠. 이미 다 얼마씩 담보가 걸려있던 상태라 그렇게 하고 나면 현금은 거의 안 남을 겁니다. 처음에 원했던 대로 된 거예요. 자기들이 그동안 살아보지 않았던 삶을 경험하게 되겠죠."

정은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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