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웹 MK-79화 (7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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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

“한 2천 정도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

연우는 이제 아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2천이라니. 잘 아는 금액이지 않겠는가.

조금 있으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돈을 많이 쓰게 해서…. 그 선배한테만 안 줬어도 2천만원은 가지고 있는 거였는데 그랬네요.”

“그래서 말인데.”

“네?”

연우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이라도 먼저 갚아줄 수 없을까?”

나는 때마침 나타나는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연우는 차 밑에 싱크홀을 만들어버릴 기세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그러고 싶은데….”

“내가 방법을 생각해 봤거든.”

나는 차를 세워놓고 뒤에 있던 종이 가방을 연우에게 주었다.

연우는 이게 뭐냐고 물었다.

“이걸 줄 테니까 돈을 먼저 갚아.”

“이게…. 뭔데요?”

연우는 정신없이 가방 안을 살폈다.

그러고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행 털었어요?”

연우는 빨리 사실대로 털어놓으라는 듯이 말했다.

“어우우. 아니야아. 소심해서 나는 그런 짓 못해."

"그럼 이걸 어디서 난 거예요?"

"나한테 빚을 진 애가 있었는데 오늘 갚더라고.”

“이게 얼만데요?”

“5천만원.”

“그럼 됐네요?”

연우가 눈을 빛냈다.

“이걸로 거기에 투자하면 되잖아요!!”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다 농담이었다고 말했고, 그 돈은 그냥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쓰라고 했다.

“아참. 거기에서 2천만원은 빼야돼. 그건 내 돈이니까.”

“그럼 3천만원은 내 돈이예요?”

연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어쨌거나 연우는 그 가방에 있는 돈으로 2천만원을 갚았고 차용증을 회수했다.

그 알록달록한 귀여운 차용증은 폐기되었다.

그 날 저녁.

준영이의 과외를 마치고 내가 연우의 집에 갔을 때 연우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갈아입을 옷 몇 벌을 아예 연우의 집에 가져다 두고 연우의 집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번역 작업을 하기도 하고 수업 준비를 하기도 했다.

연우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겠다고 나를 부러워했다. 연우는 과외도 할 수 없었고 번역을 할 수도 없었다. 만약에 겨우겨우 과외 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한 시간도 안 돼서 실력이 들통나서 잘릴 거라고 연우 스스로가 말하곤 했다.

그래도 알바를 하려고 꾸준히 알아보고 있었는데 그중에 피팅 모델이나 사진 모델을 해보려고 지원을 해서 일자리를 구했다는데 그건 나에 의해서 커트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작업을 빙자해서 연우의 몸을 노골적으로 보는 건 싫었다.

연우는 나한테서 받는 생활비를 줄이고 등록금과 생활비 일부라도 자기가 보태보려고 조바심을 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누차 말해 주었다. 그래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럼 요리를 배워서 식사를 여기에서 해결할 수 있게 해 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연우는 의지를 불태우며 눈을 빛냈다.

몇 번 요리와 전자레인지 뿐만 아니라 집까지 불태워 버릴 뻔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 실수를 경험삼아서 점차 실수하는 횟수를 획기적으로 줄여나가고 있었다.

아직은 맛을 논할 단계는 아니다.

익혔다는 것에 두 사람이 감격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수준일 뿐.

나는 연우가 양배추 찜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내심 불안해서 아예 식탁으로 노트북을 옮겨놓고 앉아서 감시를 하기 시작했다.

왠지 30분 후에 내 눈 앞에, 새까맣게 탄 냄비와 그 위에서 까맣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막 솟구쳤기 때문이다.

연우는 자기가 알람을 설정해 놓고 정해진 시간에 불을 끌 거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정해진 시간에 불을 꺼야 한다는 것에 너무 집중을 했는지 연우는 찜통 안에 물을 미리 조금은 부어놔야 한다는 걸 잊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나한테 방에 들어가서 집중해서 끝내놓고 나오라고 닦달을 해서 결국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참사가 일어난 걸 깨달았을 때의 광경은 굉장했다.

뭔가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원두를 볶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냄새에 밖으로 나왔을 때 연우는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자기 뒤로 스모그 효과를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뒤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르고 식탁에 앉아서 반죽을 하고 있었다.

“이연우!!”

결과는 내가 처음에 상상했던 것보다는 양호했지만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결과였다.

주방으로 달려가던 나.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던 연우.

뚜껑을 열었을 때 촤아아아아 하고 피어오르던 화난 열기.

어떡해!! 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자기 얼굴만 두 손으로 감싸고 뛰어다니던 연우.

가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때는 별 것 아닌 일로 웃고 즐거워하고, 내 마음에 순수함도 많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타인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한 사람인 것 같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불안해 하고, 다른 사람의 변심으로 상처받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거리를 두고, 이별을 선고받기 전에 내가 먼저 준비하고 있다가 마음을 회수하는 건 고쳐지지 않는 마음의 병 같았다.

그래도 연우와는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오랫동안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다. 내가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연우의 도움이 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연우와 함께하는 동안 내가 많은 인간적인 좋은 감정을 경험했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일이고 그 점에서 나는 지금도 내가 연우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연우와의 관계에서 화염처럼 불타올랐던 열정이 조금씩 사그라들 즈음 나는 내 원룸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매일 안부를 챙겼고 갑자기 연우가 미칠 듯이 보고 싶어지면 연우를 보러 갔다.

연우는 그때마다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밥은 먹었냐고 묻고, 내 어깨에 앉은 먼지를 털어주고 내 옷의 주름을 손날로 탁탁 펴주기도 했다. 정말로 그때 내 어깨에 먼지가 앉아있었는지, 내 옷에 주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연우는 그런 보살피는 손길로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내가 이제 자주 그곳에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연우에게 먼저 설명했다.

나에게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더이상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는 못할 거고 영원히 어떤 한 사람에게 정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연우는 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사귀라고 말을 했을 때는 나를 노려 보았다.

그 후로 연우에게는 다른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가끔 연우가 있는 곳에 가 보았다.

학교나, 나중에는 회사에도.

그리고 한참동안 멀리서 연우를 보다가 돌아왔다.

연우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으면 이제 더이상 연우를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연우는 외로운 섬처럼 사람들 사이에 떠 있을뿐 누구에게도 깊이 물들어가지 않았다. 연우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연우는 사람들이 친해지고 싶어하고 다가가고 싶어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연우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공간적인 의미의 '옆자리'가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의 '옆자리'는 늘 비워져 있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걸어가고 있어도 연우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대화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연우는 내 앞에서도 환한 웃음을 짓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연우가 나에게 지어보이는 웃음의 절반이라도 구경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입이 작은 연우가 최선을 다 해 벌린 것이 내 페니스를 겨우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던 것처럼 연우가 내게 보인 웃음은 매번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런 순간에조차 이런 썩은 비유를 하는 나란 인간. 썩은 인간...)

내가 다시 찾아가 연우를 안으면 연우에게서는 내가 떠날 때 남겼던 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 사이의 공백이 길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엄마로 대변된 '여자'라는 종족의 이미지를 바꿔주었다.

너무 투명하고 맑은 유리같아서 깨뜨리고 싶고 더럽히고 싶었던 처음의 욕망은, 연우의 순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에게 연우를 맡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하지만 웬만해서는 나한테 화를 내는 일이 없던 연우가, 그럴 때는 화를 냈다. 여러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맹렬히 나를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다. 노려보는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나는 연우를 안지도 않은 채 연우의 입술을 물어뜯을 정도로 탐욕스럽게 키스하며 다시 연우에게 나를 새겨넣었다.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말할 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내 눈이 나를 속이고 나 조차도 모르게 연우에게 건넸던 말은,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우는 탐욕스럽고 허물많은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주었다. 내 섬이었고 내 바다였고 내 구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모두로 연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 비가 와선지 내 감성이 폭발하는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연우 챕터 끝.

연우한테 애정들을 가져주셔서 급 분량이 늘어난 케이스입니다.ㅎ

이제 다시 원래의 패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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