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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위하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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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내가 이은형 교수를 안고 강의실에 데려다 준 일은 그 먼 거리를 돌아 해미의 귀에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해미가 나에게 톡을 보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주무세요?]
나는 톡을 이미 확인해 버렸기 때문에 뭐라고 답을 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안 주무시는 것 같은데. 왜 대답 안 하세요?]
……?
해미가 원래 이렇게 직설적이었나?
할 말이 있어도 몇 번씩 생각하고, 거르고 걸러서 말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나는 해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안 잤어. 왜? 할 말 있어?”
“지금 오빠 집 앞인데 들어가도 돼요?”
“네가 우리 집을 어떻게 알아?”
“준영이가 알려줬어요.”
역시. 준영이 이 자식이 문제인 거군.
나는 해미를 우리 집으로 들여야 하는 건지 잠시 갈등을 하다가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던 녀석이라 걱정이 돼서 일단 기다리라고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해미는 택시를 타고 그곳에 와서 내린 건지, 우리 집 앞에서 혼자 몸을 웅크리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춥지? 근데 왜 여기에 있어?”
나는 해미를 보자마자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어깨를 덮어 주었다.
해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알딸딸하니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쪼그만 게 벌써 발랑 까져가지곤. 시험 끝났다고 술 마시고 돌아다니는 거야? 근데 너랑 같이 마신 놈들은 뭐 하는놈들인데 여자를 이 시간에 집에 데려다 주지도 않고 혼자 가게 한 거래?”
“집에.들어가도 돼요?”
“…. 어. 뭐. 그래. 그러자.”
내 머릿속에는, 해미가 준영이의 사촌이며 첫사랑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리고 해미가 지금 생각하는 게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일까 하는 생각도.
그러나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해미는 장군처럼 용감하게 우리 집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혹시 오빠. 이은형 교수님 좋아하세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해미가 물었다.
“응?”
그러고 보니까 이 녀석.
이제 선생님이라고 안 부르네?
뭔가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왜?”
“그럼 그때 그건 뭐였어요?”
“발을 접질렸다고 해서. 그거 물어보는 거….맞지? 내가 그 교수님 안아서 데려다 준 것 때문에 이러는 거지?”
“…….”
해미는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닌 거죠?”
“네가 그걸 왜 궁금해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오빠한테 애인이 있는 건지 궁금한 거라면.”
“아. 그 언니에 대해서는 알아요. 준영이가 알려줬어요.”
“그래….”
연우에 대해서는 안다는 거군.
“근데 준영이 말로는. 선생님이 손 댈 수 없는 치료 불가능한 카사노바라서 그 언니도 어느 정도는 풀어줬다고 하는 것 같던데….”
“어어? 준영이가 그랬어?”
“준영이랑 만나는 언니가 오빠에 대해서 좀 많이 아는 것 같던데요?”
“머슬 퀸이?”
“네?”
“어? 어.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어.”
“연이 언니가 그랬다고요.”
“그래. 알아.”
내 멋대로 붙여 지은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다니.
“학교에서 저 보시고 어떤 생각 들었어요?”
“굉장히 반가웠지.”
“그냥 그것 뿐이었어요?”
“괴이이이이잉장히, 반가웠는데? 왜?”
“오빠한테는 그냥 제가 아직 어린 애로만 보여요?”
우리 해미.
왜 이러실까?
오늘 좀. 너무…. 도발적이다.
“오빠. 저랑 오늘 여행 가요.”
커, 컥! 뭐? 바다?
“우리 해미. 바다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 그냥 막 미역 나고 파도 치고 그런 데가 바다가 아니야. 바다에 같이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아?”
“알려주시면 되잖아요.”
이 자식. 오늘 작정한 듯?
“손해미. 너. 오늘 무슨 일 있었냐?”
“오늘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이 정도면 오래 기다린 거잖아요. 오빠, 여자 좋아하잖아요. 내가 어리지만 않았으면 오빠 기질에 벌써 저를 유혹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준영이가 그러던데요?”
“뭐? 준영이 그 개 색끼가?”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저만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그러고는 맹랑하게 나를 바라보는 해미.
“안 된다고 하면?”
“그럴 리는 없을 거니까 그걸 물어보실 필요도 없겠죠.”
해미는 그러고 쌩하니 나가버리더니 문을 다시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 하세요? 안 따라 나오시고.”
“뭐?”
이거 왠지.
해미한테 말린다.
세상에. 내가 저 꼬맹이 녀석한테 말리다니.
그러면서도 내 얼굴에 웃음이 지어지는 건 뭔가.
나는 얼른 욕실에 뛰어 들어가서 내 상태를 살피고 드레스 룸에서 옷을 몇 번 갈아입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해미는 내 차 옆에서 덜덜덜 거리고 떨고 있었다.
“하여간. 고집은. 준비 할 때까지라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
“으으으으. 추워. 빨리 문이나 열어줘요.”
“그래. 뭐….”
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해미는 쌔근쌔근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면서 잠들어버렸다.
내가 잘 하고 있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은 나를 유혹하려면 적어도 제 정신일 때 유혹을 하든가 하지 사람 헷갈리게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지.
나는 적당한 곳에 방을 잡고 해미를 재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차가 멈추려고만 하면 이 녀석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다 왔어요?”
해미는 그때마다 물었다.
“어? 어. 아니.”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그래. 그러자.”
그렇게 되고 보니 갈 수밖에 없었다.
정작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해미가 한참동안 깨지 않았다.
나가서 담배를 피우려고 불을 붙이려는데 휠이 그냥 헛돌기만 하고 불이 붙지 않았다.
그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을 텐데 해미가 일어났다.
열린 창문 사이로 해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우와아아앙. 바다 냄새다.”
해미가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해미에게는 아직 그런 표정들이 더 어울렸다.
“이제 일어났냐, 이 잠퉁아?”
“넹. 헤헤. 선생님 안 심심하시게 제가 옆에서 얘기도 하고 그랬어야 됐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때문에 술 냄새 나서 내가 아주 그 냄새에 같이 취할 뻔 했잖아.”
“어머!”
“그리고. 이제 다시 선생님이라고 하네? 어제는 오빠라고 하더니.”
“어! 제가 그랬어요? 혹시 제가 어제 다른 실수도 했어요?”
“일단. 오늘 새벽에 그런 거니까 어제도 아니고. 그리고 실수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
“아. 다행이다.”
“배고파?”
“아뇨.”
“나와. 여기까지 왔는데 모래사장은 걸어야지.”
“흐이이잉. 그럼 발에 모래 들어갈 텐데요? 신발에 모래 묻고. 그건 싫은데.”
“미친 거 아니심? 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차 안에서 바다를 보기만 하고 그냥 가겠다고?”
“넴!”
히죽 웃는 손해미.
“그러려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거냐?”
“바다 냄새 맡으니까 좋잖아요. 선생님도 들어오세요.”
“됐어. 그건 바다를 보는 바른 자세가 아니지. 신발에 모래 묻을 것 때문에 그러면 나한테 업혀. 내가 업어다 줄 테니까.”
“싫어요. 나 빠뜨릴 것 같아요.”
“내가? 어디에? 물에? 미쳤냐?”
“키키키킥. 그럴 것 같아요.”
해미는 그저 신이 나는 것처럼 계속해서 웃었다.
살짝 미치신 것 같음.
“잔소리 말고 그냥 업혀, 인마!”
나는 차 문을 열고 말했다.
해미는 웃으면서 싫다고 했고 내 손에 잡히지 않겠다고 버둥거렸다.
내가 해미 팔을 붙잡으려고 하자 해미는 그때마다 내 손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열중 쉬엇 자세를 하는 것처럼 팔을 뒤로 숨겼다.
“아, 진짜!”
나는 해미의 팔을 잡겠다고 기를 쓰고 해미는 나한테 팔을 안 잡히겠다고 버둥대다가 갑자기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며 뒤로 넘어졌다.
해미가 넘어지려는 걸 보면서 나는 해미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려다가 해미의 위로 쓰러졌다.
내 아래에 해미가 있었다.
해미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해미를 일으켜주었고 해미는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 내 입술이 다가가는 동안 눈을 감았다.
해미와의 첫 키스였다.
해미가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키스를 이렇게 느리게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