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웹 MK-207화 (207/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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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프롤로그

카린은 그 대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는데 그림을 통해서 카린에게 주어지는 혜택과 미션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집을 사려면 얼마나 돈이 많아야 하는지 물었고 카린은 그때부터 제법 솔직하게 얘기를 해 주었다.

어차피 내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일정 부분에 대해서는 공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카린은 그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오픈을 했다.

제어되지 않았던 너무 강한 힘에 대해서도 카린은 얘기했다.

그것은 요즘에도 감정이 극에 달하면 제어되지 않고 튀어나온다고 말했다.

우리는 극희귀 질병을 같이 앓고 있는 환우를 만난 것처럼 대화에 기대했던 것 같다.

도움이 된 이야기는 사실 별로 없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공통점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카린이 그리는 그림이 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은호 형에 대해서 알아내라고 사람을 보낸 게 카린이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카린에게 그것을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와 얘기를 하는 동안 카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카린은, ‘폴, 지금 미팅 중인데 나중에 얘기하죠.’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그때는 폴 대신 해밀이라고만 바꾸고 똑같은 말을 했다.

그 폴과 해밀이라는 사람이 연일 뉴스에 얼굴을 비추는 정계의 거물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내 놀라움이란.

“카린.”

나는 일단 카린을 불러 놓기는 했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말해도 좋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폴은 레이널드가 추락해버린 후 그 자리를 메우고 급부상하는 남자였다.

폴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이시시타 히사에를 떠올리게 했다.

“혹시…?”

히사에를 죽인 사람이 카린인 건가?

사이트의 내 여자들을 노리고 그 여자들을 죽인 사람이?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이 극으로 치달았다.

나는 카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카린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내가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그의 얼굴을 쥐어뜯을 듯이 잡고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만!!!”

카린의 눈이 충혈되었고 실핏줄이 터졌다.

온통 붉어진 눈으로 비명을 지르는 카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하얗게 되었고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이곳에 온 레이널드와 이시시타 히사에를 보았다.

사진처럼 멈춰있는 단 하나의 장면이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이시시타 히사에를 죽인 게 넌가.”

내가 물었다.

카린은 가쁜 숨을 쉬면서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더듬었다.

카린의 눈동자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을 창고에 데려다 놓은 것밖에는 안 했어.”

내가 카린을 바라보자 카린은, ‘그래. 이시시타 히사에를 묶으라고 시켰어. 그게 다야. 이시시타를 죽이는 건 내 계획에도 없었다고!’ 라는 말을 재빨리 덧붙였다. 쓸데없이 거짓말을 했다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어 두려운 모양이었다.

카린은 점점 진정이 되어갔다.

그렇다고 한 번 터졌던 실핏줄이 놀라운 회복력을 보인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카린은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사실은 나도 카린만큼이나 놀라고 있었다.

“카린.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면. 그걸 나한테 보내줄 수 있겠….”

내가 언제부터 이 아저씨한테 반말하고 있었지?

갑자기 그 생각이 들면서 나는 내가 카린한테 반말을 해야 하는지 존댓말을 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카린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니까 보내주도록 하겠….”

카린도 나한테 반말을 할지 존댓말을 할지 결정을 못 하겠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판단을 유보한 채 헤어졌다.

적어도 내 몸캠 영상 사이트에 나를 긴장시키는 아이템이 새로 뜨지 않는 한은, 그래서 내가 내게 속한 사람들의 안전을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는 한은 카린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나로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집을 나오면서 나는 카린이 보지 않는 동안 벽에 걸린 우리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카린은 그 그림이 나와 연우의 그림이라는 건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다른 놈이 연우의 그림을 그려놓고 보는 게 절대로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카린과 헤어진 후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카린으로부터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물음표 열 두 개와 함께.

그 물음표 열 두 개의 의미를 나는 해석할 수 있었다.

‘이게 왜 이렇게 됐는지 아는 거 있냐?’

아마도 그런 뜻이리라.

나는 카린이 보낸 사진을 보았다.

카린의 계단 옆 벽면에 걸려있던 액자 속 그림이, 구김이나 균열도 없이 한 장의 까만색 재로 변해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답장을 보내주었다.

“?”

해석하자면, '뭐요.' 이 정도?

내가 쏘아보았다고 그림이 그렇게 돼 버렸을 때 나도 놀랐는데 뒤늦게 그걸 발견한 카린은 얼마나 더 놀랐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이럴 때 필요한 건 연기력?

카린에게서는 그 후로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나는 폴이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카린의 손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책상 위로 조그만 주먹 하나가 들어오더니 책상 위를 똑똑 하고 작은 소리가 들릴락말락하도록 두드렸다.

아이고, 까아아암짝야!

엄청 놀라서 어깨가 저절로 위로 솟구쳤고, 그 바람에 나를 부르러 왔던 손해미가 더 놀라서 꺅, 소리를 질렀다.

조용하던 도서관에 울려퍼진 비명 소리.

아으, 쪽팔려!

나는 손해미의 입을 얼른 막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이고.

사람들이 우리를 노려보는 걸 억지로 무시하고 나는 손해미를 연행하다시피 해서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 녀석은 우리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줄곧 나를 찾아다닌 모양이었는데 그러고도 나를 찾지 못해서 준영이에게 몇 번이나 연락을 했었나보다.

준영이는 머슬 퀸을 통해서 내 소식을 가끔 듣고 있었기에 내 복귀가 조금 늦어진다는 정도로 해미에게 소식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그 후로 해미는 자주 내 자리에 나타났다.

내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들에게는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초딩이 중딩처럼 보이려고 멋을 내도 절대로 넘어서지 못하는 선이 있어 유치하고 중딩때도 마찬가지고 고딩때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잘 꾸미는 중딩도 고딩 눈에서는 왠지 어설퍼 보이는 것처럼 각각이 벗어나지 못하는 바운더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등학생 때의 해미도 그랬다.

복학한 후에 손해미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해미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군지 몰라서 멀뚱히 보고 있는데 해미가 먼저 발랄하게, ‘선생님. 저예요. 해미.’ 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못 알아보던 나는 해미가, 언젠가 내가 후린 적이 있던 여자 그룹 중 한 사람인 줄 알고 학교에서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건 삼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해미를 조용히 타일렀다.

“네? 왜요?”

그렇게 물으며 말똥말똥하게 나를 바라보는 해미를 봤을 때에야 나는 이 녀석이 누구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그 손해미?!!!”

“네.”

다 익었네. 다 익었어!!

그때가 딱 중간 고사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시점만 아니었으면 벌써 우리 해미 머리를 올려줬을 텐데.

해미는 마침 시험이 일찍 시작돼서 가끔 이렇게 내 자리로 찾아와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서로의 애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도 사납고 집중도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해미는 내가 '동양사학의 이해'를 신청했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세상에 어쩌다가 그 마녀 교수 강의를 신청한 거냐고.

다른 걸 아무리 잘 했어도 그 강의를 신청했으면 수강 신청 완전히 망친 거라고.

다음에는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어찌나 고맙든지.

“이거요. 선생님.”

“뭐야?”

수북하게 나오는 족보.

해미는 나하고 학년도 다르면서 나한테 필요한 걸 어찌나 잘 챙기는지.

해미 없었으면 나는 학교 어떻게 다닐 뻔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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