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웹 MK-357화 (357/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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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 나는 전혀 모르겠어? 꿈속에서 나오는 그 유저가 나였던 것 같지는 않아?”

내가 물었지만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내가 왜 자꾸 묻는지 알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네 꿈에 내가 나오니?”

아. 그건. 아직 모르는데.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유나를 재촉했다.

계산을 하고 나가면서 나는 핫 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한테, 내가 바로 봐야 된다고 전해주세요.”

핫 걸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고, 유나와 내가 차에 탔을 때 나는 뒷자리에 정우 형이 앉아있는 걸 보았다.

유나는 뒤에 앉은 정우 형을 보지 못했다.

나는 형이 유나를 보고 지은 표정을 보고 유나 역시 형의 npc 중에 하나였던 게 맞는 것 같다고 짐작했다.

형은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듣고 추론을 할 생각이었는지 나에게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형에게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직은 형을 유나에게 소개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유나에게, 우리 집으로 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유나는 상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유나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왜 자꾸 두리번거리는 거냐고.

누구를 피하는 거냐고.

유나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했지만 나한테 조금이라도 성의있는 대답을 해 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게. 그 기억 속에서 나타나곤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끔 보여.”

“네가 돕던 유저를 공격했던 능력자들 말이야?”

“같은 사람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느껴져. 뭔가 달라. 분명해.”

“혹시 나에 대해서는 그런 게 안 느껴져?”

“응.”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한 명쾌한 태도.

나는 유나에게 형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건 도대체 언제쯤 익숙해질까.

익숙해질 때가 오기는 하는 걸까.

유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기억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그것은 정우 형이 얘기했던 것과 많은 부분에서 겹쳤다.

유나는 왜. 왜 유나만 정우 형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능력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걸까.

내가 하나씩 하나씩 묻자 유나는 그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거나 자기를 쫓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단지 자기가 그들을 알아보는 것 뿐이라고 확실히 했다. 지난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그들을 보기만 해도 위축이 되고 겁에 질려서 스스로 숨고 싶어지는 거라고 유나는 말했다.

“사실은 나도 그래.”

내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능력자라고."

“어떤?”

유나는 그 말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보류한 채로 물었다.

나는 유나의 앞에서 몸을 감췄다.

유나는 놀라워했지만 곧바로 이해했다.

그 후로는 군말없이 내 말을 믿었고 나는 그 기세를 몰아서 유나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말했다.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하는 게 우리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유나가 놀라고 광분해서, 운전하는 내 멱살을 잡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유나는 정우 형을 보고서 어깨가 축 늘어지더니 세상에, 말도 안 돼, 진짜잖아, 라는 식의 얘기를 계속 이어서 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표현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너!”

유나가 나를 보고 말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 아니지? 트릭을 쓰고 있는 건 아니지?”

유나가 말했다.

“내 수준을 뭘로 보고. 나는 이런 트릭을 쓸만큼 대단하지 않아.”

나는 정우 형을 바라보았다.

“유나를 알겠어요?”

정우 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나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유나가 두 개의 기억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일 때문에 정신병원에 들락거렸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정우 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신병원에 들락거렸다는 얘기에 동정을 해줄 틈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동정할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나는 그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았을 뿐, 실제로 유나가 그런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니니까 위로받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유나와 정우 형이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는 동안 나는 최대한 빨리 집을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억이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었고 점차 자신들의 기억을 견고하게 다져갔다.

유나는 정우 형이 기억하지 못하는 몇 건의 공격에 대해서도 기억했다.

그 일로 정우 형이 아주 위험했었다는 것도 기억을 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사라지기로 결의한 원인이 되었던 사건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일을 유나는 괴롭게 떠올렸다.

형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던 모양이었고 유나와 npc들은 그게 자기들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던 모양이다.

그게 죽음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서 npc들은 결단을 했다.

그러나 유나에게는 그게 쉽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정우 형을 잊을 자신이 없어서, 남은 npc가 자기 하나뿐이라면 정우 형의 에너지도 그렇게 많이 소모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그리고 정우 형에게도 누군가 한 사람 정도는 남아서 보살펴줘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정우 형의 곁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우 형이 npc들을 잃고 좌절하고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 보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괴로워하는 정우 형을 보는 것은 자기가 직접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고 유나는 정우 형을 두고 사라졌다.

나는 그게 유나가 그때의 기억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나의 대응은 다른 npc들과 달랐던 것이다.

유나는 차에서 내리고 정우 형을 기다렸다.

유나는 정우 형이 홀로그램이라는 사실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처음부터 거의 갖지 않은 것 같았고 정우 형을 챙겼다.

챙겼다기보다 마음이 기울고 정우 형을 의지했다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우 형은 차에서 내릴 필요가 없었다.

유나는 정우 형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정우 형이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말대로 형은 집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또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형은 유나를 근도에게도 소개해 줘야겠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형이 무슨 이유인가로 해서 초조해 한다고 생각했다.

형은 유나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에게 물었다.

“유나랑……. 했어?”

“아뇨.”

“왜? 유나를 위해서도 필요하잖아.”

“유나는 형이 지켜줘요. 그러면 되잖아요.”

형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다고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형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나한테도 도움이 될 거예요. 유나. 자살시도를 여러 차례 한 것 같았어요. 손목에 자국이 있었어요.”

“그래?”

“네. 악몽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아요. 늘 피곤해하고요. 형이 같이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지금 상태라면 건강은 계속해서 안 좋아질 거예요.”

그 말에 형은 마음을 더욱 굳힌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유나는 자기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자기가 홀로그램이었을 때 형이 돌봐줬던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유나는 이제 자기가 형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형은 유나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려고 계획을 전부 세워놓고 있었지만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가는 건 또 다른 것이라 얼굴에서 반가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럼 부탁한다. 정유나. 내가 반드시 형의 몸을 찾아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 놀아줘. 노인네 심심해하지 않게.”

내 말에 형이 화를 내려고 했지만 유나가 웃자 형도 유나를 따라 웃었다.

형이 그런 식으로 웃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았다.

“근데 유나 너 혼자 살아?”

“응? 응.”

내 질문이 갑작스러웠는지 유나가 이상하게 보면서 말했다.

“아파트? 빌라?”

“원룸.”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비어있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옮기면 어떻겠어? 형이랑 얘기하는 소리를 밖에서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유나는 내가 하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더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 그런 집에 들어갈만큼 보증금 준비 못하는데.”

“야.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을 해야 되냐? 노인네 챙겨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데. 그리고 집을 아주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살라는 거니까.”

“그래도. 임대료는 내야지.”

“임대료같은 소리 하네. 그건 형한테 받을게. 형도 거기에서 살 거니까 형이 내도 되는 거잖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나한테 바로 연락해. 한밤중이라도 상관없어.”

내 말에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야 돼. 형이 돌아온 건 너희들을 되찾기 위한 거였다는 거. 다시 너희들을 잃게 되면 형은 돌아갈 곳도 없어.”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이번에 잘못 되면 내 여자들이 일을 당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조금 방만하게 생각을 해오고 있었는데 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에서 과거로 거슬러 가는 게 불가능해 진 것 같다고 어느날 나에게 말해 주었다.

형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시간 이동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형은 내가 시간을 동결한 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너무 놀란 얼굴로 형을 바라보자 형은 그냥 해본 말이라고 하면서 장난스럽게 넘어가 버렸고 우리는 아직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제 과거로 돌아가 문제를 되돌리는 방법에는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됐다는 거였다.

그로 인해서 시간 이동 계열의 전투력이 크게 꺾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군가 과거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는 뜻인 걸까.

그건 이전에는 아무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 말은, 그 일을 이루어 낸 사람은 그 전의 능력자들보다도 더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말 형이 말한대로 그게 나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는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나는 이미 주인공 버프를 넘치도록 받은 느낌이니까.

유나는 자기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조차 분간해내지 못하는 능력자들의 존재를 분별할 수 있는 유나였으니 말이다.

나는 유나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해 주었고, 필요한 것들은 뭐든 지원을 해 주겠다고 말했다.

유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을 받아들였다.

“사생활이 많이 제약받을 수는 있겠다.”

내가 말하자 멍하니 있던 정우 형이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아무 때나 유나 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거기에 계시는 게 좋잖아요. 유나가 뭘 알아내게 되거나 능력자들을 알아보거나 하면 형이 거기에 같이 있다가 저를 부르셔도 되고요.”

“저는 상관없어요.”

유나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했다.

정우 형은 어깨를 으쓱였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야, 그것도 근도를 통해서 알게 될 수 있었다.

근도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을 했던 것이다.

“늙은 정우 말인데.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겠다.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랑, 그리고 자기를 기억해주는 여자랑 같이 살게 됐는데 몸이 없잖아. 늙은 정우. 성욕도 없어진 건가?”

“어?”

나는 형한테 육체가 없다는 것이 그런 식으로 어려움을 초래할 거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차라리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 돼 버린 거라면 좋은데. 그 기억을 갖고 있는데 육체만 없는 거라면 정말 괴롭겠다. 유나씨를 보고 흥분될 때마다 하고 싶을 텐데. 그런데 막상 육체가 없으니까 거세당한 남자의 심정이겠다.”

“…….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건가?”

“그렇지 않겠어? 그리고 너. 유나씨랑 설마 먼저 한 건 아니지?”

“어? 응. 처음부터 기분이 이상했어. 왠지 유나를 만났을 때는 더 이상 접근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딱 들더라고.”

“다행이다. 너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먹어버렸어봐라. 유나씨는 늙은 정우의 유일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만약에 네가 그랬으면 늙은 정우는 말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겠지. 유부녀를 짝사랑하는 남자처럼.”

“너는 그런 생각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하냐?”

“나? 나 게이잖아.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이겠냐? 좋아하는 사람한테 다가갈 수 없는 채로 멀리에서만 봐야했던 일이.”

근도는 네깟게 뭘 알겠냐는 표정으로 나를 거만하게 내려다 봤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부분에서 섬세하게 남의 감정을 캐치하고 이해하는 걸 근도가 나보다 훨씬 더 잘 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수영도 가끔, 아이디어가 막힐 때 근도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수영은 근도의 미친 감성을 부러워하곤 했다.

하여간 별종은 별종이었다.

통찰력과 감성이 남다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리를 하자면. 유나씨가 능력자들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그 능력자들은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지? 네가 딥 웹에 접속하기 전까지는.”

“그런 것 같아.”

“그럼 딥 웹에 접속한 이후에는 유나씨 가치가 급상승하겠네?”

“그때는 나도 알아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려나? 암튼, 유나씨한테는 잘 해야 되는 거네? 나도 잘 해야지? 아! 므로는 절대 유나씨한테 다가가지 못하게 해야겠다. 그거. 너무 슬프잖아. 막 흥분되는데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남자한테는 그게 없어. 그 뭐지? 파리넬리? 그 영화 같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 일을 한없이 미루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딥웹에 접속을 하고 헤드를 만나고 능력자들과 싸우는 게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더 체계적으로 그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들과 마주쳐서 싸우면. 이길 수 있겠지?”

내가 물었다.

“유나씨한테 말해서 능력자가 나타나면 알려달라고 하고 하나 납치해서 겨뤄보면 확실히 알겠네.”

저 자식은 도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고 말을 하는 걸까.

그런데 또.

안 될 건 뭔데? 라는 생각이 바로 그 뒤를 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존재가 들통나지만 않는다면 딥 웹에 접속하기 전에도 유나를 통해서 능력자들과 싸우고 그들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근도를 바라보자 근도는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물어보자. 문제될 게 있는지. 늙은 정우한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후로 정말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씩 바로 바로 기록을 해 두지 않으면 나조차도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가 버릴만큼.

첫 번째는, 새엄마가 정우 형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게 워낙 내밀한 사생활이라서 새엄마에게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다행히 근도가 그 자리에 대신 있어 주었다.

그리고 근도는 정우 형이 유나를 만나게 된 과정과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근도의 요점은, 정우 형에게 성욕이 남아있는 상태일 경우에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찾아달라는 거였고 새엄마는 즉시 요점을 파악했다.

일단은 정우 형이 홀로그램으로 있는 그 상태에서 성욕을 느끼는지를 알아보는 게 필요했고 그후에는 정우 형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새엄마에게는 그 새로운 프로젝트가 그동안 해오던 연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었지만 (게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잡아먹고) 새엄마는 기꺼이 그 작업에 착수했다.

매번 어려운 일들을 떠안겨서 죄송하다는 말에 새엄마는, 정우 형 역시 엄마의 아들이고 아들의 가장 중요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건 엄마가 할 일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내가 속으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는데 정우 형이 그 일에 전혀 협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우 형이 없이는 일이 진행될 수가 없었는데 정우 형은 새엄마의 연구에 완전히 비협조적으로 굴었고 지금은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는 성욕을 느끼지도 않는다고 했다.

외부의 감각을 수용하는 기관도 없다고 말을 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형은 그래도 우리가 그 문제를 신경써 준 것만큼은 정말로 고맙다고 했고 언젠가 몸을 되찾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고 말했다.

몇 번 설득을 해 보려고 했지만 형은, 지금까지 신경을 써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겠지만 여기에서 더 고집을 부리면 자기도 화가 날 것 같다고 정확하게 말했다.

임정우가 화가 난다.

그 뜻을 나처럼 잘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새엄마에게도 그것에 대한 연구는 중단하자도 말했고 새엄마도 받아들였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정우 형이 그런 걸 잘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그런 표정도 거두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유나 역시 성욕이 감퇴한 상태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상반된 기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복용했던 약물이 유나의 몸에 아직 영향을 나타내고 있어서였다.

그 문제가 그렇게, 시작도 되기 전에 끝이 나서 우리는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것은 유나를 통해서 능력자들을 분간해내고 그들을 내가 공격하는 것에 대한 거였다.

형은 아마도 그게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고 내 데뷔전이 치러지기 전에 내가 더 많은 능력자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능력을 흡수할수록 나중에 실전에 임하게 될 때 유리할 거라고 말했다.

일단 그렇다고 하는데 더이상 생각할 것이 없었다.

카린이 꾸렸던 팀은 이제 다른 임무를 받는 것이 금지되었고 내 싸움을 돕기 위해 거기에 맞춰졌다.

이지도 대대장님은 우리를 본격적으로 훈련시켰다.

대대장님은, 자기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만 남에게 기술을 습득시키는 것은 정말 잘했다.

대대장이 괜히 대대장인 게 아닌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켜놓고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한 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그 고집이, 민간인 신분이 된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

나와 근도는 대대장님이 시키는 걸 어느 정도 무리없이 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대장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도 우리가 그것까지 해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순식간에 지구를 돌고 오라는 것 같은 건 시키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정말로 그걸 시켰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 비슷하게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게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열등하다는 느낌을 받을 틈이 없었다.

자괴감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들의 수준이 달라지고 대대장님이 내 앞에 나타나면서 나는 어느새 열등감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오히려 나보다 못한 현이는 가끔 칭찬도 해 주면서.

아, 진짜 그냥 확 삐뚤어져 버릴까!

현이는 자기가 근도나 나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이는 우리를 기준으로 해서 열등감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날 나는, 현이가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나 해서 아주 진지하게 현이에게 그 문제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말야. 나같은 형이랑 같이 있으면 막 네 존재 자체가 쓰레기같다는 생각 같은 거 안 드냐?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 따위일까. 나는 언제쯤 돼야 저 사람의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막 그런 절망감이 들고 그러지 않냐? 나는 네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봐서 막 무쟈게 걱정된다?"

정말로,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현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전혀 안 그래, 형.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해? 나는 서 있는데. 이렇게 서 있을 수 있게 됐는데."

그 말에 한순간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현은 쓸데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형이랑 근도 형은 정말로 대단하지. 정말 굉장하고. 하지만 내가 형들이랑 경쟁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형. 나는 서 있잖아. 이 자체로도 나는 내가 너무 위대해 보여. 나한테 일어난 일들이 전부 다 너무 감사하고. 그러니까 나도 조금은 형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도움도 안 될 녀석을 형이 옆에 두지도 않을 거잖아."

현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소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범해지고 싶었다는 말.

드디어 평범해졌다는 것 때문에 감격했던 말.

결여를 겪었던 사람은 그 경험만으로도 엄청나게 강해지는 거구나 라는 것을 나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현을 놀리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대대장님이 현이만 칭찬을 해 주니까 나도 모르게 현을 괴롭히고 싶어졌었던 것 같다. 나도 지금 깨달은 바다) 둘 중에 바보가 된 사람은 나였다.

내가 자만심에 방방 떠 있었다면 현은 자존감으로 굳세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장님이 현을 칭찬할 때마다 현이 나와 근도에 한참 못미치니까 토닥거려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에게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다른 강점이 있었다.

나는 현을 안아주려고 했다.

"형 기분이 어떤지는 알겠는데. 나, 이런 거 굉장히 싫어한다? 누가 함부로 나 만지고 안고 그러는 거. 머리 쓰다듬는 것도 싫어하고."

현이 말했다.

이노무시키. 내 친척 아니랄까봐 겁나게 단호박이다.

대대장님은 어쨌거나 그렇게 우리를 훈련시켰다.

내가 군대에서 겪었던 어떤 악마들도 상대가 되지 않도록 혹독하게.

현이는 나와 근도보다 더 열심이었다.

다 죽어가는 우리 곁에서 같이 달리면서 환하게 웃는 녀석.

그래. 너, 다리 있고! 너, 서 있어.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 웃을 수 있는 놈은 그놈밖에 없을 것이다.

어쩐지 갈수록 무서워진다.

근도도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내 말에 적극 동의를 해 주었다.

대대장님이 그러는 건 정우 형과 이미 얘기가 돼있는 내용이었던 듯했다.

정우 형은 대대장님에게 내가 어떤 사람들과 싸우게 될지를 말해 주었고 대대장님은 은수 형의 도움을 받아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각각 어떤 훈련들이 필요할지 맞춤형 훈련을 시켜 준 것이다.

우리는 인식제어자들의 공격에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훈련도 같이 받았다.

그때는 세영 누나가 동원됐다.

세영 누나는 최면에 걸리지 않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답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였다.

아주 강력한 최면술사나 인식제어자에게 걸리면 무슨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거라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한에서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훈련 시작이다."

세영 누나는 그 말을 하면서 우리 앞에서 동전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동전으로 향하게 하고 동전을 이쪽 손에서 저쪽 손으로 옮겼다.

동전을 어디로 옮겨야겠다고 누나가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의 각 부위가 나서서 동전을 서로 가져가 삼켜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전은 전혀 이상한 곳에서 나왔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곳,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몸에서도 나왔다.

사라진 동전이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또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생전 쓸, ‘감쪽같다’는 말을 그 날 다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어깨에서 팔을 타고 손바닥까지 굴러온 동전이 허공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는 모두 입을 턱 벌리고 있었다.

“눈속임이 사람의 생각을 조종하기도 한다는 걸 기억해야 돼.”

세영 누나가 말했다.

“패러다임이 그림을 상상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곳의 그림을 만들어내거든. 모자를 쓰고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집에 들어간 장면을 보고 난 다음에, 몇 분 후에 똑같은 모습의 남자가 그 집에서 나오는 걸 보면 그걸 본 사람들은 그 남자가 집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집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어. 똑같이 모자를 쓰고 흰 셔츠를 입고. 그런데 그런 남자가 들어가는 걸 애초에 본 적도 없는 사람은 모자를 쓰고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나오는 걸 봐도 아무 것도 오해하지 않지. 그냥 그 사람한테는 어떤 남자가 집 밖으로 나왔다는 인식만 있을 거야.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실제로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되는 일은 달라. 나는 모두를 속였어. 그럼 나한테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세영 누나의 말에 우리는 모두 대답을 찾으려고 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돼. 무시하면 안 속아. 너희들이 속은 건 내가 보여주는 걸 조금도 놓치지 않고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너무 집중해서 봐서 그런 거야. 동전이 어디로 가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동전이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져도 놀라지 않아. 사라진 줄도 모르거든.”

“그게 뭐예요!”

대단한 비기가 풀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실망해서 마구 투덜댔다.

“이제는 속지 말아봐.”

누나가 말했다.

그리고 동전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잡아 쥐었다.

누나한테서 이미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건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도 눈이 어느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도도, 현도, 대대장님도 마찬가지였고 정우 형도 황홀한 듯이 누나의 동전마술을 구경했다.

누나는 인식 제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마술사들이 하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수준이 뛰어났다.

누나는 현의 손바닥에서 손을 찢고 그 살을 뚫고 그 속에서 동전을 꺼내는 것처럼 할 수도 있었다.

으악, 으악 하는 비명이 계속 우리 입에서 나왔다.

거기에 덤덤해지고, 자극을 무시하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게 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 분명히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데 무시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환상을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입체감과 열기, 냄새까지는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상이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마치 정우 형과 같았다.

“허상을 구분해. 실체가 없는 건 굳이 피할 필요가 없는 거야.”

세영 누나가 말했다.

근도와 현은 내가 만들어 보이는 갖가지 환상들을 보면서 허상과 실체를 구분하는 훈련을 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기분.

죽을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딥 웹의 다른 능력자들을 만나기도 전에 과로로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려고 하면 세영 누나가 됐건 대대장님이 됐건 정우 형이 됐건 우리를 훈련시키던 사람은 현에게 물었다.

힘드냐고.

그러면 그 자식은 늘, 언제나, 항상! 한결같이 대답했다.

“아뇨. 재밌어요!”

저 새끼는 그냥 미친 거다.

그냥 하나의 정신병자인 거다.

“야, 임정우.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일단 추측이긴 한데 맞는 것 같아. 잘 들어봐. 민현 있잖아? 저 자식이 능력자야. 형태변환자 같은 그런 종류의 잘 알려지지 않은 능력자인 거야. 그래서 저 자식이 네 사촌동생인 것처럼 하고 우리한테 나타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말려죽이려고 항상 저렇게 헤벌쭉 웃고 다니는 거야. 어때. 맞는 것 같지?”

나보다 더 심각하게 맛이 간 근도가 말했다.

“어. 전적으로 네 말이 맞아. 저 자식을 쓰러뜨리자!”

그러면 민현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와하하하하 하고 웃고 우리가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바닥에 누워 레그 레이즈나 크런치를 했다.

그러면서 다시 움직이고 싶다는 듯 꿈틀거렸다. 그러면 ‘현이가 훈련하잔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휴식이 종료되었다.

“내가 망볼게. 네가 저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내가 근도한테 말을 하면 현은 그 말을 듣고 또 아하하하하 웃어대기만 했다.

그렇게 민현이 형태 변환자(shape shifter)라는 설은 나와 근도라는 두 열성적인 지지자를 두고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유력설로 굳어졌다.

정우 형은 우리가 각각의 능력자들을 상대로 어떤 전술을 펴야 할지 알려주었고 은호 형과 은수 형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알아보기 위해서 무기 제조업자들에게까지 접촉을 했다.

불법의 요소가 있다라고 말을 한 단계를 넘어서 매순간의 모든 행동이 법규를 위반하는 거였지만 그때마다 카린과 정우 형이 나서서 뒤를 지우고 다녔다.

불법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수사기관에서 움직이려고 하면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와서 수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는 식이었다.

특수한 임무를 위해서 상위 기관에서 승인한 일이니 너희는 관할 밖의 일에 나서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사사로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알아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징계가 따랐다.

총을 쓸 수 있으면 싸움이 편해지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정우 형은 지금까지 나타난 유형의 능력자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살상 무기가 아군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인식 제어자들만 해도 그랬다.

만약 그 사람들이 우리가 손쓰기 전에 우리의 인식을 제어해 버리고 우리 팀을 서로에게 적으로 인식시켜 버린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발생하는 일이다.

칼이나, 아니, 맨주먹만 가지고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일단 인식 제어에 걸려들고 나면 무기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 팀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그 문제를 두고 논의를 계속했다.

결국 이지도 대대장님이 정우 형의 얘기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무기를 가지고 싸우면 인식 제어가 되었을 때의 파급 효과가 너무 커질 거라는 거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근에 있는 몇 십명, 몇 백명이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후의 타협안은, 근도의 팔에만 무기를 새롭게 장착하는 거였다.

그리고 근도에게는 세영이 누나가 첩첩으로 수많은 암시를 걸었다.

상대가 우리일 때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게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그것에 반하는 행위를 하려고 할 때 근도의 몸이 일시에 멈추도록 암시를 걸기 위해서 세영 누나는 자기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러고는 근도를 보면서 자신이 가진 능력의 에센스를 부어 놨다고 말했다.

근도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왼팔을 포기해야 했지만 오른팔이랑 왼팔이랑 근육 크기가 달라서 그동안 계속 스트레스였다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나는 틈틈이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제 아이템은 극악 확률로 나타났지만 그래도 어떤 것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가능한 준비를 모두 해두고 싶었다.

나에게 나타났던 능력들은 내 피부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내가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한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우리는 늘 스탠 바이 상태였고 유나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에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찾을 생각에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정우 형의 npc들은 유나 외에 아무도 정우 형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이 비상시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여자들 하나하나에게 정보다는 몸과 정액을 주는 쪽으로만 치우치게 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들이 그냥 사이트를 통해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게 아니라 정우 형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여자들이라는 생각에 애정이 저절로 생겨났다.

첫인상의 호감도는 엄청나게 높지만 관계가 깊이 무르익을 수는 없는 관계. 그러면서도 육체적인 접촉인 최대한 많이 해야하는 관계.

그게 내 새로운 애정 관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한 나는 지금까지 보던 것과 다른 화면이 뜨는 것을 보았다.

[스페이스 아이템-스페이스를 만들 수 있는 아티팩트를 구해 여자들을 구출하시오. 새로운 세 명의 여자를 공략할 때마다 하나의 아티팩트가 주어집니다. 획득한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는 동안 아공간을 생성할 수 있으며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아이템 획득을 위해 퀘스트를 수행하기 때문에 아공간 유지를 위해 별도의 요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이제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세 사람을 공략할 때마다 하나씩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이게 마냥 좋아하기만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의 npc가 아닌 여자들도 나오는 건가? 이건 형한테 물어봐야겠는데? 아티팩트가 필요한 건 형의 npc였던 여자들이니까.’

나는 정우 형이 이런 걸 몸캠 영상 사이트에 숨겨 두고도 왜 아무 언급도 없었던 건가 하면서 곧바로 형을 불렀다.

이제 형을 부르는 것은 쉬워졌고 전처럼 핫 걸을 통할 필요도 없었다.

형은 내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해 놓고 이제는 그것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 상황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형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나는 형이 보는 앞에서 몸캠 영상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기억이 이렇게까지 손상된 건가? 나는 정말 이런 걸 한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이 정도로 많은 아티팩트를 구해서 넣을 수도 없었고. 이거. 셸터랑은 다른 거잖아. 나는 셸터를 넣은 기억밖에 없어.”

나와 형은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스페이스 아이템은 셸터와는 달랐다.

셸터는, 내가 인벤토리에 있는 내 여자들을 셸터로 옮기는 동안 실제로 이동됐던 여자들이 그 사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몸캠 영상 사이트에서 내가 조작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스페이스 아이템은 달랐다.

이동을 원하는 여자들이 아티팩트를 가지고 자기 스스로 그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티팩트가 왜 필요한지, 왜 숨어야 하는지도 알아야 했고 그 말은 내가 이제부터 내 여자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누가 그런 거라고 생각해?"

형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형이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든가요?”

내 말에 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드도 이제 네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헤드는 너랑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는 거야. 네 여자들이 안전해지지 않으면 너는 딥 웹에 접속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 거지.”

“그런 거라면….”

“모아야지. 모을 수 있는만큼 모아.”

이제는 나한테도 므로가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부 완결

***

기억하겠지만 영상을 전부 다운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화장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이트를 만든 사람을 이미 알고 있고 사이트 관리자인 정우 형이라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사이트 안에서만큼은 형이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자기가 만들었으니까 자기가 바꿀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형에게 그걸 없애달라고 부탁했다.

화장지가 없어도 영상을 다운받을 수 있도록 모든 제한을 풀어달라고 한 것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내가 한 번 관계를 가졌던 여자와 다시 관계를 갖고 정액을 배출하는 것으로도 화장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해 달라고 했다. 그거야말로 이상적인 구조였다. 그러면 나는 내 여자 친구들에게 더 많은 회피 아이템을 주는 것이고 내 여자 친구들은 그만큼 안전해질 테니까.

그런데 형은 그걸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사이트를 만드는 작업은 전부 끝이 났고 그걸 만들 때의 자기랑 지금의 자기를 완전히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난해하게 말했다.

헷갈리기는 했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형이 그 사이트의 관리에 완전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스페이스 아이템이 생겨난 것만 봐도 그렇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우 형이 만들었다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헤드가 나서서 직접 심어놓은 게 분명한 것 같았다.

그런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아이템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텐데 내가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그 아티팩트를 한없이 주려는 것 같으니 말이다.

어찌됐든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나는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첫째로, 앞으로 아티팩트를 받게 될 내 여자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대비도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계속해서 감추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빨리 내 여자친구들이 정우 형을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정우 형은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정우 형은 내 여자 친구들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 불 타는 집에 홀로 뛰어 들어서 내 여자친구들을 전부 구하고 홀로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은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실체도 없이 홀로그램의 상태로 머물러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의 존재를 계속 없는 것처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얘기를 근도와 은호 형에게 말하자 은호 형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근도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은호 형과 근도는 정우 형에게 의미있는 날을 만들어주자고 했고 은호 형이 나서서 그 일을 준비했다.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나도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한테는 화장지를 모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여자들과 가볍게 만남을 가질 방법을 생각하다가 나는 예전에 내가 이용하던 만남 사이트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사이트를 다시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선뜻 들지 않았다.

보안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주 좋았지만 나는 그 사이트에 가입돼 있는 여자들의 허세가 너무 싫었다.

그리고 그 사이트는 일단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아무나 가입할 수 없는 사이트다보니 풀이 적었던 것이다.

나는 많은 여자들을 가볍게 만나는 게 중요했다.

질 좋은 소수만 모여있는 곳보다는 폭넓은 만남이 가능한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곳이 질이 좋은 곳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였고.

그래서 은호 형과 상의를 해서 가벼운 만남을 주선하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자기들이 마음이 맞으면 만나는 거고 다른 모든 활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성범죄 경력을 갖고 있거나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심각한 폭력 성향을 드러낸 적이 있던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가입을 금지했다.

혹시라도 우리 사이트를 통해서 만남을 가졌다가 원치 않는 일을 강제로 당한 경우에는 우리가 치료비와 위자료를 지급해 주기로 했다. 성관계를 원인으로 해서 사후에 협박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손해를 배상해 주고나서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했고 우리의 영업을 위태롭게 한 것에 대해서도 별도의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

돈을 못 받을까봐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수중에 당장 돈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기저기에 알아보면 얼마 정도씩은 융통을 할 수가 있기 마련이니까.

근도가 나서거나, 근도로도 안 되면 내가 나섰다.

대부분은 근도의 선에서 해결이 됐다.

하지만 근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그러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내가 나섰다.

하이드 스킬을 쓸 때도 있었고 끔찍한 환상을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잠들지 않은 채로 악몽을 꾸도록 나는 친히 그들을 인도했다.

그것은 내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사이트지만 동시에 나와 은호형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기도 했다.

일종의 섹스 보험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나쁜 놈들을 잡아서 삥을 뜯는 것.

그게 우리의 주된 수입원이다.

우리는 그것을 세이프 랑데뷰라고 불렀다.

샴푸 이름 같지만 샴푸는 아니다.

우리 사이트를 이용해 만남을 가졌다가 폭행을 당했을 때 받게 되는 보험금이 3천만원 가량이 되다보니 그 돈을 노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것도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둘이서 서로 짜고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나타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우리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와 대화를 하다가 몇 초간 정신을 잃고 나면 불가항력적으로 자기들의 기억을 나에게 내보인다.

잠깐의 면담 시간을 가지고 나면 나는 그들이 섹스를 하는 동안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처럼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해서 자기들의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지랄을 해댄다.

나는 거리낄 게 없으니 찾아보라고 말하고, 설치했다가 뗀 것 아니냐는 추궁을 받는다.

그럼 뗀 자국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인간 군상이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나올지 유형이 있다.

그리고 거의 그 틀 안에서 움직이지, 유니크한 건 별로 없다.

여차하면 세영 누나가 나서주기도 했다.

세영 누나의 최면에 한 번 걸리고 나면 보험 사기를 노린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자백이 녹음된 파일을 선물로 받게 된다.

우리 사업은 점점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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