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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Dark
소이의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여자를 칠 것 같았고 나는 그 사이에서 두 사람 사이를 떼놔야 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예요?”
여자가 발악을 하듯 소리쳤다.
“언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으면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전부 복기시켜 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때는 나도 진지하게 임할 거라는 걸 알아야 될 겁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말하자 여자는 나를 노려보았고, 아마도 나 따위가 무슨 수로 그런 것들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누굴 바보로 아는 모양인데. 나는 거짓말 한 적 없어요!”
여자는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버텼다.
“아까 무릎 꿇은 건 뭔가.”
소이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전무님이 제 말은 들어주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였어요.”
“정말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소이의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저는 제가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말에 여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치킨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핫 걸에게 전화를 걸어서 현 비서라는 여자의 통화기록을 수중에 넣을 수 있겠지만 비밀에 싸인 정보기관이 사사로운 목적으로 남의 정보를 유출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결국 나는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게임을 끝까지 끌고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고 현 비서를 바라보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죠.”
나는 현 비서에게 말했다.
소이의 아버지는 내가 하는 말을 들었어도 그게 인식의 제어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저 내가 현 비서를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갑자기 현 비서가 내 앞에서 굴복했고 자기 잘못을 인정했지만 소이의 아버지는 그게 현 비서의 자발적인 결정으로 인한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 비서는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은 것처럼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전무에게 사과했다.
소이의 아버지는, 사표는 즉각 수리될 거라고 말했다.
현 비서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는 혼자서 병실을 지키고 있을 유소이에게 돌아갔다.
유소이는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궁금한 듯, 누구냐고 물었다.
“누군지 말 안 해 줄 거다.”
내가 말했더니 유소이가 피식 웃었다.
소이의 아버지도 곧 따라 들어왔다.
“저기…. 그게 말입니다. 아까 임정우씨라고 했습니까?”
소이의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혹시 정스 짐의 공동대표인…?”
“아…. 그건 어떻게 아시는지….”
이제 얼굴도 많이 팔려서 아무데서나 사기치고 다니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맞나보군요. 반갑습니다. 평소에 정스 짐의 독특한 행보에 관심이 많아서 주의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몰래 벤치마킹도 하고 말입니다. 정스 짐의 효율성이나 과감한 도전정신은 굉장히 고무적이거든요. 우리 소이하고 아는 분인 줄은 몰랐군요. 소이 퇴원하면 꼭 한 번 집에 놀러오세요.”
아…. 그게, 그러니까….
소이의 아버지는 명함을 건네주었다.
우리나라 10대 기업 안에 드는 대기업의 전무였다.
뭐. 엮일 생각은 없다.
근데 이 분의 눈빛은 그렇지 않다.
딸을 자본삼아서 뭔가 엮어보려는 것 같은?
에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려 하고 있는데 이 분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시간에 간병인을 어떻게 구한다? 오다 보니까 게시판에 간병인 대주는 곳 전화번호는 써 있던데 친절하게 잘 하는지 모르겠네. 우리 소이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한테 그런 도움 받아본 적도 없는데.”
느낌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분명히 그건 혼잣말인데 무슨 혼잣말을 내 귀에다 대고 하듯이 그렇게 중얼중얼 하시나.
“우리 소이 남자친구니까 그럼. 어차피 곧 붕대 풀고 퇴원할 건데 부탁을 좀 해도 될까요?”
아니. 아버님.
그 얘기가 어떻게 그리로 이어지지요?
기승전막장이잖아요.
처음에는 소이 아버지도 나를 '우리 소이하고 아는 분'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소이 남자친구'라고 둔갑을 시켜버렸다.
소이도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우리가 원래 알던 사이라고 뻥을 쳐 놓은 걸 자기 아버지가 오해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이는 소이대로 안 된다고 말을 못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고.
소이의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아주 흡족한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왠지 내가 말리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생각해보면 기회가 나쁘지는 않다.
남자친구는 아니라고 말을 하려면 지금 해야 되는 거기는 하지만 내 입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 그래도 한 사람을 구해 놓기는 해야겠지요? 우리 정우씨도 많이 바쁠 텐데.”
저 말은, 그러니까, 네가 소이를 혼자서 돌봐주고 싶겠지만 힘들 수도 있으니까 내가 간병인은 붙여줄게, 라는 것처럼 들린다.
이거. 이거.
잘 생각해야겠는데.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다.
“소이 너는 어떻게 하는 게 편해?”
내 입에서 갑자기 자기 이름이 친밀하게 나오자 소이가 퍼뜩 놀라면서 움찔하는 게 보였다.
“어. 응. 어. 오빠 힘드니까 그냥. 아빠가 간병인 새로 구해주면 좋겠는데요.”
소이가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라는 의미로 소이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더니 이 분은, 소이한테 점수 딸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정말로 그냥 날려보내려고 그러냐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음….
내가 오해한 건가?
이 분은 내가 정말 유소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유소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지금 우리를 엮어 주려고 막 사랑의 작대기를?
“음. 일단 알았다. 간병인은 바로 구해줄게. 알았지? 며칠만 고생하면 되니까 힘내자.”
그 말을 누구한테 하는 건지 그것도 아리송했다.
그 분의 표정이 왜 그렇게 들떠 보이는 건지.
잠시 후에 나랑 유소이는 병실에 단 둘이 덜렁 남겨진 채 멍하니 있었다.
유소이는 지금 병실에 우리 둘만 있는 거냐고 물었다.
“어? 어. 응.”
그렇지.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유소이는 그것도 혼자서 알 수 없는 상황인 거다.
나는 내가 내 생각에 빠져 있느라고 유소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걸터 앉았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조금은 긴장이 풀리겠지.
……. 정말 그러겠지?
“왜 말씀 안 드렸어? 우리가 그런 사이 아니라고?”
내가 물었다.
“타이밍을 놓쳤어요.”
유소이가 말했다.
“으으으. 나도 모르겠다.”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유소이는 나한테 자리를 더 내 주려고 한쪽으로 웅크리면서 편하게 누우라고 말했다.
문득, 그 모든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렸더니 유소이의 발과 발목이 보였다.
나는 유소이의 발목을 잡았다.
“발목이 가늘기도 하네.”
유소이는 간지럽다고 하면서 다리를 끌어 모았다.
“밥은 언제 나와?”
“거의 시간 됐을 걸요? 근데 언니는 어떻게 됐어요?”
“갔어.”
“나가서 무슨 얘기 했어요?”
“기억 안 나.”
“거짓말을 쉽게 쉽게 하시는 것 같아요.”
유소이가 말했다.
“그러게.”
“거짓말이 아니라고는 안 하네요.”
“응. 귀찮아. 거짓말 지어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줄 아냐? 그거 되게 머리 아픈 일이야.”
소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나는 소이의 발치에 누워서 소이의 발목을 잡았다.
소이는 소극적인 저항을 조금 해 보더니 이내 그것도 시들해졌다.
“너. 나 아냐?”
“아빠가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알 것도 같던데. 얼굴은 자세히는 몰라요. 검색해 보면 나오겠죠.”
“아까보다 방어가 느슨해진 게 혹시 그것 때문이야?”
내가 물었다.
정말로 궁금했다.
“오빠가 돈 많은 남자라는 거요?”
“응. 근데 나 빚도 많은데.”
이쯤되면 나를 이루는 10퍼센트 정도는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