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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The other side
얘 말이 맞다고 그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기보다는, 그래, 이 자식 김준위야, 네가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의미가 큰 끄덕거림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당한 김준위씨와는 여러 모로 인연이 깊어서 저도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인터넷 루머로 피해를 당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 정스 짐이 힘을 돕겠다는 취지로….”
내 혀는 내 의지를 떠나서 발성을 해 대는 중.
준위의 선배라는 남자가 준위에게 다가오려고 한 순간 내가 준위에게 다가가 준위의 옆에 섰고 그 남자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준위는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하고 공손하게 자리를 떴다.
그게 단발성의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했기에 대처는 확실하고 빨랐다.
준위의 선배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떠돌던 그 글에 슬슬 다른 관점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준위를 통해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을 통해 얘기가 퍼졌을 것이다.
한 번 의혹이 제기되자 사람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그 남자가 누군지 아는 것 같은데 쪽지로 알려주면 안 도겠냐는 댓글이 한 번 달리자 같은 내용의 댓글이 수 십 개나 연달아 달렸다.
준위의 선배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방관자적인 입장이던, 선배의 처라는 여자가 갑자기 준위에게 연락을 해 왔고 나는 준위의 전화를 대신 받아서 앞으로 이 번호로 연락하지 말고 나한테 말하고 전했다.
한 번 더 준위에게 직접 전화를 하거나 문자나 톡을 보내 괴롭히면 정신적인 손해를 고의로 가한 것으로 간주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거라는 말도 해 주었다.
당신 남편이라는 작자한테도 그 얘기를 꼭 전하라고 말을 하자 그 여자는 어떻게 하면 해결을 할 수 있을지 물었다.
나는 준위와 상의한 적이 없었지만 8천만원에 합의를 할 수 있도록 가운데에서 중재를 해 줄 수는 있다고 했다.
그 여자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경거망동의 대가로 지불하기에는 속이 짤만한 금액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여자를 괴롭히는 게 목적이었으니 그 여자가 많이 괴로워할수록 나의 즐거움은 커지는 거였다.
그 여자는 사흘만 시간을 달라고 했고,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해주었다.
시간을 달라고 부탁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 선동했던 네티즌들 아니겠냐고.
그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것은 당신이 할 일이고 나는 이 불씨를 앞으로 더 키우느냐 저절로 꺼지도록 놔두느냐 그 문제에만 관여하는 거라고.
사흘 후에 돈이 들어왔다.
정확히 8천만원이었다.
나는 준위를 찾아갔고 눈물을 뿌리며 내 목에 매달려 감격할 장면을 상상하면서 준위에게 돈을 주었다.
그런데 김준위 여사는.
이럴 때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고 어떤 반응을 하게 될지 그 자체에 몰두하느라고 정작 자신의 감정을 보일 시간을 놓쳤다.
나참. 어이가 없어서.
“아. 오빠.”
그게, 그 일로 김준위한테서 들었던 말의 전부였다.
아, 오빠라니. 아, 오빠라니.
지가 준 돈을 빼고도 한참을 더 벌어다준 거구만!
준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도 아마 극회로 다시 돌아가는 건 어렵겠죠? 라고 말하는 준위에게, 네가 설 곳은 거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기린극회의 활동을 정스 짐에서 지원해 주겠다고 말해 주었다.
캠퍼스 내에 극회의 정기 공연을 할 수 있는 대형 극장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말하자 그 조건이면 사람들도 자기를 받아줄 수밖에 없겠다고 말하면서 좋아하는 준위.
“너도 돈 내야돼. 너도 이제 부자잖아.”
내가 말하자 준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단원들 밥값이랑 술값으로 쓰게 해 주세요.”
어차피 자기 돈이기도 하고 그렇게 쓰이는 게 더 필요하고 절실할 것 같기도 해서 나는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정스 짐 문화관이 착공되었다.
준위는 자기한테 갑자기 생긴 돈을 보증금으로 해서 근처의 집 하나를 얻어 단원들이 쓸 수 있게 했다.
월 임대료는 여럿이 모아서 내면 되는 거여서 많은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해결이 되는 것 같았다. 고정적으로 나가던 생활비중에 개인당 거의 30만원 이상씩이 굳는 거라서 모두가 준위에게 고마워했다.
그 일로 나는 준위를 다시 보게 됐다.
갑자기 8천만원이라는 돈이 생기면 그걸 가지고 하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유혹에 흔들릴 시간도 없이 바로 그렇게 돈을 쓰는 걸 보면서 연극과 자기 주위 사람들에 대한 준위의 열정이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나는 기린극회 사람들이 정스 짐에 등록하고 싶어하면 전액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기로 하고 대신 정스 짐 직원들이 기린극회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파트너십 비슷한 것을 맺었다.
안 그래도 몸 관리의 필요성을 늘 느끼고 있던 준위와 단원들은, 좋은 시설에서 몸을 만들 수도 있게 된데다 일정수의 고객들도 확보할 수 있게 돼서 즐거워했다.
단원들이 정스 짐에 등록을 하면 피티를 붙여주고 그 피티 비용을 내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했기 때문에 트레이너들에게도 이익이었다.
아무리 지원을 한다고 해도 현장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서 묵묵히 한 걸음씩을 내딛는 사람들의 노고를 전부 다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을 것 같았고 그러는 게 좋았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모든 투자들이 즐거웠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김준위가 마구마구 행복해 하고 있는 이유다.
김준위에게 겨우 풀려나서 나는 핫 걸을 만나러 나갔다.
핫 걸은 문 닫은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나를 불렀고, 우리는 커피숍에 들어갈 것 없이 차 안에서 얘기하기로 했다.
"준비는 된 거예요?"
핫 걸이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냥 알려주세요."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핫 걸이 알려준 것은 내가 잠 못 이루면서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왠지, 나를 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굉장히 잘 사는 사람들일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직에서 은퇴한 할아버지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큰아버지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촌 동생은 어렸을 때 뺑소니 사고를 당해 지금까지 계속 휠체어 신세를 졌고 그때 큰아버지는 범인을 잡겠다고 나서고 큰어머니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고 했다.
큰아버지는 그 일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채 여러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 방면의 재능은 없었던 듯 했다고 핫 걸이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사실이 뭐였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뺑소니 사고 범인은 잡혔습니까?”
“아뇨.”
핫 걸이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계속 더 알아보기를 원하면 말해요.”
그렇게 말하고 핫 걸은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내 얼굴이 전에 없이 굳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핫 걸과 키샤를 동원한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내가 전부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왠지 핫 걸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후에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만약에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연락해요.”
핫 걸이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핫 걸의 차에서 내렸다.
핫 걸의 차가 떠나는 걸 보면서도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강의실로 향하기는 했지만 그날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재경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아마 오늘은 만나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많이 기다렸는데도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유재경은 나한테,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후회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다가 유재경이 괜한 오해를 하는 것이 싫어서 결국 말을 해버렸다.
오늘 어쩌면 나는 처음으로 내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게 될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