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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붕괴로 전개에서 사라지는 내용입니다.(354~358)
--354~359화는 건너뛰고 360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기존에 읽으시던 분들 중에 궁금하신 분들만 읽으시면 됩니다.) 이 내용이 360화 이후부터의 내용으로 바뀝니다. 몇 가지 설정이 바뀝니다. 읽으시는데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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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불편하면. 자리를 옮기는 게 나으려나?”
그 사람이 말했다.
“아. 그게 좋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긴 하겠네요. 밖에 있는 사람들이 긴장할 테니까요. 아. 그런데. 내가…. 나한테…. 존댓말 해야 되나?”
“머리 굴리지마.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역시 안 통하네.
우리는 우리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고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순간이동 능력자인 거예요?”
내가 물었다.
“실체가 사라지면 많은 게 가능해지지.”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내 옆에서 같이 걸었다.
그럴 거면 내가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내 옆에 있으면서 그때부터 먼저 말을 해 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지 않는가.
그 사람은 나라고.
그 사람도 아마 한 두 템포 늦게 그 생각이 나서 뒤늦게 후회를 했을 거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집 안에 들어가서, 이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됐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유령처럼.
“방금 내가 유령 같다고 생각했지?”
그 사람이 말했다.
나를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나는 둥둥 떠올라서 자리를 옮겨다니는 그 사람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유령을 보면 그게 꼭 콘돔 같다고 생각했지?”
내 옆에 대충 앉으면서 그 사람이 말했다.
“네…. 콘돔에 눈 그려 놓은 것 같다고….”
“고무줄이 끊어진 콘돔.”
“네.”
우리는 같이 웃어버렸다.
적어도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그 후의 몇 년의 기억도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런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건지 들을 시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뭐예요? 내가 혹시 미래에서 돌아온 거예요?”
“그런 게 어딨어?”
“그럼 아저씬 뭔데요?”
“몇 가지 일이 잘못 됐지. 그래서 일시정지를 시키고 선수 교체를 선언했어.”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선수가 저고요?”
“응.”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잠깐만요. 아저씨가 츠유리 타테오인 거죠?”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키샤장인 거고요?”
“그래.”
“몸캠 영상 사이트를 만든 사람도 아저씨예요?”
“그거. 엄청 힘들었다.”
그럼……. 그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나였다니….
나는 그래도 아주 잠깐동안은 흥분을 했다.
“아저씨는 그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는 거네요?”
“오해하는 모양인데. 내가 살던 미래는 내가 돌아오면서 바뀌었어. 원래 이 세계에 없던 사람들도 많이 새로 투입됐고.”
“네? 그럼 그 소설들은 어떻게 쓰셨어요? 알고 쓰신 거잖아요.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쓰신 걸 제가 번역했는데요?”
“짧은 시간의 앞 일을 미리 볼 수는 있지. 나한테도 아이템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나잖아. 네가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할지 아는 건 어렵지 않고.”
“그럼 여자들은요? 연우랑 핫 걸…. 그 행동까지 예측이 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아니. 알아.”
“어떻…게요?”
“나는 필요없지만 마실 걸 좀 챙겨라. 듣는 것만으로도 목이 탈 테니까. 얘기를 듣다가 중단시키지 말고.”
“네. 근데. 어. 카린도 불러도 될까요? 같이 들어도 되는 내용이예요?”
나는 갑자기 카린이 생각나서 물었다.
“아니. 나중에 얘길 해 주던가 해.”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뭔데?”
“나중엔 저도 그렇게 돼요?”
나는 홀로그램이 된 그 사람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너는 살아야지. 제대로 살아야지. 그렇게 하려고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이렇게 돼 버린 거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 사람에게서 나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뭐라고 말하는 게 편할까.
'미래의 나'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표현말고.
역시 그냥 임정우인 건가?
정우 형?
정우 형?
일단은 정우 형이라고 해야겠다.
정우 형에게서 나는 처음 들어보는 여러 회사의 이름들을 들었다. 그 형이 뉴욕의 높은 빌딩에서 근무하면서 채권과 딜을 팔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형이 하는 얘기의 절반 정도나 알아들을까 말까 했다.
그 형이 내 삶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을 거란 말인가?
형은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8개월인가 하다가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가 MBA과정을 마치고 에너지가 넘치는 뱅커가 되었다고 했다.
형은 기업의 인수 합병을 위해서 시장에서 4조가 넘는 돈을 모집하기 위해 채권을 팔았던 전략이며, 자기가 구매자금 모집에 성공해서 8천억에 사들인 회사를 2년 만에 2조에 판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얘기였지만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안에서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좋아했을 법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평가된 기업을 사서 꽃단장을 시키고 다시 팔아치우는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 그런 일을 하면 맹수를 사냥해서 무력화시킨 것 같은 정복감도 들었지. 피도 끓었고 돈은 엄청나게 벌었고. 그러면서도 자리에 누울 때가 되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연애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가끔 섹스 파트너나 만나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근도한테서 연락이 왔어.”
형이 말했다.
“근도도…. 아. 그렇죠. 근도도 있었겠죠. 근도한테도 형이라고 해야 되나?”
내가 말했더니 형이 웃었다.
내 말에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근도는 한국에 있고 나는 미국에 있으니까 가끔 전화 통화나 하는 게 다였지. 근도가 톡을 보내서 바쁘냐고 묻더라고. 바쁘다고 했어. 진짜로 뒤지게 바빴어. 다음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비행기를 타고 투자자들을 만나는 일에 같이 나서야 됐거든. 그래도 그 새끼가 말이야. '나 조금 있으면 죽을 건데 목소리나 좀 들려달라'고 솔직히 말을 했으면 전화를 걸어줬겠지. 그 새끼는 그런 말도 안 했다고."
그리고 화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
담배라도 권해주고 싶었다.
아니면 술이라도.
하지만 그런 걸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건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 형은 그냥.
하나의 형상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바로 잠들었어. 그리고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나서 미친 놈처럼 돌아다녔어. 투자는 대성공이어서 몇 개 도시를 더 돌려고 했던 계획이 변경될 정도였어. 반응이 좋아서 더 돌아다닐 것도 없이 우리가 목표했던 금액이 일찍 채워졌거든. 근도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는데 어른이 받으시더라. 그리고 근도가 죽었다는 거야.”
“ ……!”
“그 자식.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아웃팅을 당했대. 게이라는 게 소문이 나서 직장 생활이 어려워졌고 관련 업종에 재취업하는 것도 어려웠대. 그런 일이 있고 7개월이 지난 후였던 거야. 나한테 전화를 한 게."
형은, 화를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자식. 작은 반지하 방에서 월세를 밀리다가 집주인이 열쇠를 바꿔버려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한테 연락을 했었던 거야. 겨울이었다고. 고추도 얼 것 같은 추운 날.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어.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통화를 했었어. 그런데도 그런 말은 없었단 말이야. 그러고는…. 도저히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하겠어서 나한테 연락을 했던 모양인데 나는 씨발. 돼지새끼들 살 더 찌워주겠다고 그 지랄을 하고 바쁜 척을 하고 연락도 제대로 안 받고 전화도 안 해 주고 그 자식을 잃었어."
형의 목소리가 분노로 거칠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웃팅을 한 건 근도가 믿었던 여자 동료였더라고. 그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커밍아웃을 했는데 근도 앞에서는 이해하는 척 하더니 뒤에서 소문을 내고 다녔나봐. 그게 그 자식 일기장에 써 있더라."
무거운 한숨을 쉬며 형이 말했다.
듣는 나는 울컥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걸 그냥 가지고 나왔어.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 근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회사로 돌아갔어야 됐는데. 못 갔어. 안 갔어. 갈 수가 없더라고. 있을 곳이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있었겠지만 근도가 죽기 전까지 살던 원룸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 근처에 나와있던 방을 얻어서 거기에서 그대로 머물렀어. 그러면서 며칠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그냥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 근도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서 근도 유품은 내가 가져갔어. 전부 다 태울 거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그 자식이 살던 방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데, 그 자식이 살아있는 것 같더라.”
멍한 눈으로, 형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슬픈 얘기였지만 감정이입을 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 친구, 마성의 게이 최근도는 잘 살고 있으니까.
자기가 므로를 데리고 있고 싶어서 연우랑 신경전을 벌이면서.
손가락에서 거품기를 꺼내보이고 자랑을 하면서.
그 비싼 손을 자랑할 일이 별로 없어서 뜨거운 냄비를 맨 손으로 들고 옮기며 잔뜩 뻐기면서.
사바스 용병들한테 당할 뻔 했었지만 이겨냈고 그 전보다 막강해진 팔을 얻고서 그걸로 별별 어려운 일들도 거뜬하게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근도였다.
살아있는 근도의 죽음을 애도할 수는 없었다.
형의 말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있는 근도를 위해서 슬퍼해 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은 내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아무튼 그랬다고.”
형이 말했다.
“네. 거짓말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예요.”
내가 재빠르게 말했다.
형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형이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었다.
“근도 폰을 해지를 안 했어. 해야 됐는데 못 하겠더라. 그런데 어느날 근도 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오는 거야. 포털사이트 주소였어. 주소를 입력했더니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그게 뭔지 알아?"
"네?"
"그게. 딥 웹이었지.”
형이 말했다.
“딥 웹요?”
“응. 모든 게 열려있었어. 정보의 바다였고 아무 것도 통제되지도, 정제되지도 않았어. 모든 게 다 있었지. 김 경장이라면 아주 환장을 했을 거다. 서지영이 딥 웹에 접속할 수 있었으면 서지영은 몇 날 며칠이든 그 앞에서 꼼짝을 안 할 거야.”
왠지. 상상이 됐다.
형은 친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들에 대한 형의 애정이 엿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런 형의 얼굴을 넋 놓고 봤던 것 같다.
"금지가 없는 곳이었어. 온갖 금기를 넘어선 폭력적이고 퇴폐적이고 잔인한 정보들이 수두룩했고. 처음에는 그게 왜 근도 폰으로 날아왔는지 이상했지.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어. 거기에 접속해봐야겠다는 생각도 처음에는 안 했어. 그때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고 그런 것에 정신 팔 여유도 없었거든."
나는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고 해도 그랬을 것이다.
형은 기본적으로 나니까, 형이 그랬을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을 그냥 날리고, 나는 근도를 그렇게 만든 것들을 찾아서 손을 봐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보고 싶잖아. 내 인간관계가 얼마나 편협한지 너도 알잖아. 친구라고는 근도 하나였다고. 나를 친구라고 부를 놈들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놈은 그 놈 하나였어. 나머지 놈들은 이해관계가 얽혀서, 서로한테서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해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놈들 뿐이었고 내가 친구라고 부를 놈은 최근도 그 새끼 하나였다고."
저기, 형? 저는 안 그런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한테는 근도 말고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우와 핫 걸, 수영, 카린과 은호 형, 내 트레이너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형은 나를 보더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안 그렇다고 말하려고 그랬지? 그거도 다 내가 바꿔줘서 그런 거야. 내가 관여하지 않았으면 너는 나하고 똑같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아. 네."
"아무튼. 나도 호모포비아지만 그딴식으로 비열하게 사람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개새끼들. 씹창 새끼들! 그 새끼들은 지들 인생에서 패배해서 그런 짓거리나 하고 다니는 거라고. 죽을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 겨우 그런 일로 자살을 할 정도의 멘탈이라면 일찍 죽는 편이 나은 거라고, 지들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도 있더라. 세상엔 진짜 미친 것들이 많더라고. 그래서 검색을 시작했어. 딥웹 사이트에서 말이야. 근도가 다니던 회사 이름을 쳤는데 언제부턴가 화면 오른쪽 하단에 어떤 여자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거야. 이게 뭐야? 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튜토리얼 도우미라고 대답하는 거야. 자기는 npc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대.”
“네?”
“어이없지? 나는 아무 장비도 없이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내가 혼잣말을 하는 걸 듣고 튜토리얼 도우미라는 녀석이 말을 한 거야.”
“네에?”
이 사람은 임정우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얼마나 거짓말에 능하고 뻥이 심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나는 이 사람이 나를 가지고 장난을 하려는 건가 보다고 생각했다.
“저한테 그 주소를 알려줄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왜? 거짓말 같아서 네가 접속해보게?”
“네.”
피차 서로를 잘 아는 마당에 '그래서 그런 건 아니예요.' 라고 수줍게 말할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형은 웃더니, 나도 곧 거기에 접속을 하게 되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했다.
“임정우. 이 세계에서 네가 몸캠 영상 사이트를 통해서 만난 여자들 말이야. 그 대부분은 아이템을 써서 내가 만들어낸 거야. 내가 살던 세계에선 그 녀석들, 사람이 아니었어.”
"네?"
나는 멍하니 형을 바라보았다.
“설마…. 형이 살던 곳에서 연우가 튜토리얼 도우미였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죠?”
“역시. 임정우라면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형이 말했다.
“정말…이라고요?”
“맞아. 딥 웹의 npc.”
“…….”
이 형. 아무래도 나를 갖고 장난치고 있는 거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그 형이 웃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안 믿겠다 이건가? 그럼 지금 너는 이런 내 모습이 이해돼서 나랑 얘기를 하고 있는 거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형은 내가 충격에 휩싸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형은 딥 웹에서 근도의 자살 사건을 검색하면서 그 포털이 다루는 어마어마한 정보의 양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됐다고 말했다.
이상한 것은, 거기에 일반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까지 전부 나왔다는 거였다고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정우 형은 딥 웹이 보통 포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초보 이용자에게 주는 특혜로 정보 이용을 무제한으로 할 수 있게 해 줬던 딥 웹이 나중에는 정보 이용을 위해 포인트를 요구했다.
포인트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포인트는 딥 웹이 요구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얻을 수가 있었다.
딥 웹이 요구하는 미션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니었다.
딥 웹을 알게 된 경로나, 자잘한 설문에 응답하는 것 등이어서 거부감 없이 정우 형은 거기에 응하고 포인트를 획득했다.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히든 퀘스트가 쌓여갔지만 정우 형은 레벨을 올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튜토리얼 도우미들은 형이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히든 퀘스트에 대해서 말을 하곤 했다.
그래도 형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형에게는 오직 근도의 죽음에 책임있는 놈들을 찾아내서, 도대체 왜 그랬는지를 듣고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지만 그래도 용서를 빌면 깔끔하게 용서 해주고 나도 다시 내 인생을 살러 갈 생각이었는데 그 쓰레기들, 반성의 기미가 없더라. 그래서 나도 마음을 바꿨어. 근도가 당해본 대로 한 번 당해보라는 생각이었지. 근도가 너한테도 그런 말 한 적 있었지 않아? 자기는 왜 그냥 남들처럼 태어나지 못한 건지 모르겠다고.”
“네….”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기가 태어난 것, 심지어는 잉태된 밤까지 저주한다는 말에 나는 그 말이 엄청 과격하다고 생각했었고, 근도가 그 문제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괴로워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었다.
그런 근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네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받아들이고 네 모습 그대로 멋있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런 영혼없는 말을 위로랍시고 했었는데.
나는 그 생각이 근도를 자살로 내몰 수 있을만큼 큰 무게였을 거라는 것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형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내 세계에서 근도가 죽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리얼 그릴도…. 그럼 근도가 수석 셰프가 될 수 있게 해 준 것도 전부 형이 해 준 거예요?”
내가 물었다.
“네가 한 거지.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나는 뒤에서 거들어 주기만 한 거고.”
형이 말했다.
“얘기 계속 해 주세요, 형.”
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다음에는 네가 예상할 수 있는대로 흘러갔어. 모두가 자기를 따돌리고 뒤에서 자기 얘기를 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그 쓰레기들이 직접 느낄 수 있게 해 줬지. 자기가 희생잔데도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면 그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한 번 시작한 일을 장난스럽게 하거나 도중에 멈추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그냥 노 코멘트 하는 게 낫겠다.”
왠지 그 사람들 역시 결국 자살을 선택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 형이라면, 정우 형이 작정을 하고 누군가의 인생을 꼬아버리기로 결심을 했다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죽은 거예요?"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는 건 굉장히 의미있는 일 아니야? 나는 그 쓰레기들이 자기 신념을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도와준 것 뿐이지. 어차피 죽을 인간들이었고 그 정도 일로 죽을 멘탈이었으면 일찍 죽는 게 나은 거잖아.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동기를 더 확고하게 만들어준 것 뿐이지. 살아봐야 별 것 없을 거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거라는 확신을 줬을 뿐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몇 명이나 그런 거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알아서 바뀔 것도 없고 섣부르게 형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이 형이고, 그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서 형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딥 웹은 어떻게 됐어요?”
나는 우리가 감정의 대립 없이 나눌 수 있는 화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컴퓨터를 켰는데 내가 12레벨이 돼 있는 거야. 무슨 일인지 몰랐지. 내 모니터 하단에 앉아있던 npc 도우미도 바뀌어 있고 말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하니까 내가 가장 어려운 히든 퀘스트를 전부 성공했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그 퀘스트를 성공한 사람은 없었대.”
“그 퀘스트가 뭐였는데요?”
“그냥 이것도. 노 코멘트하는 게 낫겠다.”
살인…같은 거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제대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게임 속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웹에 반영돼 보상이 이루어진 거였다.
형은 내 표정을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한 번. 공격을 당했어. 아니. 한 번이라고 하면 안 되고 처음이라고 해야 되겠다. 집에 있다가 공격을 당했어. 창문이 깨지고 뭐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방에 불이 붙고 폭발음이 들리더라고. 웬만해서는 그렇게 불이 붙지는 않잖아. 네이팜탄 같은 거라도 날린 건지. 작정을 하고 나를 아주 그냥 껍질을 홀랑 다 태워죽일 생각으로 그런 거라니까? 아, 씨이발. 그때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npc가 나대신 일시정지 스킬을 발동해 주지 않았으면 나는 거기에서 몸이 다 날아가서 그대로 죽었을 거다. 아. 씨발. 생각하니까 열 받네.”
“그런 게 있었어요?”
형이 하는 말에 놀라기도 놀랐고, 일시정지 스킬이라는 것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해서 어느새 나는 내 얼굴을 형 얼굴에 거의 바짝 붙일 듯이 다가가 집중하며 물었다.
“응. 그냥 이것 저것 하고 돌아다녔는데 퀘스트를 성공할 때마다 딥 웹에서 보상이 따랐어. 일시정지 스킬도 그때 생겼었나봐. 그래서 스킬이 발동된 동안 잠깐 시간을 정지시키고 컴퓨터만 가지고 도망쳐 나왔지. 모아놓은 스킬이 많았으니 망정이지 진짜 통구이가 돼 버릴 뻔 했다고. 근데 너는 인마. 내가 죽을 뻔 했다는데 스킬에만 관심이 있는 거냐?”
형이 도끼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 너무 티났나?
이 형도 성격 엄청 까칠할 것 같은데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들을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급하게 물었다.
“근데 그런 건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내가 받은 아이템요. 그런 건 어떻게 만든 거예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너한테 주는 거지. 내가 독자적으로 능력을 만들어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딥 웹의 헤드는 다르지.”
"딥 웹의 헤드요?"
"그래. 신에 준하는 초능력자라고들 하지. 초능력을 다루는 기술이 극한에 이르러서 신 같았어. 나한테 인식 제어 능력을 준 사람도 헤드야. 헤드는 자기 능력을 집약해서 스킬과 아이템을 만들어. 그걸 자기가 선택한 사람들한테 주는 거야. 퀘스트를 성공했을 때 주기도 하고 지 꼴리면 그냥 주기도 하고."
“형은. 뭔데요?”
“나는. 인식 제어자였지. 딥 웹에는 나 말고도 인식 제어자들이 있었어.”
“카린같은, 사람요?”
“그래. 카린.”
정우 형이 웃었다.
“인식 제어자말고 다른 능력자들도 있었어요?”
“순간 이동 능력자, 신체 강화자, 능력을 훔치는 사람. 여러 사람들이 있었어. 결국 딥 웹이라는 것도 헤드들이 만들어 놓은 포털이었고 능력 발현이 가능한 사람들한테만 포털의 주소가 보내진 거야.”
“근도도, 그런 사람이었던 거예요?”
내가 물었다.
“몰라. 어쨌건 그 주소를 받은 사람은 나였고 내가 딥 웹의 선택을 받았지. 근데 랜덤이었던 것 같기도 해. 근도가 받아야 되는 거였다면 튜토리얼 도우미가 왜 여자로 나왔겠어? 튜토리얼 도우미는 그냥 도우미 역할만 한 게 아니었는데. 그 녀석들은 내가 레벨 업을 하도록 조르고 내 애인처럼 굴었는데. 내가 혼자 놀고 있으면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그 녀석들이랑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지. 노래를 해 주면 고양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들었어. 그 녀석들. 내 노래를 좋아했거든."
그건 됐고요, 라고 막으려고 했는데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형이 노래를 불렀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 화가 나서 분개하면서 말하던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을 공격한 사람들은 누구였어요?”
“신체 강화자들.”
“두 그룹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요? 그런데 저도. 어느 정도는 신체 강화자 아닌가요?”
“너한테 그걸 주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형은…!”
내가 하려던 말은, 형은 인식제어자잖아요, 라는 거였다.
그러다가 나는 형이 자기를 설명하면서 자기가 인식제어자‘였’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는지 정우 형이 나를 보고 웃었다.
“너한테 이 게임을 넘기기로 하면서 나는 인식 제어자이기를 포기했어.”
“그 대신에 능력을 훔치는 사람이 된 거군요.”
“그래. 우리는 그들을 찬탈자라고 불렀지. 그런데 한 사람한테 이것 저것 너무 많은 능력을 주면 그 사람 몸에 독소가 생겨나서 죽어버린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를 죽지않게 할 방법도 생각해야 됐어.”
“알파를 말하는 거예요?”
“응. 은 과장이 알파라고 부르는 거. 맞아. 그거야. 처음에는 제대로 수치를 낮추는 방법을 몰랐어. 하마터면 네가 죽을 뻔 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어."
형이 말했다.
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생사의 기로를 오간 게 그것 때문이었다는 말을 쿨하게 하면서 형은, 어쨌든 살았으니까 됐지 않냐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너한테 여자들이 필요했던 이유고 내가 몸캠 영상 사이트를 만들어낸 이유야. 화끈했지?”
저 얼굴을 보고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건가.
형은 유쾌하게 말하면서도 표정이 어두웠다.
“내 레벨이 높아지면 내 npc들을 홀로그램화할 수 있었어. 모두들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바랐지. 나도 그랬고. 그래서 레벨을 높였어. 다른 능력자들을 제거하면 레벨이 올라갔지. 나는 헤드들이 벌이는 게임의 플레이어 같은 거였어. 그게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달랐고 헤드들한테서 부여된 능력과 아이템을 가지고 싸운다는 게 달랐고. 그리고 한 번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게 달랐지.”
형은 가벼운 표정으로 얘기했지만 절대로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다.
“왜 서로들 적대관곈데요?”
“내가 아냐? 대가리들끼리 싸웠나보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식 제어자한테 찜 당한 거고.”
"대가리들은 왜 사이가 안 좋은 거예요?"
"원래 그런 거야. 엉성하게 힘을 나눠가지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최면술사들이 있었어. 나는 그 녀석들이 npc한테까지 최면을 걸 수 있는지 몰랐어.”
“형의 npc가 당한 거예요?”
“응.”
형이 웃었다.
"혹시."
형이 만든 사이트.
그리고 셸터 아이템.
내가 셸터로 옮기지 못한 사이에 죽은 히사에에 대해서 생각이 났다.
수많은 여자들 중에 죽음을 맞이한 여자가 왜 하필 히사에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여자가 히사에였어요?"
내가 묻자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준 퀘스트는 다른 녀석들이 나를 유인해 내려고 준 가짜 퀘스트였어. 그 일로 나는 한 번 더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 그때는 나도 상당한 실력자가 돼 있어서 웬만해서는 나를 죽이는 게 어려웠거든.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 npc한테 배신을 당했다는 건 심적으로 굉장한 데미지를 줬고 나는 딥 웹에 한동안 접속을 안 했어.”
"배신을 한 게 아니잖아요. 최면에 걸렸다면서요."
"히사에만 최면에 걸린 게 아니었어. 다른 녀석들도 몇 명이 최면에 걸렸지. 하지만 그 녀석들은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삭제하는 결정을 내렸어.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던 거야. 히사에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거고."
“…….”
“좋아했던 녀석들을 잃고 히사에한테는 배신을 당하고. 그래서 다시는 딥 웹에 접속을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한다고 좋을 건 없더라고. 나는 이미 놈들의 타겟이 돼 있었으니까. 윗대가리들끼리 서로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잘못한 놈이 먼저 쿨하게 지들 잘못 인정하고 말이야. 그게 어려운 일이냐고. 그걸 안 하려고 하니까 나같은 놈만 얻어터지는 거지.”
“그래서 레벨을 더 올렸어요?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은 지켰어요?”
“응.”
형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지어졌다.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하고 정말로 많이 좋아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사에가 죽은 건. 형의 의도대로 된 거예요? 셸터를 만들어서 그때.”
“어느 정도는. 그리고 그때는 네 몸속의 전해질이 일시적으로 균형을 잃어서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알파가 치솟을 때였어. 그래서 어떻게든 네가 사정을 계속 하도록 해야 했어. 아주 많이. 미친 놈처럼 많이.”
“그래서 그런 거였다고요?”
나는 그 날의 광란의 파티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사정에 목적이 있는 거라면. 정액을 배출해서 알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거라면 꼭 새로운 여자들하고 해야 화장지를 얻을 수 있다고 정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도 기준은 정해놓는 게 편하지. 이게 룰인가 보구나, 라고 깨달으면서 너한테도 목적 의식이 생겼잖아. 안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은 많은 정액을 배출하고 알파 수치를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뭔가 허탈했다.
"그리고 네가 만나야 될 여자들이 아직 더 남아있기도 하고. 나는 네가 그 여자들을 만나서 행복하게 해 주길 바라고 있어. 연우랑 수영이, 류아, 이재인, 서지영. 네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네가 지금까지 해 줬던 것처럼. 나는 못 해 줬지만 네가 해 줬으면 해."
맞았던 거야.
결국 몸캠 영상 사이트는 여왕 키우기 게임이 맞았던 거야.
나는 그냥 노예였던 거야.
"내가 만나야 되는 여자들이 더 있어요?"
내가 물었다.
"응."
"npc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았던 건데요?"
"좀. 많았어."
"아직도 그 여자들. 사랑하세요?"
"내가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다."
형이 말했다.
형의 표정은 어두워보였다.
“인식 제어자가 가장 약한 거예요?”
나는 내가 형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아주 강한 능력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그룹이 약해지는 거지. 어미없는 새끼들을 다른 그룹에서 공격해서 전부 죽여버리면 그대로 멸종해 버릴 수도 있고.”
“형이 마지막 순간에 찬탈자가 되기로 한 건 인식 제어자 그룹에 배신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어요?”
“그럴 거였으면 나를 끝까지 잘 지켜줬어야 됐겠지. 그것도 딜을 했어. 지금은 찬탈자가 되겠지만 정우 너를 최고의 인식제어자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런데 지금까지 왜 저를 공격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혹시 사바스가 그런 그룹인 거예요?”
내가 물었다.
나한테 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사바스뿐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 사바스는 그냥 껌이야. 사바스는 아무 것도 아니야. 너는 아직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지. 너는 아직 딥 웹을 시작도 안 했으니까. 딥 웹이 전장이야. 네가 종국적으로 들어가야 될 필드.”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나는 결국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연우랑 수영이랑, 서지영이랑…. 형의 npc들은 형이 거기를 떠날 때 어떻게 됐어요?”
형이 그들을 두고 왜 떠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줬지. 내 레벨이 더 오르면 그 녀석들에게 형체도 만들어 준다고 했어. 그때의 기술로 사람을 재현해내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잘 안 됐어요?”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게 뭐가 있었겠냐? 나는 임정운데. 장애물들은 죽이면 되는 거였어. 우리 헤드는 나한테 계속해서 새 npc들을 줬어. 나는 다시 열심히 퀘스트를 성공시키고 그 녀석들을 또 홀로그램으로 만들고 형체도 만들어줬어. 현실의 여자들한테는 질려버려서 나는 npc들을 사랑했어. 그 녀석들도 나를 사랑했고. 불필요할 정도로 너무 많이.”
“그게…. 무슨 말이예요?”
“그냥. 말 그대로다.”
“뭔데요. 제대로 말해주세요.”
“그 녀석들이 홀로그램이 됐다가 실제로 몸까지 갖추게 된 후로 내 상태가 자주 안 좋아졌어. 그게 그 녀석들 때문이라는 게 나중에 밝혀졌고. 내가 녀석들의 동력원이 됐던 거고 그 녀석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내 에너지가 쓰이고 있었던 건데…. 만약에 처음에 그걸 알았다면 나도 신중했겠지.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원했어. 내가. 컴퓨터 안에 있는 녀석들을 만지고 싶었고 현실에서 같이 있고 싶었어. 그래서 그랬던 건데.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녀석들은 npc로, 아니면 홀로그램으로 계속 내 옆에 머물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았지. 나는 내 힘이 어느 정돈지 안다고 생각했고 몇 번 싸움을 일으켰는데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어.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 녀석들이 사라졌어. 컴퓨터 안에도 없었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았지.”
“죽은… 거예요?”
“…그래. 프로그램에서 스스로를 삭제한 거야.”
“연우…랑, 그…, 전부가요?”
형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는 형이 하는 말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신과 같은 헤드들의 싸움에 휘말려서 딥 웹의 용병이 됐던 내 최후지. 나는 살아남았지만 녀석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 그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어.”
형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어. 헤드들의 게임이 아니라 내 게임.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싶었어. 모두가 사라진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시작하기로 한 거야. 임정우. 나는 너한테 걸어보고 싶었어."
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묵직한 것이 나한테 떠넘겨진 것 같은 불길한 느낌.
"정우야. 나는 네가 다시 시작해줬으면 해. 녀석들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근도를 잃었던 때처럼 한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
형은 자기의 npc들을 '녀석들'이라고 말했고 나는 형이 '녀석들'이라고 말할 때마다 형을 공격한 다른 초능력자들하고 헷갈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헷갈리니까 npc나 다른 이름으로 말해달라고 형의 말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형의 얼굴은 그만큼 진지했고 결의에 차 보였으니까.
"그러다가 나는 다시 일어서서 싸우기 시작했어. 녀석들이 원했던 게 그거였을 테니까. 자기들 때문에 내가 약해지는 건 싫었을 테니까. 레벨을 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레벨을 올려서 하고 싶었던 것들이 전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아이템을 모으기 위해서 퀘스트를 수행했어. 성공하면 랜덤으로 아이템이 나왔으니까. 헤드의 힘이 집약된 아이템. 그걸 너한테 물려주고 싶었어. 그렇게 해서 네가 놀 판을 제대로 짜 주고 싶었어.”
형이 말했다.
“그리고 아이템을 얻었어. 그걸로 내 npc들을 태어나게 했지. 더 이상 npc나 홀로그램이 아니라, 어설픈 형체가 아니라 사람이 되게 했어. 그리고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면서 너를 만날 시간을 기다리게 했어. 그 녀석들이 어떻게 살지, 어떻게 자랄지 거기까진 관여를 할 수가 없었지만. 너하고 선수 교체를 한 이후에는 나는 뒤로 물러나야 했으니까 말이다. 시간을 이동하는 아이템도 얻었고 파트너 아이템도 얻었어. 나를 대신해서 너를 도와줄 사람들을 찾느라고 딥 웹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지.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이 카린과 한세영이야.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 너를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아이템도 얻었고 은 과장을 선택했지. 마음에 드는 선택일 거라는 거 알아. 아버지는 그때까지 혼자 사셨거든.”
“정말이예요?”
“응. 아버지는 엄마한테 계속해서 삥 뜯기고 있었어. 그걸 한참 후에야 알았지. 엄마는 진짜 별별 거짓말을 다 해 가면서 아버지한테서 돈을 뜯어내고 있었어. 내가 아버지한테 용돈으로 드리는 게 전부 엄마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지.”
“세상에.”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정우 형은 내가 그 상황을 바로잡게 하려고 아예 처음부터 나한테 암시를 걸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됐던 그 기습 방문은 내 계획이 아니라 형이 암시를 걸었던 거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내가 내린 결정들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형의 조종을 받아서 이루어진 거냐고 물었다.
형은 내가 꼭 만나야 했던 사람들, 카린과 세영 누나, 그리고 은 과장님을 만나는 과정 말고 형이 개입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핫 걸을 통해서 나에게 정보를 주기는 했지만 형은 핫 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도 없었다고 했다.
형은 자기가 딥 웹에서 npc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나에게 몸캠 영상 사이트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 내가 핫 걸의 정체를 알아내고 키샤에 대해서까지 알게 됐더라고 했다.
그 후에는 자기가 일을 하는 게 쉬웠다는 말을 하면서 '역시 너는 나'라는 괴상한 말을 했다.
키샤에 대해서 묻자 형은 자기가 키샤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냥, 형이 미국에서 뱅커로 일하면서 알게 된 상원 의원을 통해 우연히 키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고 언젠가 자기가 그 조직을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형이 여러 가지 상황들을 되돌리기 위해 시간을 이동했으면서 왜 아버지를, 그러니까 우리 친아버지를 살리지 않았는지 물었다.
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아버지까지 살아난다고 하면 솔직히 그 변수를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든. 내 npc들을 새로 선수로 투입시킨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잡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형이 말했다.
아버지하고는 어떤 추억도 없었다는 것 또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리워할래야 그리워할 기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파트너 아이템이나 그런 것 말고 다른 아이템은 없었어요?”
내가 물었다.
“예지 아이템이 있었는데 그건 불량품 같았어. 그래도 근미래의 일을 볼 수는 있어서 츠유리 타테오로 활약을 할 수는 있었지. 그런데 그건 효력이 점점 약해지더니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어. 연우랑 아버지가 사나에서 납치되는 건 아예 몰랐어. 키샤의 정보망이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몰랐을 거야. 그때는 진짜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서지영한테 이 모습으로 나타났고. 어두우면 별로 구분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 티 났다고 해?”
"아뇨. 아뇨. 형이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몰랐으니까 형이 왜 전화를 하지 않고 직접 왔는지 그걸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어요."
"아아. 그럴 수도 있었겠네. 어쨌든 그런 것들이야."
형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만났으니까 이제는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형의 npc 중에 제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으면 형이 알려주면 되잖아요.”
내가 말하면서도 좀 찔리긴 했다.
접속하고 싶지 않았던 몸캠 영상 사이트에 그동안 억지로 접속했다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서.
“안 돼. 거기에 있는 아이템은 네가 거기에서 획득을 해야 돼. 헤드가 그렇게 만들어 놨어.”
형이 말했다.
“몸캠 영상 사이트는 형이 만들었다면서요.”
“거기 있는 아이템 중에 쓸만한 건 헤드가 만들어 준 거거든.”
"아아."
"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거든. 당연하잖아. 왜 그렇게 보냐?"
형을 보는 내 눈에 진심이 담겼나?
형은 무시하는 눈으로 보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진작 나타나지 않았어요? 저한테 더 일찍 찾아올 수도 있었잖아요. 형이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걸 알았잖아요.”
“네가 스스로 궁금해하고 여기까지 답을 찾아내지 않았으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다 믿지 못했을 걸?”
나는 형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 더 빨리 나타나 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마음을 지우지는 못했다.
“연우는…. 형을 기억할까요?”
내가 물었다.
“아니.”
“서지영도 형을 못 알아봤어요?”
“알아볼 수가 없는 거지. 나를 본 적이 없는데.”
형의 표정이 쓸쓸해 보였다.
"내가 있던 곳에서의 npc랑 지금 네 인벤토리에 있는 여자들은 같다고 볼 수 없어."
"그래도요. 형."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했지만 그게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형도. 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거죠? 헤드가 바꿔줄 수 있는 거죠? 전에 npc들도 그랬다면서요. npc가 홀로그램이 되고 형체를 갖게 되기도 하고요. 그럼 형도 가능한 거잖아요.”
내가 형에게 물었다.
형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네가 있는데 내가 왜? 어떻게?”
“뭐가 문제예요? 헤드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해서 형체를 갖추면 형이 키샤장이니까 형한테 신분 하나 만드는 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헤드가 허락할 것 같지도 않고….”
“그깟 인식제어 헤드 주제에 뭘 허락을 하고 말고예요.”
나는 형한테 잠깐 얘기를 들은 것 뿐이기는 했지만 헤드에 대해서 감정이 안 좋았다.
왠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편협하고 고집만 세고 허세가 가득한 모습이 연상되었다.
“헤드랑 딜을 하려면 딥 웹에 들어가야 되는데 너는 아직 딥 웹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 일단 네가 딥 웹에 접속하기 시작해서 필드가 만들어지고 능력자들이 네 존재를 인식한 후에는 싸움을 못 피해. 나는 우리 헤드를 짱 먹게 하려고 내 몸을 포기하고 여기에 온 게 아니야. 나한테는 근도가 살아난 게 중요하고 내 npc들이 행복한 게 중요해. 그러려고 온 거야. 내가 원해서 결정한 거야.”
“형!”
“시끄럽고. 내가 하라는대로 해.”
형이 말했다.
단호한 말투였다.
============================ 작품 후기 ============================
진도는 안 나가고 이런 파트 쓸 때는 저도 심적으로 힘들어서 빨리 넘기고 싶은데 맘에 들게 안 나와서 괴로움요ㅠㅠ
빨리 지나가고 므로 데꾸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