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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모텔에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자기들을 잡아간 조직이 키샤라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자기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당한 거라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설령 자기들을 잡아간 조직이 키샤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키샤라는 조직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지표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뿌리처럼 은밀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키샤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카린은 정은호에 대해서 조금 알아보려고 했다가 홍역을 치르고는 잠시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래도 이제 누구를 상대로 더듬이를 뻗어야 하는 건지는 알게 됐으니 그것만 해도 성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핫 걸은 정우에게 그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어떤 사람들이 정은호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했지만 사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건 은호가 아니라 정우인거라고 핫 걸은 짐작했다. 그러나 정우가 너무 꼭꼭 숨어 실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타겟을 잘못 잡은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우는 은호라는 안개의 그림자였다.
안개를 붙잡는 것도 어려운데 안개의 그림자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안개의 그림자를 본 일이 있는가.
정우를 찾는 사람들에게 정우는 그런 존재였다.
거기에 더해 어느 틈에 키샤의 비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랬으니 아무리 카린이라고 해도 그런 정우에 대해 쉽게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우는 은호가 위험해질 수도 있겠냐고 물었고 핫 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은호와 정우가 갖추어가고 있는 조직이 키샤에게도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큰 도움을 주고 있었기에 (비록 은호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키샤에서는 자기들의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기꺼이 은호의 신변을 보호할 의지가 있었다.
그와 별개로, 은호에 대해 알아내라고 사주한 배후의 실체를 파헤치는데도 주력을 했지만 그 일은 쉽게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로 몸을 은폐한 채 그들은 신중하게 서로를 향해 눈을 빛냈다.
***
카린은 혼자 서재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건 뭔가? 하고 호기심에 맨 손으로 잡은 녀석이 하필 폭탄벌레 같은 녀석이라, 카린은 생각지도 않은 내상을 입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오랜만에 자기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을 찾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들뜨기도 했다.
리얼 그릴과 호텔 큰에는 한 번 더 시간을 내서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빙빙의 뷰 레코더는 카린에게 매순간 실망만을 안기고 있었다. 홀을 채운 사람들을 상대하고 가끔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고 약과 섹스를 하고 지저분하고 재미없는 일상을 보내는 빙빙의 눈으로 보는 리얼 그릴의 세상은 카린에게 그저 무의미하기만 했다.
그래서 얼마전에, 빙빙에게서 온 영상을 전부 폐기해 버렸다.
그런 자료들을 놔뒀다가 그게 나중에 어떤 문제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예 바이스에 물려서 완전히 찌그러뜨리고 확실하게 폐기를 시켜 버린 것이다.
'정은호라. 리얼 그릴.'
카린은 자기가 타겟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리고서 장고를 거듭했다.
그때 집사가 들어와서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고 알렸다.
카린은 아직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지만 자기가 그 사람들 앞에서 형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가 싶어 조금 더 게으름을 부리다가 서재에 있던 그 차림으로 사람들을 맞으러 나갔다.
해밀이 카린에게 다가오더니 남들 모르게 카린에게 눈짓을 했다.
카린은 모르는 척 걸음을 돌렸고 해밀이 간격을 두고 카린을 따라왔다.
“레이널드가…. 문제를 좀 만들었습니다.”
카린이 해밀을 바라보았다.
말 없이 쏘아보는 그 눈길을 받으면서 해밀은 자기 피부가 타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카린이 만든 환상이었지만 해밀은 그것을 현실로 느꼈다.
카린이 시선을 거두었을 때 해밀은 겨우 숨을 쉬었다.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린을 보면서 해밀은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서 미안해 하며 말했다.
“레이널드가…. 자기를 위해서 모금 행사를 열어준 로젠 쉴트에게 이 모임에 대해서 얘길…. 했습니다.”
“로젠 쉴트라면?”
“부동산과 칼륨 광산으로 재산을 모은 그 로젠 쉴트입니다.”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해밀이 한 마디씩 주저하며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카린이 말했다.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그 얘기를 들었고 레이널드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 모임에 대해 얘기하고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참석하는지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카린이….”
“뭐냐.”
카린이 해밀을 돌아보며 물었다.
“카린이…. 이상한 향초 같은 걸 피우고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고서 특별한 오르가즘을 경험하게 해 준다고…. 광란의 파티가 여기에서 열린다고 했,습니다.”
카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래서?”
“로젠 쉴트는, 자기가 초대받지 않은 파티는 영원히 삼류밖에 안 되는 거라면서 자기도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레이널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제 눈치를 보더군요.”
“해밀. 레이널드를 추천한 건 너다.”
카린은 이제 해밀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했고 해밀은 카린에게 쩔쩔맸다.
“카린. 저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레이널드는 대선 주자가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레이널드가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게 거의 확실해요. 레이널드가 실수를 했지만 이번에 잘 가르쳐 놓기만 하면 앞으로 레이널드가 우리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할 겁니다.”
해밀은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붙잡고 바닥에 뒹굴었다.
그것은 카린이 시선을 거둘 때까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카린이 고개를 돌렸을 때 해밀의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밀은 헉헉거리면서, 그 고통이 정말로 사라진 건지 확인하려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위해서 레이널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
카린이 말했다.
“하지만 카린. 그건 불가능합니다. 레이널드를 이 자리까지 올려놓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섰습니다. 비용도 엄청나게 들어갔고 말입니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세운다는 건 너무 큰 낭비예요, 카린.”
해밀은 겁에 질린 얼굴이면서도 그 말은 꼭 해야만 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아무리 화가 나도 레이널드는 자기가 잡은 밧줄이었으니 레이널드를 포기하는 것은 해밀에게도 너무 큰 손실이었다.
“불가능이라. 불가능이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건가. 해밀.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당신 몸이 위로 솟구쳐 올라 당신 머리가 천장에 박힌 채 당신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거? 그런 것들이 ‘불가능’이라는 건가? 과연. 그건 불가능한 일일까? 확인해 보고 싶나, 해밀? 그게 정말 불가능할지. 네가 지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이 정말로 불가능한 일인지 알아보기 전에 말이다.”
카린이 웃으며 말했다.
해밀은 자신의 이마와 머릿속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해밀은 자기가 버려야 할 카드와 끝까지 쥐고 있을 카드에 대한 판단을 마쳤다.
해밀이 카린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카린. 카린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카린의 뜻이 제 뜻입니다."
“오늘 모임은 특히 더 재미있겠군.”
카린이 말했다.
카린이 먼저 나서자 해밀이 그 뒤를 따라갔다.
밖에는 어느새 레이널드가 와 있었고 레이널드는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거들먹거렸다.
“아아. 카린. 얼굴 보는 게 왜 이리 어렵습니까.”
레이널드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카린은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레이널드. 듣자하니 이 모임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보더군요.”
가소롭다는 듯이 레이널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린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