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1 ----------------------------------------------
소코트라
핫 걸은 나를 따라오려고 했다.
어차피 그곳에는 사바스가 없으니 그 사람들의 이송은 김 경장에게만 맡겨도 된다고 했다.
핫 걸은 자기라도 나서서 우리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사바스가 인질들을 상대로 벌인 잔혹한 짓을 봐버린 후라서 핫 걸은 나를 그냥 순순히 보내주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대로 우리끼리만 그곳에 가는 건 자살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핫 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차에 탔다.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핫 걸을 말로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근도와 카린도 차에 올랐다.
핫 걸은 자기도 차에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핫 걸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핫 걸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오다가 멈췄다.
차를 가지고 나를 쫓아와야 하는 건지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데려가려면 차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돌아오라고.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
핫 걸이 소리를 지르다가 지치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짚는 게 보였다.
핫 걸은 우리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쯤 핫 걸의 먼지묻은 군화에 굵은 눈물방울들이 후두두둑 떨어지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안 멈추고 끝까지 달립니다."
카린을 보고 말하자 카린이 피식 웃었다.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합니까?"
카린이 말했다.
"근도한테 말한 겁니다."
뻘쭘해서 둘러댔더니 근도가 깔깔거렸다.
"미친 놈. 언제부터 네가 나한테 존댓말을 했는데?"
하여간.
어쨌거나 우리 세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우리의 그 웃음이 세 사람의 얼굴에 그대로 남은 채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한참을 달렸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될 정도로 지형은 점점 더 험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곳에 다다랐다.
"저긴가봐."
근도가 말했다.
우리는, 흙벽으로 만들어진 호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텔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곳이었지만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는 훌륭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바스의 소굴에 불과했다.
“안에 있는 사바스 용병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내가 물었다.
“해밀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했지만 사바스측에서 경계를 해서 그것까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이런 작전에는 많아야 열 명 내외가 투입될 겁니다. 현지에서 구한 용병들까지 여기로 데리고 왔을 것 같지는 않고요.”
카린이 말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몇 명입니까.”
카린이 나에게 물었다.
“아까 나무에 묶여있던 사람들을 빼면 열 다섯 명 이내일 겁니다.”
내가 말했다.
김 경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현지에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은 납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행사를 위해서 이번에 한국에서 온 임직원들만이 납치를 당한 거라고 했다.
거기에 아버지와 연우, 그리고 은 과장님이 포함돼 있었다.
“인질과 인질범 두 그룹을 분리하기만 하면 쉬워질 겁니다. 사바스만 한 곳에 몰아 놓으면 그 놈들의 공포가 그 놈들을 잡아먹게 해 버릴 수 있을 거예요. 몇 시간 후면, 지금까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살한 놈들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여기는 관광 산업으로 유명해지겠죠. 귀신 들린 곳이라거나 그런 이름으로.”
카린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 몸을 숨기고, 말 그대로 내 몸을 그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도록 숨기고 들어가서 사바스들만 한쪽으로 모을 수 있다면 나머지는 카린의 뜻대로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식 제어 능력면에서는 내가 카린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카린같은 악마적인 창의력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 사바스 용병들에게 내가 직접 손을 대는것보다는 카린에게 맡기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옥을 창조해내는 일에 카린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준비됐냐, 최근도?"
내가 묻자 근도는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는 여기에 세워두죠.”
카린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렸다.
“내가 먼저 가서 그럼. 두 그룹을 분리해 놓겠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나는 몸을 날렸고 내가 서 있던 그 자리에는 작은 모래 회오리가 일어나다가 가라앉았다.
***
사바스 용병의 막내인 델마는 방금 전에 자기 눈에 뭔가가 잠깐 보였던 것 같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에 온 이후부터 줄곧 씹어댄 카트 때문에 헛 것을 본 것 같다며 그냥 고개를 젓기만 했을 뿐 그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 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옆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두 사람만이 그곳에서 인질을 지켰다.
인질들은 끔찍한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이후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잠시 한 눈을 판다고 해도 도망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소리를 내는 사람은 사바스의 두 용병 델마와 글랜 뿐이었다.
글랜은 몇 명을 밖에서 더 죽이고 시체를 사막에 던져놓고 오는 게 더 극적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살려서 데리고 있어봤자 귀찮기만 하다는 말에 델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알아듣고 그런 건지, 인질 중에 40대 초반의 남자가 갑작스럽게 패닉에 빠지는 것 같다가 바지에 진한 얼룩을 만들어내면서 오줌을 지렸다.
그러고는 그게 도화선이 된 것처럼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글랜이 천장에 대고 M16을 갈긴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던 남자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다음에는 네 차례다. 시험해 봐도 좋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그 말에, 정신 나간 듯이 소리를 질러대던 남자는 소리를 뚝 그쳤다.
글랜은 여기에 붙잡혀 온 인질들이 과연 질 브렛의 실종에 책임있는 놈들을 불러들일 수 있을지 의심했다.
사나에서 일어난 대규모 납치 사건에 대해서 국제 사회가 이렇게까지 잠잠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사나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는 글을 올렸을 때 그 글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건 의도적으로 누군가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 사회가 이렇게 힘을 합쳐서 하나의 뜻으로 뭉칠 때도 다 있었나 할 정도였다.
글랜은 자기들의 상대가 생각보다 거대한 조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질 브렛은 그냥 사라져 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사라진 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 말고 다른 것을 뜻할 수 없었다.
질 브렛이 데려간 다른 두 사람도 사바스가 자랑하던 최정예였다.
세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 무서울 것이 없었고 수행하지 못할 작전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세 사람이 사라진 것으로 인해서 사바스의 전력 5퍼센트 이상이 손실됐다고 자체적으로 평가가 될 정도였다.
누가 그들을 데려갔다는 건가.
이렇게 요란하게 사나를 들쑤셔놨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글랜은 점점 초조해졌고, 그의 인내심은 곧 한계에 이르렀다.
글랜의 M16이 다시 한 번 불을 뿜었다. 탁자가 파편을 튀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한 사람을 죽일 작정이었다.
장난이나 하려고 너희들을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글랜은 누가 좋을지 생각하면서 총구를 겨눈 채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들과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글랜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그냥 마음에 안 들어.
글랜은 그 여자를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자 중년의 한 남자가 그 여자 앞으로 나오면서 그 여자를 자기 등 뒤로 감췄다.
여자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