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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전에는 그렇게 못하시더니 쎄 지셨네요, 아버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중심을 못 잡으면 원경씨 기분이 어떻겠냐. 아들 딸린 이혼남인 걸로도 모잘라서 매번 전처한테 휘둘린다고 생각해봐라. 매력이 있겠나.”
원경씨가 누군가 하다가 아버지가 이제 과장님을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걸 알고 신기해했다.
“아들 딸린 이혼남요?”
아버지의 말에 내가 큰소리로 웃었다.
아버지도 웃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됐어. 내가 너무 무르게 굴어서 그 사람이 점점 그렇게 독해졌던 것 같아. 어쨌거나. 그렇게 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더라.”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내 잔을 비웠다.
“행복하시죠. 아버지?”
“응.”
아버지의 웃음이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이루어주고 싶었던 전부였다.
“근데 그 사람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보니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긴 해. 그래도 내가 남잔데. 내가 그 사람을 케어해 줘야 되는데, 하는 그런 생각. 지위상으로 여건상으로나 그게 충족이 안 되니까 속상할 때가 있어. 특히 회사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
나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회진을 할 때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선두에 서서 한 무리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뒤에 달고 돌아다니는 은 과장님의 모습을 보면 엄청난 위압감마저 느껴졌었다.
그때는 한 마디 말 붙여보기도 어려웠던 분이었는데 이제 그 분이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사람 일은 정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뛰어난, 그냥 우리 나라에서만 유명한 것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유능한 여자랑 사귀는 건 어떤 기분일지 잘 상상도 가지 않았고 아버지가 느끼는 부담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독립해서 사업을 시작해 보시면 어때요? 작은 규모로라도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그 일 해 오셔서 인맥도 있고 시장에 대한 이해도 있잖아요.”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품어왔던 생각을 꺼내보았다.
“그게 그렇게 쉬우면 내가 말도 안 하겠지.”
아버지가 말했다.
“최소한 검소하게 작은 규모로 시작하면 얼마 정도가 필요할 것 같으세요?”
“그래도 5억은 있어야겠지. 다른 돈은 여기저기서 내가 대출을 받든 투자를 받든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돈은 쥐고 시작을 해야할 거다.”
“그럼 해 보실래요, 아버지?”
“돈이 어디 있어서?”
아버지가 웃었다.
그러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임정우. 전에 내가 확실하게 말했다. 이제 아버지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방금 전에 그런 말을 한 건. 이제 너도 곧 직장에 다니게 될 거고 한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될 테고 너도 그런 상황들을 겪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한 거야. 더 이상은 너한테 도움받지 않을 거다. 언젠가는 너도 그런 고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고민 상담이나 좀 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냥 그런 거다.”
“그냥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아빠.”
“다 접어두고. 너한테 그만한 돈이 있다는 거야?”
“일이 동시에 여러 가지가 같이 풀렸어. 이쪽 저쪽에서. 같이 일해오던 출판사랑 장기간 독점 계약도 했고. 라인 업 되는 일본 소설들 번역해주는 걸로.”
“그걸로 얼마나 받았는데? 출판 시장 안 좋아서 독점계약이라고 해 봐야 얼마 안 될 텐데. 계약금이라고 해 봐야 천 만원도 안 되지 않아? 네가 버는 돈은 이제 너한테 써. 정우야. 그러기로 했잖아, 인마. 왜 다 끝난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해!”
“어쨌거나 훔친 돈도 아니고 그동안 내가 일하면서 모은 돈도 있고. 모아서 펀드에 넣어둔 돈이 수익이 많이 나기도 했고. 일일이 말하기는 귀찮으니까 그냥 믿으라고."
아버지도 내가 고액 과외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학생 수가 극단적으로 늘어나면 한 달에 1, 2천을 버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말이 전혀 신빙성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투자하는 건 괜찮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펀드에 투자하는 것보다 아버지한테 하겠다는 건데. 아버지도 어차피 이자 주고서 빌릴 거잖아. 그 이자를 나한테 주면 되지.”
“…….”
아버지는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아마 은 과장님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은 과장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것 같았다.
“나도 아빠가 은 과장님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아빠 영역에서 성과를 이뤄가는 걸 보고 싶어. 일단 하면 아빠는 정말 잘 할 거고. 나랑 은 과장님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진짜 열심히 할 거잖아. 그럴 거지?”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만.”
“그러면 그렇게 하기로 하는 거야.”
“정우야. 진짜 내가 그러자고 하는 게 맞는 건지…….”
“더이상은 나도 못 해줘, 아빠. 그러니까 아빠가 사업 성공해서 1, 2년 안에 빨리 갚으면 되겠네.”
“그게 마음먹은대로 된다면야.”
“아빠. 마음 편하게 받아. 응? 그렇게 하기로 하는 거야.”
“어휴. 하여간 너도 날 닮아서 마음이 여려서 큰일이다. 안타까운 일 당한 사람 보면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고.”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정말 나는 그런 면에서조차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아버지가 좋았고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닮았다고 말하면서 흐뭇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바빠졌다. 다른 어떤 때보다 활기가 느껴졌고 열정적인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작은 절차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고 직접 관여했다. 그때의 모습은 정말로 아버지다웠다. 그 모습이야말로 내가 알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고 아버지가 나 때문에 잃어버렸던 모습과 자리를 되찾은 것 같아서 만족스럽고 감격스러웠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급한 일이 아무리가 되면 은 과장님에게 청혼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나는 은 과장님에게 청혼할 때 쓸 반지를 내가 준비하겠다고 선수를 쳤다.
아버지와 은 과장님에게 그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가진 돈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투자하기로 한 돈은 내 돈에 두 달동안 붙는 이자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인정해 왔던 사람들을 스카웃했고 각 분야에 전문가를 앉히고서 그 사람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은 과장님의 인맥이 아버지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준영이의 아버지도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하더니 뜻밖의 사람들을 많이 소개해 줘서 아버지의 사업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궤도에 진입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서 나는 돈 냄새를 맡고 아버지를 찾아왔지만 아버지가 경찰을 부르자 도망쳤다. 지금 경찰서에 가서 좋을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엄마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경찰을 부르겠다는 경고도 없이 경찰을 불렀다. 다른 때는 그러지 않았다. 경찰을 부르겠다고 먼저 위협했고, 엄마는 아버지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그래 보라고 비웃었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부르르르 떨면서 화를 참는 것으로 끝이 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엄마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한 여자가에게 믿음직한 동반자가 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아버지를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정성껏 키운 딸을 시집보내놓고 손주까지 본 것처럼 흐뭇해졌다.
내 주위의 일들이 안정돼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끔 이연우가 궁금해졌다.
엄마와 오재광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이연우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쳤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연우는 자기가 살던 빌라 옥탑방과 오피스텔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곳에는 이제 새로운 입주인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