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5 ----------------------------------------------
pay back
“어쨌거나. 네가 만들어 온 구두는 나한테 의미가 깊다.”
내가 말했다.
“왜요?”
수영이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어어. 나는 예전에는 내가 어떤 스타일을 싫어하는지 몰랐거든. 근데 오늘 이 구두를 보니까 확실해졌네. 나는 이런 걸 싫어하는 것 같아. 확실해.”
“으이구!!”
수영이 내 팔을 때렸다.
하지만 우리가 같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났을 때는 정말로 기대되는 디자인이 나왔다.
“잘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서 이 구두는 빨리 만나보고 싶다.”
내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말하자 수영은 아주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부탁하면 선생님들이 밤을 새서라도 만들어 주실 거예요.”
“그러시겠지. 근데 이걸 해신제화 선생님들이 만들어 주시면 나는 이거 백 만원이 넘는다고 해도 살 것 같아. 이 디자인에 그 품질이면.”
“정말요?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응. 이거 디자인 내가 다 한 거잖아.”
“……!!! 아니거든요? 오빠같이 말 하는 건 쉬워도 이걸 실제로 적용시키는 건 나나 되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수영이는 내가 자기를 놀리는 건지도 모르고 화가 나서 부르르르 떨어댔다.
“알거든? 너 놀리려고 그런 거야, 인마! 아. 김수영. 우리 아버지꺼도 만들어줘. 아아아! 그럼 되겠다. 아버지 결혼식 선물로 뭐가 좋을까 했는데. 수영아. 여자 구두도 만들 수 있어? 아버지랑 새 엄마한테 구두 한 켤레씩 해 드려야겠다.”
“만드는 건 제가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그치? 진짜 다행이다!”
한 대를 또 얻어맞고.
그래도 수영이 주먹 같은 거엔 천 대를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꿋꿋하게 계속 놀리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끈질기게 말했다.
“라벨에는 수영이라고 적어줘. 영문으로 말고 한글로 프린팅해서.”
“왜요?”
“네 이름 밟고 다니려고 그러지 뭐가 왜야?”
“으이구!! 진짜!”
“자랑하려고 그런다, 인마. 우리 수영이가 만든 신발이라고. 나한테 처음 만들어준 신발이라고. 이거 자랑하려면 매번 신발을 벗어야 될 텐데 꼬린내 진동하겠지? 다 죽었어!”
수영은 웃다가 화내다가 감격하다가 정신을 못 차리고 돌아갔다.
정스 짐 서울대입구역점 오픈 전에 나온 헬스화 시제품은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나는 박스를 열고 헬스화를 보자마자 수영을 와락 안아주었다.
고마웠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고 그저 고마웠다.
수영은 내가 믿고 기회를 줘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지만, 기회를 얻고도 안주하고 패배의식에 빠져 웅크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수영은 당당하게 일어서 주었다.
그게 고마웠다.
그리고 정스 짐 서울대입구역점의 오픈 당일.
이재인 트레이너를 위시한 정스 짐의 퍼포먼스 군단이 일찍부터 도착해 있었다.
준영 가족의 재기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머슬 퀸도 며칠 전에 미리 한국에 와 잇었고 이제 머슬 퀸이 없으면 밥도 못 챙겨먹는 류아도 머슬 퀸을 따라 왔다.
류아가 온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모든 이목이 류아에게만 쏠리게 될 게 뻔해서 류아는 순식간에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나 역시 누구못지 않게 류아를 구박하면서, ‘왜 왔어!’ 라고 하면서 놀렸더니 류아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서러워하는 바람에 갑자기 내가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감히 류아를 울리다니! 라면서 모두가 대동단결해서 나를 규탄하는 분위기.
어쨌건 오픈 당일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건 아무 문제가 없겠다고 판단하고 우리는 들떠 있었다.
이변?
그런 게 일어날 틈이 있나?
모든 게 순조로웠다.
6개월 이상 장기 회원으로 등록하면 준다는 헬스화의 품질이 시중에 풀린 프리미엄 라인의 다른 어떤 운동화보다도 더 낫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헬스화를 득템하기 위해서 자기들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가족들 이름으로도 회원 등록을 했고 입소문으로 뒤늦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고 머슬 퀸의 제안으로 원래 예정에 없던 머슬 쇼까지 즉흥적으로 펼쳐졌다.
꼭 머슬 퀸만 탓할 수가 없는 게, 이 정도 되면 대충 마무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간에까지 사람들이 새로 모여들고 반응이 좋아서 선수들이 선뜻 무대에서 내려갈 수가 없었는데 퍼포먼스를 한없이 하기에는 체력이 받쳐주질 않았던 것이다.
최고의 상태로 포즈를 취하며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선수들은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수분 조절까지 하면서 극한의 인내를 발휘해 왔는데 시간이 예정되었던 것보다 점점 더 길어지자 몸에 무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머슬 퀸과 이재인이 나에게 다가와서, 남은 시간은 내가 어느 정도 떼우다가 여차하면 그 뒤에는 이재인의 팬 사인회나 그것도 아니면 류아를 구원투수로 등판시키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럴 거면 지금부터 이재인이나 류아를 등판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나의 말은 본전도 못 건졌다.
휘트니스 센터의 오픈인데 최대한 거기에 관련된 이벤트로 시간을 끌어줘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을 생각을 하니 괜히 긴장이 됐다.
언제 왔는지 핫 걸도 깍두기같은 키샤 요원들을 데리고 와서 한쪽에서 구경하고 있었고, 내가 초대한 연우도 수영의 옆에서 얌전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연우라도 좀 말려줬으면 좋겠는데 이럴 때는 내 적군들과 한 마음이 돼서 우와아아아 하고 열렬히 손뼉을 쳐댔다.
자기 남친 몸 까는 게 뭐가 좋다고.
그러면 여기 있는 여자들 절반은 나한테 반해서 바로 넘어올 텐데.
머슬 퀸은 나를 임시로 마련된 스테이지 위로 밀어버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위로 올라갔다.
하긴.
이렇게 대규모로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데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정스 짐 대표가 뭔가 보여주기는 해야겠다는 의욕도 생겨서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서 여러 가지 보디빌딩 포즈를 취해 보였다.
운동은 아무리 피곤해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해 오고 있었고 내가 하는 운동량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프로 선수들 중에도 없었으니 내 근육 상태가 어떻다는 것은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정스 짐 대표라는 말을 듣고 어디 한 번 몸이나 볼까? 하는 식으로 보고 있다가 내가 근육을 긴장시켜 드러내기 시작하자 일제히 집중했다.
백 더블 바이셉스 포즈로 화난 등 근육을 보여줬을 때는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더 커졌다.
내 등이 그렇게 무서웠나?
내가 사이드 체스트 포즈를 취하자 핫 걸이 갑자기 소리쳤다.
“겨드랑이에 양철통 끼우면 그거 구길 수 있나요?”
아놔.
저런 사람은 입구에서 통제를 했어야지.
근데 머슬 퀸과 이재인은 서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 인간들이!!
준영이 이 자식은 벌써 양철통을 공수하러 갔다.
수영은 보이지도 않았다.
준비했던 헬스화가 일찌감치 동이 나서 다른 지점에 있는 걸 우선 받아와야겠다고 하는 것 같더니 그것 때문에 사라진 것 같았다.
믿을 사람은 연우밖에 없는 것 같아서 연우 쪽을 봤더니 가장 열렬하게 물개 박수를 치고 있다.
이재인은 무대 아래에 서서 나한테 코치를 해 주었다.
코치나 마나.
겨드랑이에 끼고 힘을 줘서 찌그러뜨리라는 거다.
그 말을 하려고 굳이 나한테 다가왔다는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준영이는 나한테 너무 큰 짐을 지웠다고 생각했는지 그래도 미안한 기색은 있었다.
그러고는 조그만 양철 휴지통을 무대 위에 스으으윽 올려 놓았다.
무슨 차력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핫 걸이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그냥 할 수 있는 거면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냐면서.
아니! 내가 하겠다고 했어? 자기가 해 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별로 안 어려운 거 아니냐고 김빼는 소리 하고 있고.
제발 쟤 좀 끌어내달라고 머슬 퀸에게 눈짓을 해도, 머슬 퀸은 저 분 이벤트 회사에서 나왔는지 진행 진짜 잘 한다며 좋아하고 있고.
결국 일반인 대표로 키샤의 요원 하나가 선글라스를 낀 채 무대 위로 떠밀려 왔다.
============================ 작품 후기 ============================
오늘 나오는데 어떤 20대 초반의, 게다가 예쁜, 게다가 긴 생머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으면서 걸어가는데 한 눈에 봐도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더니 전봇대를 향해서 그대로 직진을 하는 거예요.
그대로 가더니 전봇대에 머리를 정말 세게 쿵 찧고는 전화기에 대고, 으이잉, 아퍼어어 그러더니 더이상 전진을 못함.
왜 안 가요오, 그러고 전봇대에 시비털고.
이런 일이 실제로 있을 줄이야.
바빠서 거기까지만 보고 바로 와야해서 슬펐음. 말 못하는 전봇대 편 들어주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