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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잇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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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는데 나는 동아리 모임이 늦게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번처럼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쉬웠던 학기는 없었다고 선배들이 입을 모아서 말을 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다닌다는 자부심 같은 것도 없다.
문 닫히기 전에 들어가지 못하면 좀비처럼 떠돌아 다녀야 돼서 불편한 것만 많은 것 같은 기분이다.
나를 데려다준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어차피 이 시간에는 사람들도 많고 해서 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나는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정우 오빠한테나 내가 오징어 취급을, 그것도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오징어 취급이니까그냥 꼴뚜기 정도 되나?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지 내가 원래 어디가서 이런 대접을 받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학교 홍보 영상 모델로 발탁돼서 광고도 찍고 그것 참 내 입으로 내가 자랑하는 것 같아서 쑥스럽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그렇게 터덜터덜 기숙사로 가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오빠가 오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반가워서 오빠를 부르려고 했는데 오빠는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오빠는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 사자 같았고 다른 여자들은 오빠의 총애를 받고 싶어하는 암사자들 같았고 같이 가는 남자들은 그냥 딱 사자무리의 숫사자들처럼 그렇게 보였다.
오빠는 준위 언니하고 얘기를 했는데 준위 언니 말고 다른 여학생들도 오빠하고 얘기를 하면서 막 웃어댔다.
오빠도 가끔 여학생들을 보면서 웃으면서 얘기를 했다.
학교 앞에 있는 원룸 건물에 그 학과 학생들이 대거 들어가서 산다더니 아마도 그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기분이 상해버렸다.
오빠한테 내가 과연 무슨 존재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조금이라도 어리고 예쁠 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 게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빠를 좋아하는 다른 언니들이라면 더 나이가 들어도 홀로서기도 가능할 것 같은데 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빠의 주위에는 항상 새로운 여자들이 있었고 오빠는 자기한테 오는 여자는 말리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 같았다.
내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다가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잠시 후에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선배와 친구들을 만나러 술집으로 들어갔다.
“아이구. 해미가 술 마시자고 다 하고. 무슨 일이래?”
선배가 말했다.
“기분 꿀꿀해서요. 술 사 주세요. 술 마시고 싶으면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인마. 하나씩 불러야지. 한꺼번에 이렇게 전부 불러버리는 건 반칙이잖아. 이렇게 해서 친해질 기회나 있겠냐?”
어쩌다 물주로 몰린 것 같은 선배가 말했다.
선배들이랑 친구들은 계속해서 나한테 술을 권했고 나는 기분이 그래서 그랬는지 평소의 주량보다 훨씬 더 많이 마셨다.
“해미 주당인데?”
“오오오. 해미 잘 마시는데? 술꾼이네. 술꾼.”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같은 학과 친구가 내 옆으로 왔다.
정민이다.
언젠가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 애였다.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애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민이는 나한테,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고 정우 오빠가 그렇게 한가한 몸이 아니라서 만나게 해 주질 못했더니 정민이는 내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로 자기가 그렇게 싫은 줄 몰랐다고 혼자 막 좌절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부터는 그냥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와 있었다.
“천천히 마셔, 인마. 그러다 취하겠다. 안 좋은 일 있어?”
정민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내가 상당히 취했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가 됐다는 거지 정신이 말짱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너 혼자 갈 수는 있어? 그보다 너 기숙사에 있지 않아? 문 닫힐 시간 돼 가는 거 아니냐?”
정민이가 말했다.
“몰라. 상관없어.”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우 오빠가 여자들이랑 같이 가는 걸, 게다가 웃으면서 얘기하면서 가는 걸 보고 난 후로 나는 쭉 기분이 나빴다.
나한테 그 말을 해 준 친구는 거의 목숨을 걸고 말을 해 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선배들은 나를 오늘 들여보내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먹일 생각을 한 것 같았다.
1차는 대충 여기에서 정리를 하고 자취하는 선배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멤버만 남겨놓고 다른 사람들은 보내려는 분위기였다.
정민이는 내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배들은 그런 정민이에게, 자꾸 그렇게 분위기 깰 거면 그냥 가라고 했고 내 친구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면서 일어섰다.
우리 스마트폰이 같은 기종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스마트폰을 가져갈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정민이는 내 스마트폰을 가지고 나갔다.
그런데도 나는 말도 안 되게 취한 상태여서 그런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었지, 왜 내껄 가져가냐고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저 힘이 들었고 슬펐고.
그러다가 머리가 쿵,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로 떨어졌다.
잔이 떨어지면서 깨지는 소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직원이 와서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고 바닥을 닦으면서 화를 내는 소리.
그런 것들이 마구 섞여 들려왔다.
누가 내 몸을 부축했다.
내 옷은 내가 쏟은 맥주로 젖어 있었다.
나를 부축하는 손길이 누구의 손인지는 모르겠는데 선배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몸을 가누어 보려고 했다.
손이 허리로 왔다.
내가 정신없이 취해있기는 했지만 손이 자꾸 내 몸을 더듬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손 치우세요. 제가 갈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이런 꼴로 어딜 간다고 그래?”
점잖게 타이르는 목소리로 손을 계속해서 올리려는 선배.
나는 그 손을 잡아서 떼내려고 바둥거렸다.
“정민이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 거예요.”
“기숙사 문도 닫혔잖아. 어디로 가겠다는 건데. 그냥 나가서 바람 조금 쐬고 술 깨고 동아리방으로 가자.”
화장실에 간다고 간 정민이가 빨리 와 줬으면 했는데 정민이는 오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바뀐 것도 모르고 그걸 가지고 그냥 간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는 겁이 났다.
내 힘으로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내가 나를 망쳐놨다는 게 화가 났다.
나는 선배들 시선이 내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맥주에 젖어 윤곽을 드러내버린 셔츠를 억지로 잡아 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허우적거리고만 있을 뿐이었고 셔츠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정민이좀 불러주세요. 집에 갈 거예요.”
그러고는 내가 직접 정민이를 찾으러 가겠다고 화장실로 간다고 난동(?)을 부렸다.
“거참. 전세냈냐? 뭘 이렇게 떠들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사나운 목소리.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오빠다.
오빠가 왜 여기에 있지? 라고 생각하는데 오빠 옆에 정민이가 서 있었다.
손에는 내 스마트폰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정우 오빠가 그대로 다가오더니 내 가방을 챙겼다.
“손해미는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오빠가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야?! 네가 불렀어?”
선배중 하나가 정민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정민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나가다가 봤습니다. 해미 같아서 들어와 본 거고요. 해미 남자친굽니다. 그러면 해미 데려갈 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요. 술값은 내가 계산하고 나가겠습니다. 해미 술 약하니까 다음부터는 적당히 권하거나 웬만하면 해미를 술 자리에 안 불러주면 좋겠네요.”
정우 오빠는 자기가 할 소리만 하더니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서 턱받이를 해 주듯이 내 셔츠 목 부분에 끼우고는 그대로 내 몸을 가렸다.
“미안한데 계산 좀 해 줄래요?”
오빠는 정민이한테 카드를 내밀었고 정민이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를 부축해보려고 하더니 후우우우, 하고 화가 난 것처럼 한숨을 쉬고 나를 한 번 노려보았다.
이럴 때야말로 취한 척 해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나는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늘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