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0 ----------------------------------------------
그딴건 없다
카린의 집사는 카린을 향해서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들고 사라졌다.
카린은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리키 그린의 티본 스테이크를 앞으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리키 그린 대신에 누가 좋을까?"
"알아보겠습니다."
"서둘러. 서둘러야 돼. 모임이 곧 있잖아. 깐깐한 사람들을 기죽게 할만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된다고."
"예. 그런 사람 중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사는 카린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리키 그린의 죽음은 그들에게 딱 그 정도의 의미만을 가졌다.
***
연우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연우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놀랐다.
연우는 그 집을 보는 게 처음이어서 집을 보고 놀라기에도 바빴는데 내가 4층의 넓은 벽면 전체에 포스트잇과 자료들을 붙여 놓고 화살표로 연결을 하고 그 위에 붉은 색으로 크게 엑스 표를 치거나 동그라미를 표시해 둔 것을 보고 입을 벌린 채 그것들을 보았다.
나는 퀭한 눈으로 벽면의 자료들을 보고 있었다.
리얼 그릴의 주위에 있는, 리얼 그릴의 경쟁 업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레스토랑을 전부 표시해놓고 각 통계 자료를 모아 분석하는 중이었다.
리얼 그릴의 몰락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누군가 작정을 하고 리얼 그릴을 겨냥해 공격한 거라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우선 생각할 것은 소송을 걸었던 원고들이었고 그 다음에는 경쟁 업체 사람들, 그리고 채권자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관여한 것은 찾아내고 증명하기가 어려웠지만 소송을 걸었던 원고들은 신원도 확실했고 그 사람들에게 보복을 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 사람들의 의도도 순수해 보이지 않았고 설사 의도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었다.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똑똑똑, 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
다른 사람도 아닌 연우의 목소리.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연우가 서 있었다.
“야, 인마!! 너 어떻게 여기 있어?”
내가 소리를 지르며 껑충 일어나 연우에게 달려가자 연우가 웃음을 지었다.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내가 더 놀랐네.”
연우가 말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어? 이 자식 진짜!! 사람 놀래키는 재주 있네?”
“누구랑 같이 있나 감시하려고 몰래 왔는데 설마 이렇게 폐인이 돼 있는 줄은 몰랐네요. 꼭 쓰레기같아 보여요. 머리는 언제 빗었어요?”
연우는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해 주면서 물었다.
“어? 어. 몰라.”
“잠은 잤어요?”
“응. 이틀 전에 잤어.”
“그러고 안 잤어요?”
연우는 미쳤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좀 있어서.”
나는 연우에게 은 과장님의 얘기를 해 주었다.
리얼 그릴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혹시 그 레스토랑에 대해서 들은 얘기가 있냐고 물었더니, 한국인이 경영하는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는데 위생 문제랑 직원들 이탈 문제에 줄소송까지 겹치면서 파산 직전의 상황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소송 한 번 걸리면 그냥 혀 물고 죽는 게 낫겠더라고요.”
연우의 코멘트였다.
“근데 그 분이 은 과장님 오빠신줄은 전혀 몰랐네요. 그럼 큰 일인 거잖아요.”
연우는 가방과 외투를 벗어놓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응. 근데 급한 불은 대충 은호 형이 꺼 주기로 했어. 대신에 지분 70퍼센트를 받기로 했는데 폭탄을 받은 게 아닌지 걱정이 돼서. 나를 믿고 형이 채무를 인수해 준 건데 도움이 돼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말하자 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에게도 그런 식으로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게 어차피 내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엄마가 생기는줄 알고 좋아했는데 겨우 이런 암초에 부딪쳐서 엄마를 포기할 수는없잖아.”
내가 말하자 연우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 진짜 들떠 보여요.은 과장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나봐요.”
“응. 정말 좋은 게 뭔줄 알아? 내가 엄마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야. 아빠가 선택하는 거긴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관여를 할 수 있잖아.”
내 말에 연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은 과장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세요?”
“폭탄을 나한테 넘기고 나서는 다시 해피해지신 것 같아. 아빠 말로는 그래. 청혼을 받아들이셨대. 그게 문제였으면 진작 말하시면 되는 거였는데 그랬어.”
“진짜 잘 됐네요. 그럼 결혼은 언제 하신대요?”
“그건 아직 모르겠어.”
“정말 잘 됐다. 진짜로요.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려야겠네.”
“그래. 그래야지. 좋아하실 거야.”
나는 연우의 옆에 가서 앉아 연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진짜 좋으시겠다. 은 과장님은.”
“응. 은 과장님도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어.”
남이 청혼받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둔감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더 안 좋았던 건, 그때 내 귀에 류아에게서 받은 이어링이 박혀 있었다는 거였다.
보석 이름도 생소한데 조명에 따라서 한 가지 보석에 세 가지 색이 나오는 엄청 희귀한 보석이라고 했다.
아마도 티파니에서 미는 보석인 것 같았고 그 회사에서는 류아에게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이용해서 보석을 홍보하려고 이어링을 만들어 선물했던 것인데 지금 그 한쪽 이어링이 내 귀에 박혀 있는 것이다.
연우의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그리고 갑자기 귀를 잡아다녔다.
“어어어. 왜애?”
연우에게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연우도 미국에 있으면서 아메 류아의 화려한 데뷔를 지켜 보았고 류아가 티파니의 광고 모델로 발탁됐다는 것이며 희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이어링을 선물로 받았다는 얘기도 들어 알고 있었던 건데 나는 연우가 그런 사실들을 다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야야야야야. 그거 내 귀거든!!”
“알거든요?!!!”
“아아앙. 아퍼. 힘만 세 져 가지고 왔어. 근데 귀는 왜 잡아다니는데!!”
“미워서요!!”
전혀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은 말을 듣고 연우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나서 연우를 노려보다가, 내 귀를 방금 전까지 잡아당긴 연우의 얼굴이 나보다 더 화가 나 있는 것을 보고야 상황파악이 됐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깨닫고 나의 폭풍 변명이 시작됐다.
“아아아아아. 이거? 이건 류아가. 류아가 내 그….”
류아가 내 몸의 넓은 면적 중에서 자기랑 커플 이어링을 낄 자리 조금을 내 주지 못하냐는 말을 했다고 하면 연우가 화내겠지?
“뺄…게. 그리고 이건 그냥 하고 있었던 거야. 비싼 거라는데 아무데나 놓고 다니다 잃어버리면 아깝잖아. 그래서 그냥 안전한 곳에 박아가지고 다닌 거지.”
내가 생각해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연우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가 이어링을 빼려는 걸 보고 손을 저었다.
“아니예요. 됐어요. 그냥 해요.”
“음. 이연우. 그럼 이렇게 하자. 손가락은 아직 처녀지니까 커플링 하자. 이건 연우 네가 조금만 이해해 줘. 류아가 간절하게 원한 거라서 사양하기가 힘들었어.”
“알았어요. 오빠는 내키지 않으면 변명도 안 하는 사람인데 변명해주는 것도 고맙고. 알았어요.대신 커플링은 오빠가 사요.”
“당연하지, 인마!! 류아한테 말해서 사 달라고 해야겠다. 그럼 좀 싸게 살 수 있겠지?”
“그냥 오빠가 사요!!”
우리 연우가 이렇게 무서울 때도 있네.
나는, 그날은 그냥 뭘 해도 안 되는 날인가 보다, 하고 생각을 하고 찌그러져 있기로 했다.
“너 왜 이렇게 무서워졌어? 깡패 다 됐네!!”
내 말에 연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차는 팔았어요.”
“팔았어? 그냥 가지고 들어오지.”
“내 차 있으면 내 차 타고 다니라고 할까봐.”
“그래? 오빠 부려먹으려고? 내가 셔틀해야 돼? 에이. 귀찮은데.”
이연우를 놀리는 건 정말 쉬워서 그런 식으로 조금만 정색을 하고 말하면 연우의 얼굴은 금방 울그락불그락해지면서 창피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