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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Dark
“아뇨. 아뇨. 감사해요. 근데…. 혹시 밖에 저 도와주시는 언니가 있으면…. 좀 불러주시면….”
유소이가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고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금방 차분하게 대응을 했다.
쓸데없이 문제를 키우고 소리를 질러대지 않아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엘리베이터에서도 언니를 부를 때 듣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좋았다.
침착하고 신뢰를 주는 목소리다.
“아아. 그, 언니라는 사람이 아까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왔던 그 분 말하는 거면. 엘리베이터 타고 가던데요?”
내가 말했다.
왜 이렇게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지.
이쯤되면 나도 허언증 의심해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아아….”
유소이의 얼굴이 급격히 붉어졌다.
당혹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하세요.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유소이는 두 손을 저었다.
“괜찮은데.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요.”
“아니예요. 정말 괜찮아요.”
유소이가 연신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유소이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쓸모없는 간병인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같이 있었으면 화장실은 데려다 줬겠지 하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유소이의 표정을 봤을 때도 그쪽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유소이를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가 있었다.
붕대로 눈을 감아놔서, 볼 수 있는 거라곤 동그랗게 예쁘게 생긴 이마와 귀여운 콧날,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과 가느다란 턱선뿐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눈 빼고는 다 보인 거네.
하지만 눈을 못 보니까 얼굴을 봤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나는 유소이의 얼굴을 영영 모를 것 같았다.
아마 알아보지 못하겠지?
체구도 보통이고 머리 모양도 특별할 게 없다.
그냥 흔한 길이, 흔한 스타일.
“내가 여기 있는 거 불편해요? 동생 친구들이 도무지 갈 생각을 안 하네요. 그만큼 죽치고 있었으면 이제 좀 가지. 병문안 갈 때는 보호자 생각도 해야 겠더라고요. 나가 있으려고 했는데 휴게실도 춥고 있을 곳이 마땅칠 않아서요.”
어쩔 거야. 거짓말이 술술 나와.
“어. 그럼 여기에 계세요. 저는 상관 없어요. 곧 언니가 오긴 할 텐데 그때까지는. 아니. 언니 와도 계셔도 되긴 할 거예요. 의자 있죠? 없나? 처음에 여기 왔을 때 봤던 것 같긴 한데….”
유소이가 다시 한 번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얼어죽는 줄 알았어요. 날씨가 갑자기 확 추워졌네요.”
나는 유소이가 철회하지 못하도록 곧바로 인사를 했다.
당신이 지금 나를 못 봐서 그렇지 나는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 했던 사람이라는 듯이 목소리는 굉장히 불쌍하게 냈다.
“네.”
유소이가 웃었다.
“언니라는 분 왜 찾았는지. 나한테 시키면 되는데요. 부탁하려고 했던 거요. 정말 편하게 말해도 돼요.”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했고 의욕이 돋기도 했고 친해지고 싶기도 해서 나는 다시 한 번 유소이를 설득했다.
“아니. 별 건 아니고…. 자꾸 열이 나서 머리를 묶어버리고 싶어서…. 목에 땀이 나고 머리카락이 달라붙는 것 같아서요. 그게 싫을 때가 있거든요.”
유소이가 말했다.
"아아. 머리카락이 목에 붙는 게요?"
그런 기분을 내가 알 리가 있나.
그게 갑자기 싫을 때도 있는 거구나.
그게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지만 목에 두른 털 목도리가 갑자기 귀찮게 느껴질 때랑 별로 다를 것도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가 해 줄게요.”
내 주둥이는 이미 벌어져서 그 말을 내뱉고 있었다.
뭐래? 너 여자 머리도 묶을 줄 알아?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유소이는 난감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영 안 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금방 언니가 올 거니까 그때 해 달라고 할게요. 정말 괜찮아요.”
유소이는 나를 말려야한다고 생각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끈만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마구 의욕이 생겼다.
"서랍에 있어요?"
"어. 그럴 것 같긴 한데.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제가 왔을 때 거기다 둔 것 같긴 한데.근데 정말 이런 걸 부탁드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갈 데도 없고요. 이런 거라도 도와드리면서 있으면 좋죠. 그리고 내가 원래 착해요."
여기저기서 성토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네가 착하다고?
임정우 네가?
네가?
왠지 막 메아리쳐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머리끈을 찾아 협탁을 뒤졌다.
링거대가 귀찮게 자꾸 걸렸다.
“아. 그리고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링거대가 발에 걸리겠더라고요. 그러다 넘어지면 안 되잖아요.”
나는 생각난 김에 유소이에게 말해주었다.
“아. 그랬어요? 언니가 치워주고 갔는데 혼자 있을 땐 조심하기는 해야겠네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갑자기 앞이 안 보이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유소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구김이라곤 없는 것 같은 밝은 웃음이었다.
“눈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이런 거 물으면 안 되려나?”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간헐성 외사시래요. 저도 잘 몰랐어요. 불편한 것도 몰랐고요.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초점이 고정이 안 된대요. 아빠도 잘 몰랐는데 친구들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병원에 와 봤더니 더 늦기 전에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한 거예요. 일찍 발견했으면 수술까지는 안 해도 되는 모양이었는데.”
그렇게 말해놓고 유소이가 찡긋 웃었다.
자기가 둔해서 일이 커졌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학교 다닐 때 딴 데를 본다고 지적을 자주 받기는 했었어요. 그때마다 억울하다고만 생각했지 눈에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유소이는 여전히 구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아….”
나는 그런 말을 그렇게 밝게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라면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지적을 받았다면 그냥 참고 넘기지 못했을 것 같은데.
“전신마취를 해서 며칠간 더 입원을 해야 된대요. 근데 이렇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상태로 이 삼일을 더 있을 생각을 하니까 그냥 부분 마취를 할 걸 그랬나보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소이가 손으로 침대를 더듬으면서 말했다.
“올라갈래요?”
“어. 네. 좀 어지럽네요.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안 느껴지니까. 창틀이라도 잡고 있으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어서 내내 벽에 붙어서 생활하는 중이예요.”
유소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력을 잃은 게 아니라 시각장애인의 삶을 잠깐 체험하는 것 같은 어린애같은 천진함이 표정에 묻어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오래 유소이를 괴롭힐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수술은 잘 됐대요?”
“네. 몇 번 더 하긴 해야 된다는데. 바로 표시가 나거나 그러는 건 아니고요. 원래 표시는 잘 안 났어요. 저랑 오랫동안 같이 지낸 친구들도 잘 모르다가 시험기간에 제 눈이 좀 이상해 보인다고 그런 거고….”
“다행이네요. 시력이랑 직접 관계되는 문제도 아닌 거고 그냥 초점이 고정되지 않아서 수술을 받은 거라면.”
“네. 그렇죠. 근데 동생분은 어디가 아파서….”
음.
일단 여기에 입원한 동생이라면 해민데 장염이라고 해야 되나?
입원 기간을 잘 말해 놓지 않으면 유소이를 따라다니는데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그냥 지금은 이것저것 검사해 보고 있어요.”
“아아.”
그런 무성의한 답에 아아, 라고 말해주다니.
나는 유소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간헐성 외사시라는 게 뭔지 모른다.
평소에는 구분이 잘 안 되고 피곤할 때만 초점이 안 맞는다고 했으니까.
음.
그래도 상상은 잘 안 된다.
나는 저 붕대가 풀리면 어떤 얼굴이 나타날지 점점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