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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학교도 그만둔 마당이라 어디에서 이연우를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 전화를 빌려서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기는 거의 언제나 꺼져 있었다. 전화기를 분실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핫 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핫 걸은 내가 자신의 지위를 자꾸 이용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대신 수치플 하는 거 도와줄게요.”
“…….”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 침묵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정말요?’ 라는 거였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해보고 싶었던 거 있어요?”
“해보고 싶었던 건 전부 다 해 보게 해 줄 거예요?”
뭘 또 저렇게 의욕적으로 나오시나 하면서 나는, 일단 전부 다 해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고 말했다.
핫 걸은 자기가 부탁받은 일을 뒤로 미루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부탁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쩐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한테서 부탁받은 일은 빠르게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핫 걸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나한테 이연우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찾았어요. 상황이 별로 안 좋네요. 지금 그쪽이 어디에 있건 간에 바로 거기로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주소 찍어서 보낼게요. 일단 움직여요.”
번역 작업 중이었던 나는 컴퓨터도 끄지 못하고 곧바로 뛰어나갔다.
핫 걸이 저렇게 서두르는 걸 보면 이연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
이연우는 오랫동안 약한 바람조차 맞아보지 않은 채 살아왔었다.
그러다가 웬만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토네이드급 바람을 한 번에 맞은 것이다.
삼촌은 갑자기 연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디로든 도망쳐 있으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삼촌은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 건가 하고 물으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삼촌답지 않게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았다.
삼촌은 연우에게 근처 놀이터로 나오라고 했고 드디어 연우는 삼촌의 얼굴을 보게 됐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막상 삼촌의 얼굴을 보게 됐을 때는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삼촌은 며칠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알콜 중독자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연우의 명의로 돼 있는 재산을 처분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벽에 부딪쳤다. 거기에도 복잡하게 담보가 설정돼 있어서, 숨어다니는 처지로 절차를 진행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삼촌은 연우의 집에 있는 것 중에 쉽게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을 처분해서 돈을 만들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채업자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가 안에 있는 물건들을 임의로 정리를 하고 세입자를 구해 보증금과 월세를 챙긴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오재광이 앞으로 나서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하루 아침에 자기도 모르는 빚이 생겼는데 그 사채업자는 자기라면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을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오재광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화기를 켰을 때, 그때까지도 흥분한 사람들의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었다.
오재광은 자기한테 생겨난 채무도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최우선 순위로 그것을 먼저 처리했을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전날 입금된 내역을 확인할 것이 있어 그 계좌의 잔고를 봤을 때였다.
처음에는 뭔가 전산상의 오류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기 주위의 댐이 일순간에 터져버리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돈이 없었다.
계좌가 비어 있었다.
한 두 개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재광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자기가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변호사를 불러들이고 자기가 아는 전문가들을 모았다.
그러나 유능한 의사도 시체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는 것처럼 그들은 모든 시도를 포기했다.
오재광이 얼마나 탐욕스럽게 살아왔는지 알던 사람들은, 오재광의 계좌에서 돈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듣고 이 인간이 하다하다 이제 자기들한테까지 사기를 치려고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오재광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돈을 어디 다른 데로 옮겨놓고 미친 놈처럼, 자기 계좌에서 돈이 전부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자료를 선뜻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재광이야말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도움을 받으려면 까야되는데 까기에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 그동안 이어왔던 온갖 불법적인 거래의 기록이 거기에 전부 담겨 있었다. 오재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골든 타임을 놓쳤다.
그 후로는 터져버리기 시작한 댐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다.
전 같았으면 자기한테 감히 말을 붙여보지도 못했을 사람들이 돈을 내 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자기가 가진 돈으로 벌어들이는 하루 이자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독촉을 해대는데 그걸 갚을 수가 없었다.
기가 차고 미칠 노릇이었다.
연우 명의의 것들은 아직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연우를 만나러 왔지만 그마저도 이미 처분이 제한된 걸 알고 오재광은 그곳에서 더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도 않았다.
연우는 자기가 기댈 수 있는 사람과 연락이 차단된 상태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 이틀 동안은 학교에 나갔다.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언제나 그랬듯이 삼촌이 모든 일을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삼촌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고 연우가 빌라 옥탑방에 갔을 때 문이 억지로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그 안에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다.
오피스텔에는 가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잘 한 일이었다.
연우는 아침에 나올 때 들고 나왔던 가방과 입고 나왔던 옷 말고 아무 것도 건지지 못했다. 옷을 가져오겠다고 집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연우의 집을 점령하고 있던 사람들은 오재광이 수많은 사기 사건으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들이 먼저 피해액을 회수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연우에게는 3백만원 정도가 들어있는 통장이 있었지만 그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다섯 개의 카드로 긁고 그것도 모자라면 삼촌에게 말만 하면 됐었기에 연우는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도, 모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집에는 들어갈 수 없고 삼촌과 연락도 닿지 않는 상태에서 연우는 삼촌 집으로 내려갔었다. 그리고 그 집이 모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삼촌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면서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하고 있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고 삼촌이 정성스럽게 가꾸던 정원은 완전히 짓밟혀 있었다.
열린 대문 틈으로 정원이 보였다. 몇 그루의 나무가, 가지가 찢긴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연우는 그걸 보는 순간 바로 도망쳤다.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자기가 그 신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우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한 채 집 근처로 돌아왔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은 모텔에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바 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당장 숙식을 해결하고나면 남는 것도 없이 끝이었다.
그러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언제까지 모텔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다.
연우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려고 학교에 갔다가 겨우 삼만원인가를 빌려 지갑에 넣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울었다.
갑자기 어쩌다가 자기가 자신의 삶에서 튕겨진 건지, 연우는 그때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