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2 ----------------------------------------------
4부. The other side
“그 아이가. 임정우입니까?”
세영 누나가 물었다.
어머니는 화가 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이 기쁘지 않았습니까?”
세영 누나는 내 앞에서 그런 것들을 물어봐야 된다는 것 때문에 나에게 미안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듯이 누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기뻤어요. 그 사람이 그 소식에 정말 기뻐했거든요.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곧 결혼을 할 거였고. 그 사람 집안의 반대가 격렬했지만 우리는 그걸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설득하지 못하면 그때는 그냥 우리끼리라도 결혼을 하려고 했고요. 내가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그 사람은 나를 봐야겠다고 했어요. 정말 들떠 있었고…. 나한테 바로 온다고 했죠. 일이 끝나지도 않은 때였는데. 나는 그냥 천천히, 일 전부 다 마치고 저녁에 보면 된다고 했어요.”
엄마의 표정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분노가 치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영 누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물었다.
엄마는 떠올리기 싫은 진실과 마주한 것처럼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 사람은 도착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내가 버림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우 때문에. 내가 덜컥 애를 가져버리는 바람에 어린 그 사람한테 그 무게가 너무 컸던 거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좋아했던 그 사람도 결국 그게 얼마나 큰 문젠지 깨닫고 나를 버리기로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기다렸어요. 결국 소식을 알게 됐지만. 그때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한테 오다가. 음주 운전을 하던 사람이 인도로 돌진하는 바람에…. 차에 몸이 밀리다가 대형 매장 쇼윈도까지 끌려가서 차랑 유리 사이에 끼어서, 그 사이에서 온몸에 유리가 박힌 채로 죽어갔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달려올 때까지 운전자는 차를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질렀대요.”
엄마는 할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대로 말을 멈췄다.
희미한 웃음이 엄마의 얼굴에 번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를 죽게 한 게 나라고 생각하면서 나에 대한 원망을 그때부터 쌓기 시작한 것 같았다.
엄마는, 자기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볼 수는 있었지만 일단 아버지의 본가에 연락이 닿은 후로 엄마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지위를 잃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나를 지우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 결정을 하는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에, 엄마는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일이 잘 안 된 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때문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던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중에 뜻을 바꿨다고 했다.
그 분들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고 우리 아버지의 형은 결혼한지 2년이 됐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분들은 내가 그 집안의 유일한 계승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엄마에게 아이를 낳아 키우라고 종용했다고 말했다.
아무 대가 없이 엄마가 그런 결정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는 아마도 돈을 받았겠지만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나를 낳기로 결심했을 때, 상황이 변했다.
큰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내가 더 이상 왜 필요하냐고 강경하게 굴면서 나와 엄마에 대해서 완전히 잊으라고 압박을 한 모양이었다.
결국 엄마는 모든 지원마저 끊겨버린 상태로 세상에 홀로 나서게 된 모양이었다.
그 후에는 나도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엄마는 내 아빠를 만났고 결혼을 했다.
아빠는 나를 귀여워해줬고 나는 아빠를 내 친아빠로 알면서 자랐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미웠다고 말했다.
거의, 단 한 순간도 나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있기는 하지만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기까지 말하고 엄마는 뭐라고 나를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녹? 내가 금속이라면 그 애는 녹? 나한테 들러붙어서 나를 썩게 만드는.”
엄마가 말했다.
“아니. 종양?”
그 말이 이어졌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웃었다.
세영 누나와 카린은 이제 뭘 어째야 좋을지 알지 못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세영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엄마의 기억을 억눌러달라고 말했다.
세영 누나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강력한 최면을 걸었다.
그것까지도 최면의 영역인지에 대해서, 나는 의문을 품었다.
엄마의 의식의 일부를 세영 누나는 완전히 도려내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장면을 끝까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지만 엄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엄마가 나나 다른 사람에게 마수를 뻗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정은 오래 걸렸다.
그것은 엄마의 영혼을 씻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의 기억 중에 나와 관계되는 기억만 지우려고 하니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했다.
세영 누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기억의 일부가 지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신경쓰지 말고 원하는대로 하라고 했다.
나에 대해서 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엄마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라도 좋았다면, 그건 내가 아닐 거였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그 상황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와 카린이 보고 있는 가운데 세영 누나는 엄마의 의식을 걷어내고 그것을 억눌러 밑으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참을 수 없이 끔찍한 두통이 찾아올 거라는 암시도 걸어 놓았다.
세영 누나가 모든 것을 마쳤을 때 나는 가장 먼저 그곳에서 나왔다.
요양원의 관계자들은 엄마에 대해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엄마가 계속해서 여기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너무 많은 자유는 주지 말고,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보살펴 준 것에 대해 앞으로 몇 년은 요양원을 거뜬히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그곳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코너를 돌려고 할 때, 엄마의 방에서 천진한 표정을 한 엄마가 우리를 향해 마구 몸을 들썩이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나는 세영 누나를 바라보았다.
“오래 못 봤던 차가 가는 걸 보고 신기해서 저러시는 걸 거야. 너한테 인사하시는 거 아니야.”
누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도중에,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차를 세우고 누나를 내려 주었다.
정말 미안한데 여기서부터는 누나 혼자서 따로 가면 안 되겠냐고 하자 누나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문질러 주었다.
카린이 나가서 택시를 잡아주었다.
누나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카린과만 남았을 때 나는 화가 나는대로 참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카린은, 오늘만큼은 네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듯이 나를 용납해 주었다.
몇 십 분 정도를 그렇게 쏟아붓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린은, 키샤장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복잡해져버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누구지? 왜 내 주위에 얼쩡거리는 거죠? 그리고 카린이 봤다는, 나처럼 생겼다는 남자는 누구인 거고요? 나한테 형제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요.”
카린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키샤에 찾아가는 건 어때요?”
카린이 물었다.
나는 카린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인 건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키샤장은 키샤의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키샤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의문이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주신 분들 제가 자꾸 감사하단 말씀을 잊어버려서 죄송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이 많은데 자꾸 인사없이 지나가니까 서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쿠폰함 확인한 김에. 히힛.
제가 항상 감사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