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2 ----------------------------------------------
소코트라
“오오오오. 꽤 감격적인데? 걱정할 것 없어. 둘 다 죽여주지, 뭐.”
글랜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이번에는, 그들 곁에 서 있던 젊은 여자가 두 사람 앞으로 튀어나왔다.
글랜은 한 번 피식 웃고, 그게 소원이면 바로 죽여주겠다고 말했다.
글랜은 그들의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총구를 겨누면서 글랜은 그들의 공포심이 한껏 끌어 올려지는 것을 구경했다.
"어때. 스릴있지?"
글랜이 말했다.
"바이."
글랜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글랜의 총은 발사되지 못했다.
글랜은, 대기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그대로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숨을 쉬기도 벅차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주어 잡고 있지 않았던 총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저만치 밀려갔다.
글랜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돌려볼 생각은 아니었다.
방향조차도, 글랜이 원했던 그 방향이 아니었다.
글랜의 목이 한 바퀴가 돌아간 채 다시 뒤를 보고 멈추었다.
“오, 오, 마이, 오오오, 마이, 가아아앗!!”
델마는 자기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목 뼈가 부러진채 돌아간 얼굴이 글랜의 목 위에 얹어져 자신을 보고 있었다.
델마는 그때 자기가 본 것을 말했어야 했다.
한 남자가 순식간에 몇 십 미터를 달려오더니 그 후에는 눈 앞에서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그게 아무리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 같았어도 그때 말했어야 했다.
델마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눈 앞에서 글랜이 당하는 것을 봤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총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인질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도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은 과장만이 남편과 연우를 데리고 슬그머니 뒤쪽 통로로 움직였다.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도 은 과장이 팔을 잡아 당기자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은 과장의 눈짓에 따라 움직였다.
은 과장은 자기 귀에 들려왔던 말이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을 데리고 커튼 뒤쪽으로 나가라는 음성이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알았다.
어깨에는 아직도 그 손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엄마, 라고 부르던 마지막 말이 왠지 은 과장을 더 서두르게 했다.
자기를 믿는 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은 과장은 남편과 함께 신중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커튼 뒤로 내보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움직여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델마는 인질들이 뒤로 도망치는 것을 봤지만 지금은 자기보다 작은 사냥감을 쫓을 때가 아니라 자기를 노리는 맹수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겨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클클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면서, 다른 방에 있던 동료들이 들어왔다.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예멘은 술이 유통되지는 않지만 반입은 가능했다. 이들이 작전에 투입될 때 잊지 않고 챙기는 것 중 하나가 술이었다. 그들은 손마다 술병을 들고 그것을 알뜰하게 비워가면서 웃음 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말이야. 그때 내가 말을 했지.”
큰 목소리로 지껄이면서 뒤따라오던 동료들을 보고 웃던 빌리 번스는 그들이 얼어붙은 듯이 바닥을 보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글랜을 보았고 그들의 시선은 금세 델마에게도 향했다.
“델마….”
그러나 델마는 변명도, 설명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이 안에 그 존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다 어디갔어. 델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빌리 번스가 델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적어도 한 놈은 살려놔야 합니다.”
그 말이 어디에서 들린 건지, 누가 말한 건지도 알지 못한 채 사바스 용병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어가 아니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중 태반은 그게 한국말이라는 것도 몰랐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놈들을 놓친 거야? 놈들이 이런 거냐고! 정신차려, 델마!”
빌리 번스가 소리를 질렀지만 델마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헛 것을 본 것 같은 멍한 눈이었다.
"뭘 멍청하게 서 있어! 도망친 놈들을 잡아와. 쏴서 죽여버려도 상관없어!"
빌리 번스가 소리를 지르자 그 옆에 멍청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도에서 그쳤다.
그들의 눈 앞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그 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짙은 회색 수트 차림의 동양인이었다.
누가 이런 곳에 오면서 저런 걸 입고 온다는 말인가.
당연히 수트는 모래바람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남자는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우아하게 그들 앞에 섰다.
“저건 또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술병을 내던지고 넬리 우드가 무작정 카린에게 총을 겨누었다.
“멍청하고 가소롭군.”
카린은 웃음을 지었다.
넬리 우드는 갑자기 극도의 자기 혐오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감정이 마구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몇 십 년 동안 울어본 적이 없었던 그는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넬리 우드로부터 시작해서 전염성 높은 병균처럼 모두에게 순식간에 옮겨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방 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깍지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그것이 카린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앉아있던 남자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질 브렛이었다.
사바스의 용병들은 갑자기 나타난 질 브렛을 보고 동요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반가워하고 기뻐했지만 기쁨의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질 브렛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들고 있던 소총의 각도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두 손을 들었다.
질 브렛이라면 아무 경고도 없이 등에 대고 총을 휘갈길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들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질 브렛이 겨눈 총이 녀석들의 이마 정중앙에 닿았다.
질 브렛은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질 브렛을 상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촉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정작 그 부분의 간극을 메운 것은 그들 자신의 상상력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에 쓰러진 질 브렛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던 그였다.
사람 얼굴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맞아 잔뜩 부어오른 살덩어리를 얼굴에 붙인 것 같은 질 브렛이 비굴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사, 살려줘!!”
그들의 눈 앞에서 질 브렛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들은 총을 들지도 못했지만 자기들이 질 브렛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질 브렛과 함께 사라졌던 다른 동료인 팀 모디와 유진 하빗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바스의 용병들은 이제 다시 돌아온 동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가워해도 되는 건지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심장은 터질듯이 요동쳤고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료들이었다.
게임처럼 장난스럽게 맞춰서 죽여버릴 수 있는 타인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팀 모디는 미국인 인질처럼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불에 태워졌다. 실내에 어떻게 나무가 생겨났는지, 누가 거기에 불을 붙였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거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없었다.
일단 인식이 제어된 후부터는 의문을 품을 수가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유진 하빗은 용혈수 꼭대기에서 떨어졌다.
그들이 일본인 인질을 죽인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했다.
자기들이 그 세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눈 앞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각 사람을 공격했을 때 그들은 살기 위해서 질 브렛과, 팀 모디, 유진 하빗을 죽였다. 그들은 되살아난 망령을 죽인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