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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코트라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 건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동료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먹과 칼을 휘둘렀다.
하나 둘씩 바닥으로 쓰러지면 그 몸 위에 올라타서 확실하게 목을 잘라버렸다.
망령이 되어 되살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우의 일행을 안전하게 도주시키고 그곳으로 들어오던 근도는 카린에게 제지당했다.
카린은 근도도 그 환상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근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근도는 그대로 들어와 버렸고 자기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근도의 눈 앞에서 사바스의 용병들은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면서 칼을 휘둘렀다.
싸움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총은 전부 치워진 후였다.
“두 사람으로 좁혀지겠군.”
카린이 말했다.
근도는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 정도로 거창하게 구토를 하고 서 있었다.
빌리 번스와 넬리 우드가 피바람이 몰아친 곳에서 헉헉거리며 허리를 세웠다.
그들의 주먹은 살갗이 벗겨지고 넬리 우드는 안에서 부러진 뼈가 창처럼 살을 찢고 나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카린은 인식 제어를 멈추었고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자기들이 벌인 짓을 깨달았다.
“네…, 넬리…!”
빌리 번스가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바라보다가 울먹이며 넬리 우드를 불렀다.
넬리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질이…. 질이, 나를 공격했어. 질과 팀, 유진이 나를….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어쩔 수 없었어!”
넬리 우드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바닥에 쓰러진 제 동료의 시신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재빨리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옷이 비로 젖어 있었다.
불길한 것을 만진 것처럼 손을 털어내고 주위를 둘러보던 넬리 우드가 카린과 근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넬리 우드를 보고만 있던 빌리 번스 역시 그들을 보았다.
두 사람은 그제야 그들의 존재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화를 내지도 못했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정우는 그들의 앞에서 자신의 몸을 감추었다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눈 앞에서 유령을 봤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어떡할까요. 저 사람들. 살려둘 필요가 있습니까?"
정우가 카린에게 물었다.
“사바스의 실체와 사바스가 예멘에서 한 일에 대해서 증언할 증인이 필요합니다. 저 둘은 살려놔야 될 겁니다. 이 일이 사바스가 벌인 짓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폴 콜드먼은 크게 타격을 입을 겁니다. 폴 콜드먼을 내 마음에 들게 꾸미려고 내가 얼마나 현질을 열심히 했는데 이제와서 폴을 잃을 순 없죠.”
카린이 말했다.
사바스의 두 용병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다.
빌리 번스와 넬리 우드는 자기들이 이 싸움에서 패했다고 생각했다.
아직 싸울 힘을 다 잃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우는 그들을 바라보고 강력한 암시를 걸었다.
빌리 번스와 넬리 우드는 자기들이 수 백 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서 간신히 발을 딛고 서 있다고 느꼈다.
등에는 깍아지른 것 같은 암벽이 붙어있고 그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찔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으며 자기들은 발 하나도 다 올려놓을 수 없을만한 좁은 틈에 겨우 발 뒤꿈치 정도나 간신히 걸치고 있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발을 움직이면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쳐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몸에서 땀을 흘렸고 자기들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잡을 수 있는 것도 없고 순식간에 균형을 잃을까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넬리 우드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고 앞으로 비틀거렸다.
"으아아아아악!!!"
넬리 우드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고작 바닥으로 넘어진 것 뿐이었는데도, 그는 의식을 잃었고 그의 몸 여기저기가 찢기면서 피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더이상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카린마저 얼굴을 찡그렸다.
임정우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린은 조금 전 잠시나마 정우가 자신의 모습까지 같이 감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린이 나타났을 때 사바스 용병들은 카린을 발견하지 못했다.
카린은 그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에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모습이 같이 가리워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정우의 하이드 스킬은 어느새 거기까지 발달이 돼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래 지속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바스 용병들이 카린을 이내 발견한 것을 보면.
'그래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까지 자기 능력의 영역 안으로 잠깐동안은 거둘 수 있다는 거잖아?'
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정우라는 남자의 정체가 도대체 뭔지, 이 인간의 끝이 어디인 건지 자기가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지.
카린은 혼자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사바스 용병 중 한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를 쏟는 것을 보고 세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 당황했다.
카린이 나를 보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물으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놈의 몸에서 피가 솟구친 게 정말로 나 때문인 거라면 나야말로 놀랄 일이었다.
“저 놈들은 나한테 맡기기로 했잖아. 너는 연우씨한테나 가 봐.”
정신을 차린 근도가 말했다.
나는 정말 근도가 그 두 사람을 맡을 수 있는 건지 몰라서 카린을 바라보았다.
카린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커튼이 거센 바람에 휘말리는 것처럼 위로 말려올라가는 것 같더니 그 아래에서 털뭉치 한 덩어리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깜짝 놀란 근도가 칼로 치려고 했을 때 내가 소리를 질렀다.
“안돼. 최근도. 우리 므로야! 연우 므로!”
근도는 내 말을 듣고 간신히 팔을 치웠지만 아직 칼은 나와있는 상태였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 므로를 안으려는데 므로는 이리 저리 피하면서 근도에게 매달렸다.
므로가 주인도 아닌 근도한테 왜 그러는 건가 하다가 나는 므로가 근도의 얼굴과 목을 마구 핥아대는 것을 보았다.
“므, 므, 므로야, 인마……!!”
아무 것도 모르는 카린은 그런 므로를 멍하니 보고 있기만 했다.
우리 앞에는 아직 빌리 번스와 넬리 우드가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은 우리에게 아무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말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지금부터 겁을 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근도였다.
나는 카린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도망가야 됩니다!”
카린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내 말대로 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카린을 완력으로 잡아당겼다.
카린은 버티려고 했고 나는 카린을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섭섭하더라도 나중에는 나한테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므로는 아예 작정이라도 한 듯이 근도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근도의 얼굴을 제 타액으로 범벅을 만들어 놓았다.
"임정우! 이 자식 왜 이래! 데려가, 으윽!"
근도는 근도대로 므로를 떼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근도야. 므로 연우꺼다. 우리 므로 죽이면 안 돼."
나는 겨우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카린을 끌고 밖으로 나깄다.
“므로, 므로, 므로, 므로, 므로!!!”
나는 절규하듯이 외쳤다.
므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를 향해 달려나왔다.
카린도 정신을 차렸고, 내가 자기를 때렸다는 걸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문을 밖에서 걸어잠갔다.
그게 의미없는 짓이라는 건 안다.
근도가 그 대단한 오른쪽 주먹으로 치기만 해도 그건 산산조각이 나 버릴 거였다.
그래도 일단 정신적으로 위안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