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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이얼 아이템
지영은 도중에 한 번 더 통증이 찾아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정우는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임무를 마치고 외국에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질문을 아끼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하지 못할 말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정우는 지영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하러 갔던 일이 잘 안 됐던 모양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나중에 연락을 해서 술이나 한 잔 사든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조용히 차만 운전해서 지영을 집으로 데려다 준 것이다.
지영은 정우가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가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은 과장이 근무하는 병원이었다.
지영은 은 과장에게 자신이 누구라는 걸 밝혔다.
키샤의 요원이라는 것까지 말하지는 못했고 정우와 친분이 있다는 정도로만 말했다.
은 과장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지영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앞으로 잘 봐 달라는 의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영도 은 과장이 자기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안 것 같았다.
지영은, 혹시 자기 몸에서 종양 같은 안 좋은 게 발견되면 정우에게 알려줘도 된다고 말했다. 은 과장은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영이 검사를 받으러 간 동안 은 과장은 서지영의 기록을 보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서지영이 정우에 대한 얘기를 한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두 사람이 사귀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은 과장은 연우와 정우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우가 왜 미국으로 떠났는지도 알고 있었다.
연우는 미국에서 근무하겠다고 자원했다.
정우의 아버지 역시 연우와 정우가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그곳에 연우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연고도 없는 곳에 여자 혼자 가면 외로움이나 다른 애로사항이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설득을 했다.
하지만 연우는 꼭 자기가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은 과장은 연우에게 말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연우를 불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연우는 그 나이 여자답지 않은 깊은 눈빛을 하고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연우는 정우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한 사람에게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우는 처음부터 연우에게 그렇게 말을 했었고 연우는 자기가 그것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우와의 관계가 너무 좋아진 요즘, 이 순간이 계속 이어지기를 자꾸만 바라게 된다고 말했다.
“바쁜 일이나 다른 일이 있으면 오빠가 저한테 오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오빠가 왜 오지 않는 건지 자꾸 신경이 쓰여요.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오빠가 오는 건가 해서 달려가 보게 되고요. 오늘은 못 오는 모양이니까 그냥 편하게 있자고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어느 샌가 또 오빠 생각을 하고 불안해하게 돼요. 지금 오빠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고 오빠가 나한테 올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자꾸 그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오빠랑 멀리 떨어져 있으면, 오빠가 저한테 오지 못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으니까 그게 더 쉽지 않을까, 견디기가…. 시간이 지나면 제 마음도 좀 단단해지겠죠. 여유있게 오빠를 대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런데 지금은 오빠한테 너무 집중하게 돼 버려서…. 자꾸 상처받게 될 것 같아요. 이러다가는 오빠한테 괜히 서운한 마음을 품게 될 것 같고 제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런 말로 저희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런 일을 벌이게 될 것 같아서, 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서 잠깐 도망치려는 거예요. 오빠는. 오빠의 인간관계는 그냥 원 아웃 체인지거든요. 쓰리 아웃도 아니예요. 한 번 실수해도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남는 그런 게 아니예요. 한 번 실수하면 오빠는 그 사람, 다시 안 보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연우는 힘없이 웃었었다.
"그렇게 될까봐서 겁이 나요. 제가 너무 예민해지는 바람에 실수할까봐. 그래서 저한테 질려버리게 만들까봐서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점점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오빠랑 같이 있는 시간이 행복해지니까 그 시간이 계속됐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자꾸 옭아매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오빠는 그런 것 못 참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다가. 아무래도 이게 최선일 것 같아서 그래요. 그게 저도 지키고 오빠도 놓치지 않는 방법일 것 같아서요."
연우는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힘겹게 이어나갔다.
은 과장은 연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연우를 향한 정우의 감정은 진실됐지만 정우는 한 사람에게 저의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사랑하게 된 연우야말로 안타깝다고 생각했고, 그 연우가 정우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서 미국으로 도피하겠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연우는 자기가 그런 이유로 미국으로 간 거라는 사실을 오빠한테 말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정우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우가 그곳에서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체류하게 될 거라는 것도 모른 채 정우는 연우가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1주일 단위, 한 달 단위의 그리움을 소모해 가면서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서지영이라니.
은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우를 긴장시킨 정우의 다른 여자인 건가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결과가 나왔다.
은 과장은 스캔된 영상을 확인했다.
…암.
췌장에서 시작된 것이 폐와 림프관에도 전이되어 있었다.
은 과장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고 한숨을 쉬었다.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했지만 은 과장은 머릿속이 갑자기 분주해지는 바람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신은 곧 죽을 거라는 말을 전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정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된 사람이었다.
은 과장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대신 말해주겠다고 말했지만 은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지영에게 말했다.
길어야, 앞으로 한 달이라는 말을.
서지영은 선고를 듣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은 과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조사에 협조해 준 사람에게 의례적인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지영은 그곳을 떠났다.
은 과장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서지영이라는 여자를 아는지 물었다.
정우는 안다고 말했고 지금까지 여러 모로 크게 도움을 받아왔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 과장이 왜 그것을 묻는지 궁금해했다.
은 과장은 정우에게 자기가 알게 된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앞으로 한 달….
정우는 그 말을 되뇌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러면. 그러면 안 돼요…!!!”
오히려 서지영은 담담했지만 정우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 돼요! 그렇게는 안 되는 거예요!”
은 과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지영이 차라리 다른 병원으로 갔었다면, 그래서 그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일을 자기가 피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은 과장은 서지영이 처음 자기를 찾아와서, 자기 몸에서 좋지 않은 게 발견되면 정우에게 말해도 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정우의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은과장의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게다가 정우가 보인 반응을 보면 서지영의 감정이 일방적인 감정도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
창 밖을 보면서 은 과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되어버려서 다른 어떤 때보다도 죄책감이 크게 일었다.
***
은 과장님의 연락을 받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이십 여 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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