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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자랑스럽게 내세울 일은 아니었으니.
좆대가리 함부로 휘두르다가 생긴 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올 줄이야.
“그럼 미팅 때 오간 얘기 브리핑이나 해 줄까요?”
이재인이 말했고 수영은 곧바로 그곳에서 디자인 시안 몇 개를 보여줄 기세였다.
“그럼. 저는 가 봐도 되는 겁니까?”
내가 묻자 형사들이 고생하셨다면서 살펴 가라고 인사를 했다.
윤 대리는 벌써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경찰서에서 정모를 하게 될 줄이야.
그나마 류아가 안 왔으니 망정이지.
그랬으면 주변 교통을 통제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나한테 일어난 일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수영은 윤 대리에 대해서 미리 경고하지 않은 걸 미안해 했다.
“괜찮아. 그나저나 김수영. 그런 인간들 틈에서 생각보다 힘든 시간을 버텨냈네. 미안하다. 오빠가 미리 챙겨주지 못해서.”
“그런 말이 어딨어요.”
수영은 울음을 터뜨려버렸고 이재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상 이상인데요?”
이재인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마도 이재인이 말한 것은.
내 하렘의 규모의 대한 것?
나는 그저 바보같이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본 게 전부라고 믿어주길 바라면서.
***
나는 수영이 해신제화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지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장과 주임은 그대로 회사에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윤 대리는 그러지 못했다.
핫 걸은 자기가 경찰서에서 한 말을 지켰다.
그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핫 걸을 화나게 하는 일은 웬만해서는 피하자고 마음을 먹게 됐다.
핫 걸은 윤 대리에게 엄청나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윤 대리가 나한테 한 일은, 핫 걸의 말을 빌자면, 선량한 성폭행 피해자들을 더 큰 위험과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라고 했다.
윤 대리 같이 그렇게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여자들 때문에 실제로 피해를 당한 여자들이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핫 걸은 이 일을 대충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윤 대리는 자기가 도모한 일이 불발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아쉬워했겠지만 윤 대리가 나를 타겟으로 정하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 이미 윤 대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되어 버렸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안 되면 자신의 발꿈치가 천장에 매달린 채 거꾸로 매달려져 탈탈 털리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핫 걸은 세간의 관심 밖에 있는 사안을 끌어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천재적이었다. 윤 대리가 남자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사기행각이 (내가 유일한 사람도 아니었고 처음도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거라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핫 걸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자기가 모은 정보를 허투루 낭비하는 일도 없었고 가장 정확한 타이밍을 노려 하나 하나를 공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별 상관없는, 생판 모르는 남의 일이었던 그 일이 핫 걸의 활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윤 대리와 성관계를 가졌다가 강간으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돈을 준 사람만 해도 여덟 명이었고 네 사람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윤 대리의 말에 속아 거액을 건넸다.
아이를 가졌으니 낙태를 하고 산후 조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2천만원에서 5천만원까지 건넨 모양이었다.
윤 대리가 낙태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자기들도 딱히 떳떳한 것은 없어서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그 심정은.) 그 일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윤 대리한테 그렇게 당한 사람이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피해 사실을 밝혔다.
하나씩 하나씩 사건이 드러나면서 윤 대리는 희대의 사기꾼으로 등극했다.
윤 대리는 그냥 덮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만천하에 드러나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시민의 제보 때문에 도피 기간은 그다지 길어지지 못했다.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경찰은 윤 대리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윤 대리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사건으로 인해서 나이가 차고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던 남자들은 결혼하라는 잔소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저런 여자를 만나느니 그냥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게 낫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탓이었다.
나는 그 일로 수영이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됐다. 사람들의 관심이 윤 대리에게 쏠리다보니 해신제화에는 기자들의 발길이 한동안 끊이지 않았고 윤 대리가 수영에게 전화를 걸어서 폭언과 협박을 퍼부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일을 별건으로 고발했고 수영의 출퇴근 길에 경호 인력을 붙여 주었다. 그것은 윤 대리가 구속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힘든 와중에도 수영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냈다.
윤 대리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수영이 정말 힘든 시간을 견뎌낸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수영이 우리 앞에서 말을 한 것은 그냥 약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영은 자기가 겪었던 일에 대해서 주절주절 말하는 대신, 현 상황에 대해서 더 감사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지만, 수영과 연우가 친해져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알게 된 건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아마 연우가 내 폰을 뒤져서 수영의 연락처를 알아낸 것 같았다. 비밀번호 뭐예요? 라고 나를 똑바로 보고 묻는데 나는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밀번호를 불어버렸다! 연우는 거기에서 몇 사람의 연락처를 찾아내더니 자기 폰에 입력했다. 여, 연우야. 지금, 모하는 고얌? 이라고 비굴하게 물었을 때 연우는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얼마동안 그런 기류는 계속 유지되었다.)
연우는 수영에게 마음이 많이 가는 모양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잘 살다가 갑자기 재정적인 궁핍을 겪었다는 점에서 수영이 이해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연우가 수영을 동생처럼 살뜰하게 잘 챙겨줘서 오히려 나는 수영에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접근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당분간은 근신 모드에 들어가야 할 텐데 괜히 얼쩡대다가 연우의 레이더에 걸릴까봐.
연우가 노린 게 그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거야말로 딜레마였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시간은 착실히 지나갔다.
그러면서 정스 짐 서울대입구점의 오픈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정스 짐 헬스화 제작도 착착 진행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헬스화 만드는데서 문제가 생긴 건 줄 알고 편하게 얘기를 하라면서 커피를 내 주었는데 수영은 그런 얘기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쇼핑 백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 내밀었다.
크기가, 누가 봐도 신발 상자였다.
“너. 설마?”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수영이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반신반의하면서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구두가 있었다.
형용사는 붙이지 않겠다.
그게 최선이다.
“아…. 구두네.”
내가 말했다.
“…….”
내가 말을 해 놓고도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수영이가 만들어 온 구두는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수영에게 오해를 남겨두는 것보다는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떤 건지를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수영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수영과 함께 내가 원하는 구두의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했다.
수많은 여자와 얘기를 해 봤고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것도 해 봤지만 같이 구두를 디자인하면서 함께 얘기를 나눴던 그 시간은 정말로 즐거웠다.
수영도 처음에는 나한테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별로 마음에도 들지 않는 걸 받고서 마음에 든다고 거짓말을 해 주는 대신에 정말로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말해준 것이 더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