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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스노우맨의 은밀한 밤]
“하긴. 뒤를 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하겠지만. 너. 정말로 해 보고 싶어?”
은호 형이 물었다.
그러면서 만약에 일이 잘못 됐을 때는 우리 둘 다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거야말로 의욕 돋게 하는데요?”
“정말로 지금의 상황에는 만족을 하지 못하는 거냐?”
은호 형이 재차 물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가진 자산은 4천억에 이르렀다.
현실 감각?
당연히 없다.
나는 다른 어떤 때보다 더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고 싶었다.
그거야말로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위험에 대한 선호도가 굉장히 높다는 사실을, 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럼 형. 그렇게 웅대한 건 아니라도 작은 해변 하나를 살 수는 있을까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날 거라는 걱정 없이 수영도 즐기고 내가 하고 싶은 거, 아무 거나 할 수 있는 그런 휴양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걸 원해? 좋아. 그건 형이 선물로 해 준다.”
“그런 걸 선물로 한다고요?”
“야, 인마. 꼬로록 가라앉을 뻔한 호텔을 네가 다시 살려냈는데 형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요? 그럼 기왕 선물하는 거. 선물 받는 사람 마음에 쏙 드는 걸로 할 수 있게 제가 힌트 몇 가지를 드릴게요.”
그래놓고 나는 그동안 내가 생각해뒀던 그림을 보여주었다.
주위의 경관은 거의 훼손하지 않고 대 여섯 채의 단독 주택만 조용히 들어서 있고 모래사장에 얕은 물이 찰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웅덩이가 있으면 좋겠다며 구체적으로 그려서 보여주었다.
"웅덩이는 왜?"
"어떤 영상에서 봤는데 그런 웅덩이에서 섹스를 하더라고요. 물 속에서요. 진짜 환상적이었어요."
"정상위로는 못 하겠네?"
"어우. 그럼 여자가 꼬로록 잠기죠. 그러니까 거기서는 그냥 뒷치기 위주로 해야죠."
"왜 쉽고 안락한 걸 놔두고. 참나."
"형. 야외에서 하는 맛을 모르시는구나."
형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뇌물 요구하는 사람의 자센데?”
그러면서도 눈을 빛냈다.
“구미가 당기죠?”
“응! 야. 내가 너를 아는데 임정우. 너. 이런 데에서 놀아도 며칠 안 가서 싫증낼 게 뻔하거든? 일단은 너한테 주는 건데 네가 싫증나면 그때는 우리 이거 가지고 사업하자.”
“제 말이 그 말이거든요. 호텔 여러 채 짓고 손님 많이 모으려고 할 필요 없어요. 그래봐야 힘만 들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거. 돈이 있어도 서두르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거. 그런 걸 만들자는 거죠. 브래드 피트랑 만수르랑 루이뷔통 사장이랑 경쟁 붙게 하고 그 중에 한 사람만 가질 수 있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첨된 한 사람한테는 지상 낙원을 경험하게 해 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해 본 말이었지만 말을 하는 동안 나는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린이 보이는 환상.
그것으로 카린은 폴과 해밀의 앞에서 지상 낙원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나도 능력이 더 정교하게 컨트롤되기만 한다면 가능해질 거였다.
내가 가진 능력은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다 뿐이지, 카린도 인정했다시피 카린보다 한 수 위인 게 분명했다.
“임정우. 나 취하나보다. 기분이 왜 이렇게 나른하고 붕 뜨냐? 네가 말한 그곳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은호 형은 약에 취한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형이, 내가 시험삼아 만들어 보인 환상을 보면서 기분 좋게 잠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응? 이거. 진짜 잘 하면 돈 좀 벌겠는데?’
카린의 대저택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었다.
카린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겠지?
나는 내 턱을 문지르면서 남아있던 와인을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서서히,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했다.
***
내가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근도가 당장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랑 술도 한 잔 같이 안 마시고 그냥 갈 수는 없는 거라면서 당장 맨하탄으로 오라는 것이다.
얘는 아파트 옆 동으로 건너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쉽게 말하더라.
그래도 나 역시 근도에게 전하고 싶었던 스페셜 땡스가 많았던 관계로 근도를 보러 다시 한 번 리얼 그릴 본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와서 리얼 그릴의 정식 코스를 즐겨보라는 말에 그래보자고 했지만 오라는 시간이 어째 영업이 끝난 시간이었다.
무슨 꿍꿍인가 하면서도 근도의 명령을 따랐다.
류아가 공수해준 각종 디자이너 의상들이 전부 다 근도의 집에 보관돼 있었기에 나는 근도의 집에 가서 대충 한 벌을 골랐다.
회색 수트에 보타이를 매고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색해서 한참을 바보처럼 웃었다.
“아, 진짜 개어색하네.”
그래도 나름 멋있어 보여서 사진을 찍어 연우한테 보내줬더니 누구시냐는 답문이 돌아왔다.
이 센스쟁이.
나는 영업이 끝난 리얼 그릴을 찾았다.
다른 곳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고 내가 앉을 자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주방에도 근도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주방 보조들도 퇴근을 시키고 근도가 자기 혼자 나를 위해서 모든 코스를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더 감격스러웠다.
그때 라운지 바 쪽에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내가 일어서서 그쪽으로 가려고 하자 그건 그냥 훼이크였다는 듯이, 내 곁의 한 지점에 불이 밝혀지면서 그곳에 있던 피아노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봐서는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곡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모르는 곡이었다.
경쾌하고 발랄한, 기분 좋은 첫 만남을 하러 가는 남녀 주인공의 배경 음악으로 쓰일만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피아노를 연주하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레이나!”
나는 깜짝 놀라고 반가워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나는 깜찍하게 웃고 연주를 이어나갔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내가 레이나와 어떻게 하고 헤어졌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싸우지야 않았겠지만 냉정하게 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살짝 걱정이 됐던 것이다.
내가 수많은 인간 관계를 그렇게 갑작스럽게 종결시켜 버려 왔기에 그런 걱정이 되는 건 당연했다.
요리를 가져오는 근도에게, 레이나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정찬을 준비한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도 뭔가를 해 줘야겠다고 하더라? 그럼 네가 엄청 기뻐할 거라고 하던데?”
근도가 윙크를 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빙빙은 왜 안 보여?”
“아. 빙빙은 여기에 자주오던 어떤 사업가한테서 청혼 받았어. 그리고 같이 어딘가로 갔는데. 두바이라나? 잘은 기억이 안 난다.”
“그래? 잘 됐네.”
“그렇지. 레이나랑 같이 있고 싶으면 말해.”
“응. 너는 이만 꺼지면 되겠다.”
“개새끼. 크크크큭. 여기서 꺼져야 되는 건 너거든.”
“아. 그러네.”
나는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만큼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드디어 다 먹었다는 듯이 냅킨을 던졌다.
근도는 이렇게 비싼 음식을 나처럼 전투적으로 먹어치우는 놈은 처음 봤다고 말했고 평가를 기대하는 것 같길래 나는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네가 끓여준 라면이 솔직히 더 맛있었다고.
나중에는 네 방에서 라면이나 끓여달라고.
근도는 애초에 너같은 놈한테 뭘 기대하겠냐고 하면서도 굉장히 억울해했고 나는 그런 근도 얼굴을 보면서 흐뭇해 하면서 껄껄껄 웃어댔다.
“빨리 레이나나 데리고 꺼져, 인마! 으이그!!”
근도한테 등을 맞고 레이나와 나온 나는 레이나의 새 아파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말을 하려는 레이나의 입술을 내 입술로 막고 나는 레이나가 입고 있던 옷을 찢었다.
“우으으읍!!”
레이나가 웃으면서 내 어깨를 떼렸고 나는 바지를 벗고서 휘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서버린 녀석을 해방시켜 주었다.
“오늘 죽여줄게.”
“기대할게요.”
그러는 동안 리얼 그릴의 주방으로 수상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