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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모 교수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를 불러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적모 교수는 포럼 준비로 바쁘다면서 거들먹거렸고 나는 학회에 기부를 하고 싶다는 말로 한적모 교수를 꾀어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믿게 하기 위해서 명함같은 걸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의도한 것을 믿게 하는 것은 쉬웠다.
나는 내가 한적모 교수의 인식을 제어하고 그에게 왜곡된 정보를 심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럴 때는 유용했다.
나와 함께 내 차에 오른 교수는 차가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오늘 하루 근사하게 대접을 받게 될 모양이라고 예상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교수의 예상과 달리 차는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에, 주위에 건물 하나 없는 외진 곳에서 멈추었다.
“……? 여기가 어딥니까?"
교수는 왜 내가 거기에서 차를 세운 건지 알지 못한 채 내 설명을 기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내리시죠.”
내가 먼저 차에서 내리며 말하자 한적모 교수도 나를 따라 내렸다.
펼쳐진 것은 온통 잡초와 잡목으로 우거진 허허벌판에 그 뒤로 야트막한 야산이 이어져 있었다.
“정약용의 애절양이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적모 교수를 뒤에 두고 내가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한적모 교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쾌척하겠다는 돈의 금액만이 그 사람에게 가장 궁금할 거라고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한적모 교수가 생각하기에는, 사학에 관심이 많은 내가 내 지식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꺼낸 것 같았을 것이다.
“교수님도 그 시를 알고 계시겠지요?”
“애절양 말입니까? 당연합니다. 1803년에, 아이를 낳은지 사흘만에 아이가 군적에 편입이 돼서 군역으로 이정이 소를 끌고 가버리자, 아버지가 자식 낳은 자기 잘못이라면서 스스로 자기 음경을 베어버렸지요. 그 아내가 잘린 양경을 가지고 관청에 가서 울며 호소하는데 문지기가 막아버리는 것을 정약용이 보고 지은 시가 애절양입니다.”
“자신의 그것 때문에 곤액을 받는다고 해서 스스로 잘랐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한적모 교수는 애절양 따위 얘기는 접고 이제 기부금에 대해서나 얘기를 했으면 하는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적모를 돌아보며 내가 물었다.
“…예? 뭘…. 말입니까?”
“애절양 말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자니
동헌에는 범 같은 문지기가 지키고 섰고
이방 놈은 호통 치며 황소를 끌고 갔다.
서방은 문득 칼을 갈아 안방으로 뛰어드니
바닥에는 붉은 피가 낭자하구나.
아이 낳은 내 죄로다, 아이 낳은 내 죄로다.”
나는 애절양을 외우며 한적모를 바라보았다.
나이 60이 넘었는데도 무섭도록 정정한 얼굴이다.
4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고 ‘정정하다’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위압적으로 다가온다면 누구라도 쉽게 기가 죽고 겁에 질리게 될 것 같은 그런 풍모였다.
이 사람이 교수님의 푸르른 시간에 그늘을 드리웠다는 생각에 나는 한적모를 노려보았다.
교수님은 어쨌거나 그 시간을 지나왔지만 교수님에게 그 시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적모가 드리운 그늘은 지독하게도 오랫동안 고집스럽게 교수님의 발목을 잡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의 현실적인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학자로서의 명망을 등에 업고 수많은 청춘을 수탈한 남자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놓인 대기의 밀도가 높아졌다.
한적모는 지금이야말로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뭡니까.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건 뭐고 애절양은 또 뭐고. 무슨 수작이야. 당신, 누가 보낸 거야?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한적모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켕기는 것이 있기는 한 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한적모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린과 마주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한적모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한적모의 앞에서 스러지는 한 여자의 모습이 흑백 사진 한 장처럼 한적모의 눈동자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이건 당신 물건을 제대로 간수 못한 당신 죄 때문이고, 당신은 앞으로도 달라질 기미가 없는데. 이제 어쩔 건가. 한적모.”
한적모는 얼이 빠진듯한 얼굴로 내 앞에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더이상 나에게 대항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두 팔은 어깨 아래에서 축 늘어졌고 모든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보였다.
카린의 때와도 달랐다.
카린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필적할만한 비슷한 종류의 능력을 같이 갖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적모는 그렇지 않았다.
한적모는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틀어쥐고 있는 것처럼 얼굴색까지 점점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지금 119에 전화를 걸어."
한적모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한적모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부터 자기를 구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나서 한적모는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멍한 눈으로 내 가슴팍쯤을 바라보았다. 차마 내 눈을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한적모가 스스로 알아낸 것이다.
애절양.
한적모는 종이 인형처럼 무력한 움직임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던 어른 주먹만한 돌을 주웠다.
그걸 들고서 한적모가 바지춤을 풀어 내리는 동안 나는 반쯤 돌아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피가 튀는 것이 보였다.
저걱저걱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한적모는 돌모서리로 제 자지를 찍어댔다.
문득 바닥으로 툭, 살덩어리 한 점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적모의 얼굴에는 아직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멀리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죽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살면서 오래오래 고통을 맛보라지.
“지혈이라도 하고 있어. 죽지 않으려면.”
내 말에 한적모는 제 바지로 지혈을 했다.
나는 그곳에 한적모를 버려두고 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이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야?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네.”
교수님이 말했다.
“에에에이. 왜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데리러 갈까요?”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몇 시쯤에 도착하는데?”
“삼십 분쯤 걸리려나?”
“도착하면 전화해.”
“네.”
교수님은 교수님이다.
교수님은 조교하는 게 아니다. 조교는 이미 그냥 끝난 거다. 교수님이니까.
속으로 그런 헛소리를 하면서 나는 속도를 냈다.
교수님은 내가 전화를 하자 바로 나오겠다고 말했다.
“그러지말고 그냥. 집에서 볼까요?”
내가 말하자 어색해 하는 교수님.
어쩌다 우리는, 실내에서 보는 게 어색한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교수님은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그럼 10분 정도 있다가 올라오라고 말했다.
그 사이에 교수님이 집안에 바람을 일으키고 다니면서 청소를 할 것이 훤하게 상상되었다.
나는 인터넷 뉴스에 한적모의 기사가 떴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적모는 일시적인 정신 분열증세를 보였고 경찰은 그 일에 나서지 않았다.
정황에 비추어 자해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했고 거기에 다른 사람의 강요가 개입된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교수님의 집으로 올라갔다.
교수님은 문을 열어 주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오늘은 갑자기 왜 집에서 보겠대?"
교수님이 어색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냥 교수님에게 다가가 교수님을 안아주었다.
당신의 악몽은 이제 다 끝났다고, 소리내지 않은 말을 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