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웹 MK-112화 (112/402)

0112 ----------------------------------------------

내 인생의 보스몹

“저는 형을 믿으니까요.”

“이 자식 봐라. 이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내 탓 했을 놈이네.”

은호 형은 누군가가 내 뒷조사를 했다는 말에 긴장을 한 것 같았다.

“키샤에서 해 준 말도 있고요. 형이 일을 맡으면 확실하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키샤 요원들도 은퇴하면 형한테 일을 맡기고 싶어한대요.”

“병신들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개새끼들. 누가 해 준대? 아. 그냥 해 줄까? 완전히 온 천하에 다 드러나게 까발려서. 크크크크.”

단순한 형은 또 혼자 희한한 상상을 하고 급 즐거워진 모양이었다.

그 날로 우리는 새 프로젝트를 위해서 의기투합했다.

아버지도 거기에 끼워줄까 고민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그러다보면 나한테 갑자기 생긴 돈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설명할 수밖에 없게 돼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제외했다.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양심을 지닌 분이기 때문에 내가 오재광의 돈을 뺏은 걸 알면 엄청난 갈등을 일으킬 거라는 걸 의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수없이 많을 테니까 너무 죄송하게 생각할 건 없다고 은호 형이 말했다.

우리는 새 사업에 필요한 컨소시엄을 꾸리기 위해 업체 선정을 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했다.

거기다가 일본 출장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어서 그야말로 바쁜 나날이었다…라는 건 형 얘기고, 나는 쥐뿔도 모르는데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형이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거의 전부였다.

나는 내가 머리가 나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지만 형을 보다보니 나는 정말 머리가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형에 비하면 나는 생각도, 시각도 편협했다. 그 방면으로 경험한 것도 거의 없고 아는 게 없으니 스펙트럼이 다양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형은 달랐다.

형은 사람들을 적재 적소에 두고 굴렸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 순간 보면 사람들은 형이 의도했던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한테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는 재주도 기가 막혔다.

형은 내가 오재광에게서 얻은 돈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었다. 오재광의 돈도 은호 형이 아니었으면 내가 가질 수 없었을 테니 천 억을 갖겠냐고 형을 고르겠냐고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음, 아니, 약간 주저하기는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고민을 빠르게 마치고 은호 형을 선택하게 될 것 같았다.

형은 어. 그러니까.

베트맨의 집사?

그런 사람 같았다.

형이 있으면 나는 굳이 따로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형은, 그 일을 추진하는데 내 역할이 크다고 해 주었다.

사업자 선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공단 측에서 각 항목에 점수 배분을 어떻게 하는지에서부터 시작해서 그쪽에서 가장 문제삼는 마이너스 요소가 뭔지, 그런 정보들을 내가 이사장에게 빨대를 꽂아서 알아낼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건 나한테 이제 껌이었다.

몇 번 이사장을 불시에 찾아가서 그 앞에서 이, 삼십 분 정도 머물다가 오기만 해도 이사장은 겁을 먹었다.

이사장의 앞에서 내가 하고 오는 일은 별 게 아니었다.

나도 멋있게 머리를 쓰고 내 능력을 발휘해서 굴복시키고 싶었지만 아직 그럴 깜냥은 안 됐고 그냥 내 무력을 과시하는 걸로 이사장의 저항 의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 뿐이었다.

부끄럽지만 이게 현재의 내 포지션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래도 2, 3년 은호 형 옆에서 잘 배우다보면 나도 나중에는 꽤 성장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은호 형에게도 완전히 낯선 영역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한 컨소시엄을 꾸리기 위해서 우리쪽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 업체 몇 곳이 있었다.

우리가 사업자로 선정된다면 전국적으로 2천여개에 달하는 판매점을 개설하고 물류 배송 문제까지 해결 해야 했는데 배송 문제를 위해서 그 분야를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었다. 그보다는 이미 그 일을 해 오고 있던, 그 방면의 베테랑을 끌어들이는 게 어느 모로 보나 이익이었는데 메리트가 있는 곳에서는 우리와 컨소시엄을 같이 꾸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업계의 공룡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출사표를 낸 상황이라 사람들은 새로 선정될 사업자가 그 중에서 나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되지도 않을 일에 쓸데없는 비용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사업자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말을 해 봐도 경력도 없는 신인이 내미는 손을 선뜻 마주 잡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끙끙거리다고 있는데 은수 형이 은호 형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왔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은호 형은 그 이야기를 했고 은수 형은 우리에게 한 번 놀러오라고 말했다.

우리가 찍어두었던 업체 본사가 강원도에 있었는데 자기가 개인적으로 만남을 주선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걸 그냥 은수 형이 혼자서 끝까지 추진하기로 했다면 별다른 성과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대장이 그 일에 나서면서 움직이는 스케일이 달라졌다.

대대장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움직였다.

대대장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접촉하려고 했던 업체의 부사장이 이지도 대대장과 군생활을 같이 했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이지도 대대장이 한 번 나서면 이런 저런 식으로 이지도 대대장과 연결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지도 대대장이 중대장이었을 때 그 중대의 중대원이었던 사람도 있었고 아들이 이지도 중령의 관사병으로 있다가 전역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지도 중령은 자기 자리에서 성실했을 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엄청난 인맥을 관리해 놓은 것이 되었고 이지도 중령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우리 회사에 그쪽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막 일어서서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고 비틀거리는 회사기는 했지만 이지도 중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고 자금력도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몇 몇 사람들이 우리 일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우리가 컨소시엄을 전부 꾸렸을 때는 처음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은수 형과 이지도 대대장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내가 우리 컨소시엄을 공단 이사장에게 설명했을 때 이사장도 놀랐을 정도였다.

이사장은 내가 하는 말을 어느 정도 들어주는 척 하면서도 내가 초반에 여러 문제에 부딪쳐서 스스로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일을 해 보는 것도 처음이고 아직 새파랗게 어린 놈이 돈만 가지고 뛰어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은호 형과 대대장을 등에 업고 그 일에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출장 일정이 다가왔고 우리는 마침내 오랜 준비 끝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은호 형도 나도, 귀찮은 일은 먼저 끝내버리자는 주의여서 우리는 초반에 일정을 빡빡하게 잡았다.

그렇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돌아다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접대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한 업체에서는 우리가 어느 호텔에 묶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 떠날 건지 알려주면 자기들이 공항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냥 단순히 친절을 베푸는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홀랑 우리 일정을 말하려고 하자 은호 형이 헛기침을 크게 하고 나를 제지했다.

“너는 내가 하는 말만 통역하면 돼.”

치.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내가 말해도 되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은호 형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나중에 나하고 둘이 남게 됐을 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저쪽에서는 우리가 정한 마지노선이 어느 선인지 궁금한 상황이야. 저쪽에서는 우리가 언제까지 협상을 끝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은 거라고. 우리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알게 되면 그때까지 지지부진하게 일을 끌어가다가 나중에 우리를 다급하게 몰아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복잡한가 하면서도 사람들이 서로의 마지노선을 알아내기 위해서 머리 싸움을 하는 게 점점 재미있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