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웹 MK-190화 (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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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벌 프로젝트

자기가 맞출 수 없는 큐브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카린은 이제 와서 그걸 던져버릴 수도 없었다. 자기도 원치 않게 미로 속에 갇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얼 그릴을 그렸던 그 그림이 카린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카린은 신경질적으로 거울을 깼다.

거울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집사가 놀라 달려 들어왔고 카린은 타올을 들고 그곳을 나가버렸다.

거울이 조각나 있었고, 방금 카린이 모로 솟아 있는 거울 조각을 밟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집사의 눈에는 작은 핏방울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나는 그동안 리얼 그릴에서 제공되던 주택에 머물고 있었는데 레이나가 사는 곳을 보고 와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텔에서 머물러도 되고 다른 곳에 있어도 되는데 리얼 그릴의 직원들이 형편없는 곳에서 사는 걸 보면서 아버지가 곰팡이 피는 반지하 원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때가 생각났다.

나는 내가 살고 있던 곳을 개조하거나 해서 직원들에게 임대를 하는 방안을 은 사장님에게 제안했다.

은 사장님은 내 제안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리모델링을 할 수 있도록 나는 그곳에서 바로 짐을 뺐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만 슬슬 외로움을 느끼던 나는, 호텔에 따로 방을 구하지 않고 류아와 같이 지내기로 했다. 한 번 만나 섹스만 하고 헤어지는 관계에 점점 지쳐갔고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류아는 내가 그렇게 해도 되겠냐고 묻자 그런 걸 물었다면서 화를 냈다. 그런 건 물을 필요도 없다면서.

그동안은 머슬 퀸이 강행군을 시켜도 군소리없이 일을 해 왔던 류아였지만 나와 같이 지내게 된 후로는 조금씩 머슬 퀸에게 항의도 하고 쉴 시간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머슬 퀸이 나를 찾아와서 각성하라고 협박을 했을 정도였다.

나는 순박한 표정으로 머슬 퀸의 노여움을 피해 가려고 했고 머슬 퀸과 류아는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류아는 선글라스를 끼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그 키와 체형, 머리 모양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들켰다.

나는 시크한 뉴욕 사람들이 류아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멀찍이서 류아를 기다려 주곤 했다.

가끔 가다가 정신나간 놈들이 류아에게 돌진해 오는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류아의 경호원이 되어 주었다.

여러 놈이 동시에 덤벼든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오빠 멋있지?”

한꺼번에 몇 놈이든 다 해치워버리고 나서 류아를 보며 그렇게 말하면 류아는 나를 보고 씽긋 웃었다.

나와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류아도 경호원들의 틈을 벗어나서 나하고만 다니면 됐기 때문에 나하고 같이 다니는 시간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류아는 리얼 그릴에 자주 들락거렸고 리얼 그릴에서 류아를 봤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리얼 그릴을 찾는 손님들이 늘었다.

류아가 맨하탄에 있는 동안 리얼 그릴의 예약률은 80퍼센트를 넘어서더니 90퍼센트에 육박하는 기록을 이어나갔다.

류아는 식사를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셰프나 주방 보조들과도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기가 일본에서 먹었던 음식들에 대해 얘기해 주며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리얼 그릴에는 이제 류아를 보고 싶어서 오는 팬들 뿐만 아니라 류아와 같이 일을 해 보고 싶어하는 셀럽들도 찾아왔고 그것은 또다시 시너지 효과를 낳았다.

은 사장님은 소송 전에 합의금을 받아낸 것과 라운지 바의 매출 급등으로 인한 수익, 그리고 류아로 인해서 늘어난 매출로 인해 재정 상황이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은 사장님은 근도를 비롯해서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해 줘서 영업의 정상화가 빨리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근도를 통해서 듣게 되는 소식도 긍정적이었다.

근도와 근도가 데려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리얼 그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고 리얼 그릴에서 류아를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셀럽들에게 서빙을 하면서 자신들의 커리어를 쌓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전에 있던 셰프들처럼 은 사장님의 실력을 일부러 깎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리얼 그릴에서 일을 했다는 경력은 앞으로 그들이 무슨 일을 하게 되건 간에 큰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 사장님에 대해 존경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노력했다. 원래 은 사장님 같은 수석 셰프의 옆에서 일을 배우려면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려야 가능한 일인데 자기들에게는 기회가 좋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리얼 그릴이 재기에 성공하자 리얼 그릴을 떠났던 사람들이 리얼 그릴에 돌아오고 싶어서 리얼 그릴의 문을 두드렸다.

은 사장님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은 사장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좋았던 추억만을 오래오래 기억하는 유형의 사람 같았다. 나하고는 아주 반대되는 인물인 것이다. 은 사장님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좋았던 기억을 갖고 있었고 그들을 받아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느니 아직 한 번도 배신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다는 말에 은 사장님은 결국 내 말을 따랐다.

리얼 그릴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은 사장님이라는 좋은 셰프와 열정과 실력을 갖춘 루키들이 주방을 장악하고, 감각 돋는 사람들이 홀 서빙을 맡으며 구태의연한 악습을 모두 지워버렸다.

특히 홀 서빙을 맡은 웨이터들은 거의 모두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었기에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누구로부터 과거의 것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각 사람이 여섯 개의 테이블을 맡아, 자기가 맡은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손님들에게 서빙을 맡았다.

그것은 하나의 점포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과 거의 비슷했다.

리얼 그릴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었고 한 테이블에 집중적으로 상류층이 모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웨이터들은 자기들에게 배당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 부으면서 더 좋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고 더 많이 공부했다.

와인과 육류, 생선류뿐만 아니라 외국어 습득에 대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리얼 그릴의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기간에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크게 고무되고 있었다.

은 사장님이 우리 은 과장님의 오빠라서, 어떻게든 재기에 성공하도록 도와주고 싶었고 거기에서 우리가 쏟은 노력의 대가로 정당하게 얻고 싶었던 것이다.

일이 바빠지면서 근도하고는 점점 같이 얘기 할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졌다.

근도는 주방에서 거의 나오질 않았고 일이 끝난 후에도 새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서 다시 또 재료를 준비하고 새로운 요리를 했다.

내가 근도를 일부러 찾아가도 근도가 나를 상대해 주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내가 타이밍을 잘 잡았는지 근도가, 자기가 만든 요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먹여 보면서 평가를 듣고 있었다.

“어. 임정우. 너도 와서 먹어봐.”

근도는 잘 만났다는 듯이 나를 부르며 말했다.

“나는 먹어도 잘 모르는데.”

그러면서 순전히 허기를 떼운다는 목적으로 음식을 와구와구 집어넣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막 퍼먹어대다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더니 모두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요근래 한 끼도 못 먹고 다녔냐?”

근도가 물었다.

“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우리가 우리끼리 한국어로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게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영어로 말을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소스 간이 존나 심심하다.' 이런 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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