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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이얼 아이템
나는 서지영이 쉬고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서지영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잠들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 한 번 더 찍어봐요. 오진일 수도 있잖아요. 판독을 잘못했을 수도 있는 거고요.”
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헛된 희망을 갖고 거기에 기대를 걸었다가 다시 추락하게 될까봐 겁이 나긴 해요. 다시 떨어지기 위해서 올라가고 싶지는 않거든요.”
서지영이 말했다.
"그런 멍청한 소리가 어딨어요!"
“그래도. 아프지는 않아서 다행이예요. 내 몸은 참 둔한가 봐요. 내 몸이 민감하게 미리 반응을 보였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알았겠죠. 그럼 거기에 대처할 수도 있었을 거고.”
“다시 찍어보자고요. 그래줄 수는 있잖아요.”
서지영은 고개를 젓지도, 싫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고집을 부리기는 했다.
무슨 고집을 그렇게 부리는 거냐고 내가 화를 내자 서지영이 말했다.
“오진일 수도 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오진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요.”
무슨 그런 멍청한 말이 있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서지영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서지영은 자기가 적은 버킷 리스트를 보여 주었다.
서지영은 역시 핫 걸이었다.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핫 걸.
자기가 해 보고 싶었던 온갖 수치플들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가장 쉬운 건 골든이었다.
내 오줌을 받아먹고 싶다는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핫 걸과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하더라도 나는 핫 걸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핫 걸의 버킷 리스트. (아마도 실행이 용이한 것부터 적은 것 같았다.)
1. 골든
2. 야외플 (비오는 날 사람 없는 공원에서)
3. 귀갑묶기를 극한으로 하고 섹스
4. 전에 해줬던 얘기대로 지하철에서
그걸 보고 느낀 점은.
대략난감.
“나아요. 나으면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내가 말하자 핫 걸은 참아두었던 화를 그 시점에서 냈다.
아니. 왜 그 부분에서 화를 내냐고요.
"이건 버킷 리스트라고요!! 알았어요?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것들이라고요!!"
“알았어요. 해 줄게요. 다 해 줄 거예요. 정말로. 약속할게요.”
나는 땀이 삐질삐질 나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약속만으로는 안 돼요. 확인서를 쓰던가.”
공증 받으러 갈 기세네.
어쨌거나 나는 확인서를 쓰고 서명을 하고 지장까지 찍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검사를 받으러 가기로 하고 핫 걸을 재워주었다.
핫 걸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내 품에 누워서 잠이 들었고 나는 핫 걸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아침에 핫 걸은 이불 속에 늦게까지 누워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 한 시가 다 될 때까지 잠을 잤다.
키샤에서는 난리가 났다.
핫 걸의 잠수에 이 인간이 드디어 미친 건가,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핫 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필 실장이 손수 전화를 걸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됐을 텐데.
핫 걸은 더 이상 자기가 실장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고 실장에게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퍼부었다.
“이 대머리 돼지 변태 새끼야! 너! 내가 지나갈 때마다 내 다리 훔쳐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확 머리카락을 남김없이 다 뽑아버리려다가 참은 게 몇 번인 줄 알아? 너. 내가 좋은 말로 말하는데.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전화하지 말라고!!!”
누가 보면 스토커가 스토킹 짓 하다가 경고를 받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만한 상황이었다.
실장은 그냥, 왜 안 나오는 거냐고 물으려고, 거기에다가 더해서 호되게 꾸중을 하려고 전화를 한 것 뿐이었다가 봉변을 당했다.
나는 핫 걸을 말리려고 했지만 핫 걸은 내가 전화기를 뺏으려고 할 때마다 나를 피하면서 결국 자기가 할 소리를 다 해 버렸다.
“…….”
나는 다른 병원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은 과장님이 있는 곳이어야 결과를 보다 빨리 알 수 있고 순서도 앞당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은 과장님의 병원으로 핫 걸을 데리고 갔다.
은 과장님은 핫 걸이 하루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다시 검사를 받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은 과장님을 설득했다.
다른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그냥 검사만 다시 한 번 받게 해 달라고 하자 은 과장님도 결국 받아들였다.
나는 그 후에 어떤 일이 생긴 건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렸을 것이다.
하루만에 몸에서 암세포가 전부 사라진 것을 믿지못한 채로.
그리고 그들은 환자에게 분명히 희소식이 될 그 소식을 섣불리 전했다가 다시 또 환자에게 깊은 절망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 더 정밀한 검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내가 생각한대로였다.
핫 걸의 몸에서는 암세포가 사라졌다.
과장님이야말로 놀라워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디나이얼 아이템의 효과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예상했다.
디나이얼 아이템은, 영상에 찍힌 내용을 부정하기 위해 가장 적은 영향력만 행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디나이얼 아이템은 핫 걸이 병에 걸린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핫 걸이 처음 자신의 병을 알게 된 것까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영상 판독 과정의 실수였던 것으로 진행해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이템과 사이트가 디렉터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에 불과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고, 은 과장님과 핫 걸에게 떠밀려 이것 저것 해야 할 일이 쌓여버렸다.
과장님은 다시 검사를 해 달라고 집요하게 부탁한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핫 걸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 이상으로 기뻐했다.
죽을 거라는 소식 앞에서는 의연한 척 굴었지만 속으로 얼마나 무서웠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나는 잘 참아 주었다고 핫 걸을 안고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건강해진 것을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다.
핫 걸은 나에게 고맙다고 하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던 핫 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핫 걸이 그 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지 알 것 같았다.
"어머! 실장님!! 나 어떡하지?!!!"
핫 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게 실장한테 좀 친절하게 굴 것이지.
핫 걸은 나한테 부탁을 했다.
대신 전화를 좀 해 주면 안 되겠냐고.
내 오빠인 척 하고, 핫 걸이 많이 아프고 열이 오르더니 헛소리를 하더라고 말을 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나도 도와주려고 했지만 핫 걸은 아니라고, 자기가 해야겠다고 하면서 마구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핫 걸이 그럴 필요도 없이 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진지하게 물은 그 사람은 핫 걸의 얘기를 듣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 사람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실장님!!!”
핫 걸이 말하자 실장은 무슨 일로 그러는 건지 모르는 듯하더니 한참만에 혼자서 껄껄껄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용서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암세포를 이겼으니까 얼마든지 봐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동안 쉴 틈없이 달려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많이 놀라고 충격 받았을 텐데 4일 정도 쉬어. 여기 일은 내가 더 처리해 놓을 테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겠습니까?”
어찌나 진지하게 묻는지.
핫 걸은 정말로 자기가 아니면 키샤가 딱 멈춰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장은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더니, 아무래도 그게 걱정이 되기는 하니까 그럼 사흘만 쉬다가 나오라고 말했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사흘이나 나흘이나 거기서 거기일 것 같은데 핫 걸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져서 그럼 사흘만 쉬다가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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