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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조교하기
“이걸 어디에서 구했어?”
이미 내 광대가 승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해미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선배님들한테 부탁해서요.”
“괜히 다른 놈들보고 웃고 다니고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얻는다고?”
“그냥 웃기만 했는데요???”
해미 머리를 헝클어주고 나중에 밥을 사겠다고 하다가, 나중으로 미룰 것 없이 지금 밥이나 먹으러 가겠냐고 묻자 자기는 공부해야 할 게 아직 남았다고 말했다.
역시 삶의 자세가 다르다.
그래. 1학년때부터 벌써 포기해 버리면 안 되지.
"기숙사 들어가려면 열심히 해야 되거든요."
"아아. 지금 기숙사에 있지?"
"네. 이번에도 간당간당했는데. 떨어질까봐 너무 걱정돼요."
해미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뭐. 뭘 그렇게 신경쓰냐? 1학년때는 좀 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하숙이나 자취하면 돈이 더 깨질 거고 시설도 걱정이고 치안도 걱정이고 차비도 더 들어가고요."
"아. 그렇구나."
기숙사에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녀석은 해미만이 아니었다.
많은 애들이 등록금 부담이나 생활비 부담을 줄이려고 기를 쓰고 공부를 했다.
남들 등록금 면제받을 때 나는 장학금 면제나 받고.
“그래. 그럼. 대신 시험 끝나고 맛 있는 거 사줄게.”
“술 사주세요. 술요.”
“이야아아. 이제 술도 마실 줄 알아요?”
“그럼요오. 저 술 세요!”
“아이구. 그래쪄여!!”
하필 그때 내 동기랑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건 또 뭐람.
그 녀석들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질색을 하면서 나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해미는 까르르르 웃으면서 즐거워했고 내 친구들은 해미가 누구냐며 소개해 달라고 발광들이었다.
“미쳤냐? 내가 너희를 소개해 주게?”
잔뜩 약을 올려놓고 완전히 흐뭇해져서 내 자리로 돌아가니 그때부터는 급 피곤해지고.
졸음을 쫓겠답시고 연우에게 톡을 보냈다.
[자기양. 나 졸려.]
[자요. ㅋ]
[안 돼. 아으, 어쨌든 재수강만은 피하고 싶은데 공부가 안 돼. 머리가 다 굳었나봐.]
[녹여요.]
[...오빠는 힘든데 넌 재밌구나?]
[네.]
[일이나 왕창 시키라고 아버지한테 전화드려야지.]
[안 그래도 내일까지 끝내야되는 보고서가 세 개예요. 오늘도 야근 확정.]
[쉬엄쉬엄 해. 그러다가 쓰러지겠다.]
[오빠도요. 귀요미들 이기려고 너무 악착같이 하지 말고요.]
[응. 그래야 할까봐. 정말로. 오늘도 고생하겠네. 계속 수고.]
[넴~~]
그리고 가슴에서 하트를 뿜어내는 토끼 이모티콘.
나도 곰을 출동시켜 하트를 발사해 주고 스마트폰을 내려 놓았다.
톡을 끝내놓고 나니 그때까지 집중이 잘 되던 머리에서 혼이 빠져나가는 이 느낌은 또 뭐?
아오. 하여간 한 번 공부 놨다가 다시 하려니까 손에 잡히지도 않고 죽을 맛이다.
연우는 학교로 돌아온 나에게 자유방임주의를 선언했다.
오빠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지나친 것 같지만 않으면 적당한 교미는 허락해 주겠다는 묵시적인 승인이 있었다.
나는 인간 임정우를 뭘로 보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절대로 그러지 못했고 연우의
무릎을 끌어안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려댔다.
그래서 이렇게 하루 두, 세 번 문안 톡은 잊지 않고 꼭 챙긴다.
‘아…. 오늘의 에너지는 거의 다 쓴 것 같은데.’
어찌보면 굉장히 신기하다.
초절정에 가까웠던 엘리트 임정우가 어떻게 군대 갔다오고 병원에 좀 있었다고 이렇게 공부 머리가 딱 굳어서 안 돌아갈까.
그동안 그래도 준영이 공부도 가르치고 번역도 하고 나름 계속 머리 쓰는 일을 해 왔는데도.
페이퍼를 보고 이해를 하려는 의욕이 돋지를 않고 암기하겠다는 의지가 생기질 않는데 이건 뭐. 방법이 없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이 끝났을 때.
나는 완전히 망했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나 '동양사학의 이해'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나만 못 본 게 아니라 '동양사학의 이해'를 본 학생들은 거의 비슷했다.
교수님은 각자의 점수를 알려주고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교수 연구실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성적을 확인한 우리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줄줄이 D고, C를 맞은 애들은 그나마 선방을 한 격이었다.
성적을 확인한 애들 중에 몇 명이 책상에 엎드려서 울었다.
이건.
중 고등학교 때 성적이 잘 안 나왔다고 우는 것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말도 안 되게 비싼 등록금을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기를 쓰고 아둥바둥 공부를 했던 애들이 교양 과목 한 과목에서 너무 낮은 점수를 받아서 장학금도 못 받게 되고 기숙사에서도 대거 탈락할 위기에 처해지자 분위기가 심각했다.
학점을 잘 주는 과목으로 수강신청을 잘 한 애들은 거의가 B플러스에서 A를 받았는데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우리 중에 정말로 '동양사학의 이해'를 듣고 싶어서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거라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시험 범위에 없던 문제를 내 놓고, 그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일반 상식이니 시험 범위 밖에서 나온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거라는 교수님의 답변은 우리 모두를 빡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C마이너스를 받은 한 아이는, 여름방학 기간 동안에 인턴으로 들어가기로 한 회사에 성적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 성적이면 그 기회를 잃게 된다면서 낙심했다.
거기에서 일하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학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아마도 휴학을 해야 할 거라는 말은 이제 뭐, 새삼스럽지도 않다.
분위기가 워낙 강경했고 모두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예민해져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내가 등 떠밀려 대표로 나서게 됐다.
벌써 내 연식이 그렇게 돼 버린 것이다.
"큰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재시험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해 보세요, 형."
나를 바라보며 부탁하는 녀석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도 지금에야 돈 걱정 안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거지, 내 삶이 조금만 틀어졌다면 나도 저 애들만큼이나 절박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한문으로 쓰여진 ‘이은형 교수 연구실’이라는 팻말은 글씨체부터가 어찌나 완고해 보이는지.
노크를 하자 까칠까칠 열매를 먹은 것 같은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굴 근육을 이완시켜서 화사하게 웃으며 매력 발산을 잔뜩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님이라고는 하지만 군대갔다와서 복학한 우리하고는 진짜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도 않는다.
교수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그게요.”
나는 할 말을 잘 준비해 왔으면서도 그게 목에 턱 걸린 듯, 잘 나오질 않았다.
“시험은 잘 봤어요?”
교수님이 물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네? 아.네. 그게요. 바로 그 말씀을드리려고 온 거거든요.”
나는 한 번 더 활짝 웃었다.
“왜요? 잘 본 것 같아서 자랑하려고 았어요?”
교수님이 웃었다.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게요….”
아…. 인간 임정우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돼 버린 건지.
“혹시 저희가 재시험을 볼 수 있을까 해서 그걸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내가 왜 그래야되죠?”
“종종…. 그러기도 하잖아요. 물론 점수의 전부를 반영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하는 것처럼 80…프로만이라도…. 아니면 70…프로라거나….”
점점 작아지는 내 목소리.
“내가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교수님. 정말 죄송한데요.”
그 정도가 되다보니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동양학사의 이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하지만 재시험이 꼭 필요한 아이들이 있었다.
언제부터 내 컨셉이 잔다르크로 바뀐 건가.
그 녀석들만 걸리지 않았다면 벌써 일어났을 것인데도 그래도 나를 믿고 바라보던 녀석들을 생각해서 두 세 번은 더 설득을 해 보려고 했다.
"교수님. 형평성이라는 것도 있잖습니까. 그리고 신의칙이라는 것도 있고요."
나는 내 말이 교수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가며 비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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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잊고 못 쓰고 지나가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주행 마치신 분들. 축하합니다~~~ 계속 같이 달려주세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