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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웹 MK-89화 (8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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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피드

우리는 돌아가기로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각에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 은수 형이 그 시간을 너무 좋아하고 있었고 그런 은수 형을 보면서 은호 형도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속시켜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였다.

“정우야. 너. 오늘 일찍 가서 해야 되는 일 없어?”

은호 형이 미안해하면서 물었다.

“뭐. 내일 해도 되고요.”

대대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은호 형이 내게 묻는 말을 듣고 은수 형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내 대답을 듣고서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잘 됐다고 말했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그동안 그렇게 말도 못했던 거라는 걸 생각하니까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두 사람을 확실히 연결해 줘야겠다는 대단한 사명감이 들었다.

대대장이 다시 돌아와 부족한 게 없는지 재차 물었다.

“먹을 건 많은데 재미가 없네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재밌게 놀죠.”

거기에 있는 네 사람 중에, 대대장에게 실수를 해도 데미지를 가장 적게 입을 사람인 내가 얘기를 주도했다.

내가 그렇게 대담하게 말하자 은수 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대대장은 재미가 없었다니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내 말을 전부 다 받아주었다.

"뭘해야 재미있을까요? 작전과장, 재미없으시다잖아. 좋은 생각 없어?"

"예? 아."

대대장까지 그렇게 말하자 은수 형은 땀만 더욱 흘려댔다.

“왕 게임 하죠. 왕 게임. 누나.”

“누나?”

은호 형이 놀란 얼굴로 말했고 은수 형은 아예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누나?”

대대장조차도 그렇게 말했다.

“젊은 동생 생겨서 좋네.”

대대장은 곧 호탕하게 웃었다.

은수 형은 맛이 살짝 간 것 같은 ‘아는 동생’ 때문에 순간 좆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가 대대장이 웃어주니 그제야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왕 게임이, 왕이 시키는 건 다 하는 그거 맞아요?”

대대장이 물었다.

“네.”

“왕은 어떻게 정해요?”

“어떻게 정할까요?”

내가 묻자 그때까지 조용하던 은호 형이 입을 열었다.

“술병 돌리죠. 돌려서 주둥이가 멈추면 그쪽에 앉아있던 사람이 왕 되는 걸로 해요.”

“네. 좋아요. 재밌겠네요.”

대대장은 좋아했고 은수 형은 점점 긴장하는 얼굴이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게임 시작하기에 앞서서 화장실 갔다 올 사람은 화장실 갔다 옵시다.”

은호 형이 의욕적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내가 가만히 앉아있는 걸 보고 고갯짓을 했다.

“전 안 마려워요. 아까 쌌어요.”

“그러다가 중간에 일어나서 분위기 망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여고생처럼 뭘 화장실을 같이 가재.”

그러면서도 일어나서 따라갔더니 은호 형이 주방을 기웃거리더니 냉장고에 붙어있는 자석을 스윽 떼서 주머니에 넣었다.

“정우야. 몸에 쇠조각 같은 거 없냐?”

“쇠조각을 몸에 왜 가지고 다녀요?”

라고 했는데 내 옷에 붙어있는 쇠조각.

은호 형은 그걸 억지로 떼냈다.

“아. 잘 붙어있는 걸 왜 떼요! 이 옷의 생명인데!”

내가 징징거리건 말건 상관도 않고 은호 형은 비어있던 술병에 방금 내 옷에서 뗀 쇠조각을 넣었다.

“자력이 충분할지 모르겠네. 내가 너 왕 만들어 줄 테니까 잘 해 봐. 알았어? 그런 거 잘 할 수 있지?”

“어떤 거요?”

“둘이 잘 되게 해 보라고. 술도 좀 취하게 해 놓고.”

“아….”

나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라고 할 틈도 없이 형은 쉬잉 가 버렸다.

그리고 막중한 사명이 나에게 떨어졌다.

자력은 시원찮았고 은호형은 매번 욕을 하면서 자석을 상 밑에서 움직였다.

술병은 한 곳에 멈췄다가도 당구공이 굴러가는 것처럼 한 바퀴, 한 바퀴 무거운 몸을 굴리듯이 데굴데굴 굴러서 나한테 오곤 했다.

“자아. 또오! 제가 왕이네요.”

초반에는 대대장에 술을 먹이는데 집중을 했다.

대대장은 정말로 술이 셌다.

은수 형한테도 먹였다.

그러면 대대장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작전과장은 술이 약하다며 은수 형의 흑기사를 자청해 주었다.

아무리 술이 세도 대대장도 인간이었고 취기가 오르는 게 보였다.

술은 이 정도 먹여놨으면 됐다고 생각하고 나는 수위를 조금 올렸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눈 감고 뽀뽀하기를 시켰다.

거리를 잘 봐 두었다가 정확히 입술에 뽀뽀를 해야 한다고 하자 대대장은 처음부터 수위가 너무 세다고 하면서도 곧장 시행을 했다.

“5초이상은 대고 있어야 돼요.”

은수 형과 대대장이 키스를 하고 나서 분위기는 싸해졌다.

대대장은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떻게 나만 계속해서 왕이 될 수 있냐고 물었다.

“그게요. 이상한 것 같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거든요. 몬테카를로의 오류 라는것도 있잖아요. 실전에서 확률은 무의미하죠.”

은호 형이 말했다. 대대장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몬테카를로 오류요?”

내가 물었다. 몰라서 물은 건 아니고 은호 형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려고 한 것 뿐이다. 진짜로.

“몬테카를로 카지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데 룰렛 게임에서 구슬이 계속해서 검은 색 숫자에만 떨어졌어. 여섯 번, 일곱 번, 반복해서 검은 색 숫자에만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한 거지. 이제는 붉은 색 숫자 위에 떨어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 후에도 구슬은 계속 검은 색 숫자 위로만 떨어진 거야. 이번에는 진짜 붉은 색 위로 떨어질 때가 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돈을 걸었는데 그 후로도 계속해서 검은 색 숫자에만 떨어진 거야. 이번엔 진짜다. 이번엔 진짜로 붉은 색 숫자 위에 떨어질 때가 됐다고 사람들이 붉은 색에 베팅을 해댔는데 27번째가 될 때까지 계속 검은 색 숫자에만 떨어진 거지. 사람들은 돈을 거의 탕진했고.”

“아아.”

웬 먼나라 카지노 얘기까지 나오자 대대장은 수긍하는 것 같은 기미를 보였다.

몬테카를로에는 사기꾼이 없었겠지만 그곳에는 사기꾼이 있어서 스물 일곱 번이 아니라 270번이 지나도 왕은 나만 해 먹게 생겼다.

하지만 이 훌륭한 왕은 계속 선정을 베풀고 그동안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던 노처녀와 노총각의 육욕(?)을 풀게 해 주어 후대에 길이길이 그 이름이 빛나는*&^%##%^&

쿠당,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그건 내 머리가 테이블에 떨어지는 소리였고 내가 꽐라가 돼서 바닥에 쓰러질 때쯤엔 은호 형도 벌써 취해 잠이 들어 있었다.

다만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두 사람만이 왕의 명령이 없는데도 열정적으로 물고 빨고 핥아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선왕으로 길이길이 칭송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은수 형의 아파트에 있었다.

새벽에 잠이 깬 은수 형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우리를 전부 수거해 택시를 타고 아파트로 데려간 것이다.

은수 형은 완벽한 블랙 아웃을 경험했다.

“정우씨. 정우씨. 일어나봐. 우리. 실수 안 했지?”

은수 형은 정신이 든 후부터 쉬지 않고 걱정을 했다.

“네. 별로요.”

“진짜지? 걱정할 일은 없었던 거지?”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첫날밤에 자기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들킬까봐 조바심 내는 새색시보다 더 걱정을 했다.

“네. 진짜 아무 일 없었어요. 우리 전부다 얌전하게 술만 마셨어요.”

은수 형이 술이 진짜 약하기는 약한 모양이었다.

은수 형이 걱정을 하면서 출근을 서두르는 걸 보며 우리도 같이 은수 형의 아파트를 나섰다.

은호 형은 술이 깨도록 조금 더 있다가 가야 될 것 같다고 했고 우리는 해장을 하러 한 국밥집에 들어갔다.

은호 형은 밥은 먹는둥 마는둥 하고 슬쩍 눈을 감더니 그대로 등을 뒤에 기대고 잠을 청했다.

나는 이제 대대장의 영상은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수 형이 좋아하는사람 영상을 내가 계속해서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내 머릿속에 갑자기 든 생각은, 대대장의 영상은 다른 영상과 달랐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영상들은 그때까지 본인이 스스로 찍은 거라서 본인이 직접 각도를 맞추기도 했고 카메라를 끄러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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